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초부터 세계 반도체 시장을 들썩이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낸드플래시 반도체 분야에서 삼성전자에 이어 점유율 2위를 기록하던 일본 도시바가 재정난으로 반도체 사업부문을 분사시킨 도시바메모리 매각에 나선 것이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장기호황) 국면을 앞두고 매물로 나온 도시바메모리에 전 세계 반도체 기업의 관심이 집중됐다.

미국 웨스턴디지털(WD)과 마이크론, 한국 SK하이닉스 등 이 시장 1위 삼성전자를 제외한 후발주자가 모두 도시바메모리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대만 제조업계의 큰손 홍하이정밀공업(폭스콘)도 참전했다. 글로벌 사모펀드 다수도 군침을 흘렸다. 각국 기업의 치열한 합종연횡이 펼쳐졌다. 연초부터 시작된 도시바메모리 인수전은 가을이 돼서야 SK하이닉스가 참여한 한·미·일 연합 컨소시엄의 승리로 끝났다.

. / SK하이닉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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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낸드플래시 2위 도시바, 경영난에 반도체 매각 고육지책

1875년 설립된 도시바는 세계 최초로 노트북과 낸드플래시를 개발한 일본 간판 전자 기업이다. 하지만 140년 연혁의 도시바도 잇단 회계부정과 투자 실패로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결국 터질게 터졌다. 도시바는 미국 원전 사업에서 7000억엔(7조억원)이 넘는 손실을 입으며 회생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시가 시게노리 도시바 회장은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바는 결산실적 발표를 잇따라 미루며 시장에서 신뢰를 잃고 도쿄증시에서 상장폐지될 위기에 처했다.

도시바는 핵심 사업 중 하나인 반도체 사업부문을 매물로 내놓기로 결정했다. 도시바 반도체 사업부문의 주력 제품은 낸드플래시 반도체다. 낸드플래시는 컴퓨터, 스마트폰 등에서 데이터를 빠르게 읽고 쓸 수 있는 저장장치 핵심 부품이다. 최근 솔리드 스테이트 드라이브(SSD) 수요가 급증하면서 D램과 함께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이끄는 두 축으로 자리매김했다.

도시바는 1월에만 해도 반도체 사업부문 지분 20%쯤만 매각해 2000억엔(2조원)의 긴급 자금을 마련할 계획이었다. SK하이닉스와 WD, 마이크론, 폭스콘 등이 예비입찰에 참여했다. 하지만 지분 20%만 인수할 경우 경영에 참여하기 어렵고, 투자 대비 메리트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참여 기업의 소극적인 분위기가 연출됐다.

결국 도시바가 3월 매각 지분 비중을 높여 회사 경영권까지 내놓을 수 있다는 조건을 내걸고 나서야 인수전은 급물살을 탔다. 심지어 도시바는 반도체 사업부문을 분사하고 2조5000억엔(25조원)에 지분 100%를 매각하는 카드까지 꺼내들었다. 글로벌 낸드플래시 반도체 시장의 판도를 바꿀 '빅 딜'의 향방에 전 세계가 주목하기 시작했다.

도시바메모리 핵심 생산거점인 미에현 소재 요카이치 공장 전경. / 도시바 제공
도시바메모리 핵심 생산거점인 미에현 소재 요카이치 공장 전경. / 도시바 제공
◆ 판 커지자 반전에 반전 거듭…결국 SK하이닉스 웃었다

도시바메모리 인수전의 판이 커지자 단독으로 인수가 힘들어진 입찰 기업간 합종연횡이 활발해졌다. 폭스콘은 도시바메모리 인수전 초기부터 가장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당시 최태원 SK 회장과 궈 타이밍 폭스콘 회장의 각별한 친분이 알려지면서 양사가 손을 잡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왔다. 하지만 폭스콘이 이내 같은 대만 기업인 TSMC와 연합전선을 구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SK하이닉스와의 연합은 물거품이 됐다.

