[유경동의 특허토커] 특허와 대통령

  • 유경동 윕스 전문위원
    입력 2017.11.23 09:15

    특허와 대통령. 언뜻 보면 별 연관성 없어 보이는 조합이다. 하지만 '4차산업혁명'이 세계 경제의 화두가 되면서 지식재산의 대명사격인 특허는 통치와 혁신의 글로벌 아이콘이 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한국과 중국 등에 대한 특허침해를 명분으로 통상 압박을 노골화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 역시 집권 초기부터 중소기업 등을 상대로 한 지식재산 보호체계 강화를 위해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미합중국 제 16대 대통령

    "특허제도란 발명가의 불꽃 열정에 돈이란 기름을 끼얹어주는 것이다."(The patent system added the fuel of interest to the fire of genius.)

    국내에서는 이 말이 미국 특허청(USPTO) 건물에 붙어 있는 것으로 소개되지만, 이는 정확히 국립초상화박물관(NPG) 건물 출입구 상단에 새겨져 있다. 문장 끝에 음각돼 있듯 이는 미합중국 제16대 대통령인 링컨이 한 말이다. 링컨 하면 노예해방의 아버지로 널리 알려졌지만, 순서상 '특허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먼저다.

    미 워싱턴DC 소재 국립초상화박물관(NPG) 건물 출입구(doorway facade) 상단에 새겨진 문구. 특허제도에 대한 미국 사회의 기본 이념이 잘 담겨 있다. / 슬리퍼리슬로프 제공
    뱃사공과 가게 점원, 토지 측량기사 등으로 불우한 유년기를 보낸 링컨은 당시 오하이오 강을 오가던 배들이 하천 모래톱에 자주 걸리는 것을 유심히 봤다. 링컨은 '모래톱 위 얕은 물에서 떠오르는 배'(Buoying Vessels over Shoals)라는 발명을 했고 1849년 5월 미국특허(등록번호 6469)를 취득한다. 특허를 가진 유일한 대통령이라는 사실은 아직도 깨지지 않은 미 백악관의 오랜 진기록 중 하나다.
    링컨 대통령의 유년기 뱃사공 시절 경험이 녹아 있는 특허 도면. 이물과 고물 쪽에 부양용 공기주머니를 달아 그 부력을 이용, 배를 띄우는 방식이다. 링컨은 이 특허를 대통령 취임 12년 전인 1849년 취득했다. / USPTO 제공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미국에 링컨이 있다면, 한국에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있다. 링컨과 같은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그는 재임 기간 중 특허를 취득한 세계 유일의 국가원수로 기록돼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재임 3년차인 2005년 8월 청와대 통합업무관리 시스템인 '이지원'(e-知園)을 특허청에 출원했고. 이듬해 2월에 정식 등록(10-0553452)을 받았다. 발명 명칭은 '통합 업무 관리시스템 및 이의 운영 방법'이다. 이 특허는 국유 특허로 설정돼 있으며, 현재 특허 권리자는 대한민국 정부다.

    이 출원 건은 당시 특허청 전자상거래심사과 박성우 심사관에게 배당됐다. 국제 특허분류(IPC)에 따라 전자상거래심사과 소속 20명의 심사관 중 한 명에게 무작위로 돌아간 것이다.

    현재 특허청 정보기술융합심사과장으로 재직중인 박 과장은 "출원인이 현직 대통령이라는 사실은 해당 건을 배당받은 뒤에 알았다"며 "(출원 건의 당사자가) 특수인이라 신경은 쓰였지만 심사과정에서 청와대나 특허청 윗선으로부터 어떠한 압력도 받은 바 없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실제 출원서가 접수된 바로 다음 날 박 과장은 청와대로 '보정요구서'를 호기롭게 날린다. 서류 다시 써오라는 얘기다.

    박 과장은 "명세서상 일부 항목에 '기재불비'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통상의 심사과정일 뿐이었다"고 말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개발해 특허등록한 청와대 업무관리 시스템 ‘이지원’의 특허공보. 발명자란에 당시 현직 대통령인 ‘노무현’ 등 실무자 이름이 적시돼 있다./ 윈텔립스 제공
    이지원은 단순 게시판이나 온라인 보고 시스템을 뛰어넘는다. 문서의 생성부터 최종 결재 이후 기록·보관에 이르기까지 해당문서의 전 처리 과정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만든 솔루션이다.

    2003년 2월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기 전까지 청와대는 대통령 비서실의 업무를 관리·지원하기 위해 어떠한 정보 시스템도 사용하지 않는 후진적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지원이 도입된 뒤 청와대는 달라졌다. 가장 큰 변화는 '정보의 공유'였다. 노 전 대통령은 청와대, 나아가 전 공무원 사회의 부서·부처별 칸막이 문화를 없애는 것이 공공업무 효율화를 위해 가장 시급하다고 여기고 자신이 갖고 있던 정보 독점권부터 내려놨다. 이를 위해서는 종이서류가 아닌 온라인 시스템으로 업무보고를 주고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이지원은 정보의 공유를 통해 부처별 칸막이 문화를 없애는 등 정부 업무처리 전 과정을 투명화·체계화했다.

    이지원의 ‘나의 업무’ 메뉴 실제 구동 장면. / KDI 제공
    이후 정부 업무 시스템은 이지원(청와대)을 중심으로 '하모니(행자부)'와 '온나라(전 부처)' 등으로 체계화됐고 참여정부는 역대 어느 정권보다 많은 기록물을 남길 수 있었다. 이지원은 한마디로 당시 공무원의 일하는 방식에 변화와 혁신을 준 발명품이었다.

    하지만 이런 시스템적 우수성이 오히려 퇴임 후 노 전 대통령의 발목을 잡았다.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등 청와대 자료유출 문제로 이명박 정부(MB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면서다. 이지원의 공동 발명자이자 당시 시스템 개발을 주도했던 민기영 전 업무혁신비서관이 검찰에 소환돼 고초를 겪으면서 이지원은 전직 대통령의 자살로 막을 내린 비극의 단초가 됐다.

    총 122억원의 정부예산을 들여 구축한 이지원은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며 사실상 폐기 상태에 놓였다. 참여정부 대통령 비서실 출신 김영배 현 서울 성북구청장이 구정에 일부 도입해 쓰며 유일하게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지원이 존속됐다면 세월호 사고 당시 이른바 '대통령의 잃어버린 7시간'과 같은 국가적 소모 논쟁은 필요 없었을 것이다. 해당 시간대 대통령의 업무지시와 보고사항 등이 시스템상에 가감 없이 기록·공개되기 때문이다.

    "당대가 아닌, 후대 대통령을 위해서라도 이지원 시스템은 꼭 필요하다"고 역설했던 노 전 대통령의 바람과 달리 그의 발명품은 아이러니하게도 후대 대통령에 의해 철저히 유린된 셈이 됐다.

    ◆창조경제에 묻힌 특허

    2016년 5월 어린이날. 청와대 녹지원에서는 도서·벽지·다문화가정 어린이 초청행사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전남 완도군 넙도초등학교 5학년 이승찬 군이 대통령에게 쓴 편지
    를 낭독한다.

    "꿈이 발명가인데, 제가 살고 있는 곳은 작은 섬이기 때문에 발명가가 되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 지 알려줄 사람이 없어요."

    박근혜 대통령이 답한다.

    "전국에 이제 창조경제혁신센터라는 게 각 시도마다 있어요. 여기에 가면 안내를 받을 수 있습니다."

    넙도에서 가장 가까운 센터는 직선거리 130km 떨어진 여수시 소재 전남창조경제혁신센터다. 이 곳은 농수산 벤처창업과 웰빙관광, 바이오생태계 사업 등이 주력이다. 승찬 군이 어렵사리 배 타고, 버스 타고 찾아간다해도 무엇을 얻을 수 있는 곳이 못된다.

    청와대 공식행사가 다 그렇듯 이 문답 역시 부속실을 통해 사전 각본대로 이뤄졌다. 현장에서 허둥지둥 나온 말이 아닌, 해당 업무를 담당하는 미래수석 라인에서 미리 검토하고 준비해 내놓은 멘트란 얘기다.

    “발명가가 되려면 어떤 일을 해야 하느냐”는 어린이 질문에 박근혜 전 대통령이 답하고 있다. / 청와대TV 제공
    박 전 대통령은 헌정 사상 첫 이공계(서강대 전자공학) 출신 인사다. 취임 초부터 발명·특허계의 기대를 한 몸에 모았다. 하지만 창조경제를 기치로 내건 박근혜 정부의 '지식재산(IP) 눈높이'는 딱 그 수준이었다.

    대통령의 덕담(?)이 도마에 오른 뒤 불똥은 애꿎은 한국발명진흥회로 튀었다. 진흥회는 허겁지겁 넙도초를 찾아가 '발명콘서트'라는 행사를 급조해 만들어야 했다.

    일국의 과학기술 정책을 대통령 한사람의 일화나 에피소드로 재단할 수 없다. 하지만 발명·특허에 대한 최고통치자의 평소 소신이나 행동은 당대 정권의 정책 수준과 깊이를 가늠케 한다.

    "그는 독학으로 누구 못지않은 지식과 지혜를 쌓았다. 대통령 지명 후에 고백했듯이 그의 지식은 필요에 의해 더 진보될 수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이 2001년 써 낸 '노무현이 만난 링컨' 중 일부다.

    ※ 외부필자의 원고는 IT조선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유경동 위원은 전자신문 기자와 지식재산 전문 매체 IP노믹스의 편집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현재는 국내 최대 특허정보서비스 업체인 ㈜윕스에서 전문위원으로 재직 중입니다. IP정보검색사와 IP정보분석사 자격을 취득했으며, 특허청 특허행정 모니터단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특허토커'와 'ICT코리아 30년, 감동의 순간', 'ICT시사상식 2015' 등이 있습니다. '특허시장의 마법사들'(가제) 출간도 준비중입니다. 미디어와 집필·강연 활동 등을 통한 대한민국 IP대중화 공헌을 인정받아, 올해 3월에는 세계적인 특허전문 저널인 영국 IAM이 선정한 '세계 IP전략가 300인'(IAM Strategy 300:The World's Leading IP Strategists 2017)에 꼽히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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