도시바메모리 매각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지만, 일본 정부가 개입하며 분위기가 반전됐다. 일본 정부는 도시바의 반도체 기술이 국외로 유출될 경우 안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입찰에 개입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일본에서는 2016년 샤프를 폭스콘에 매각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기술 유출 관련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뜻과는 달리 수조원에 이르는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 부담 때문에 일본 현지 기업의 참여가 쉽지 않았다. 결국 도시바메모리 인수전 초반에는 반도체 사업을 진행 중인 SK하이닉스, WD, 폭스콘 등이 유력 후보로 부각됐다. 특히 WD는 도시바와 10년 이상 미에현 요카이치 공장을 공동으로 운영했다는 점을 들어 독점 교섭권을 달라고 요구하는 등 인수전 내내 판을 흔들었다.

도시바는 6월 도시바메모리 매각 우선협상대상자로 SK하이닉스, 미국 사모펀드 베인캐피탈, 일본산업혁신기구(INCJ), 일본정책투자은행 등이 참여한 한·미·일 연합 컨소시엄을 선정했다. 하지만 WD가 국제상공회의소 산하 국제중재재판소에 도시바메모리 매각 중단 중재를 요청하는 등 법적 대응에 나서자 다시 다른 진영과도 협상을 재개했다.

이후 인수전은 수차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혼전 양상으로 치달았다. 도시바는 8월 WD, 미국 투자펀드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 INCJ, 일본정책투자은행 등이 결성한 신(新) 미·일 연합 컨소시엄으로 우선협상대상자를 변경했다. 한·미·일 연합 컨소시엄은 애플 등 글로벌 IT 기업 다수를 우군으로 영입했다. 애플은 도시바 반도체 사업부문 최대 고객 중 하나다.

결국 도시바는 9월 28일 도시바메모리를 SK하이닉스 포함 한·미·일 연합 컨소시엄에 매각하는 본계약을 체결했다. 전체 인수가 2조엔(20원) 중 SK하이닉스는 3950억엔(4조원)을 부담하기로 했다. 매각 후 도시바메모리 지분율은 한·미·일 연합 컨소시엄이 49.9%, 도시바와 일본 파트너 기업이 50.1%로 도시바의 경영권을 유지하는 조건이다.

도시바메모리 주력 제품인 낸드플래시 메모리 반도체 모습. / 도시바 제공
도시바메모리 주력 제품인 낸드플래시 메모리 반도체 모습. / 도시바 제공
◆ '상생'으로 낸드플래시 경쟁력 강화 중장기 협력기반 마련

SK하이닉스 포함 한·미·일 연합 컨소시엄의 승부수는 다름아닌 '상생'이었다. 컨소시엄의 제안은 국가 핵심 기술 중 하나인 반도체 기술이 해외에 넘어가는 것을 우려하는 일본 당국과 경영권을 어떻게든 지키고 싶은 도시바가 가장 원하는 조건에 부합했다는 평가다.

최태원 SK 회장도 한·미·일 연합의 도시바메모리 인수 소식이 알려진 직후 "돈을 주고 산다는 개념이 아니라 반도체 업계가 좀 더 상생할 방법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그런 점을 도시바와 잘 얘기해 같이 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SK하이닉스는 D램 시장에서 삼성전자에 이어 2위 사업자지만, 낸드플래시 시장에서는 삼성전자, 도시바, WD, 마이크론에 이어 5위 사업자다. 상대적으로 낸드플래시 경쟁력 강화가 시급하다. SK하이닉스가 단독으로 도시바를 통째로 인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당장 SK하이닉스의 이 시장 점유율이 오르는 것은 아니지만, 도시바와 협업을 통해 중장기적으로 기술력을 높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중국 자본이 도시바메모리를 집어삼키는 것을 차단했다는 점도 중요한 성과 중 하나다. 중국은 반도체 굴기를 내세우고, 반도체 자립을 위해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비메모리(시스템) 반도체 분야를 집중 육성한 데 이어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한국을 따라잡겠다는 야심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도시바메모리가 자칫 중국 자본에 흡수되면 몇 년 내 낸드플래시 저가 출혈 경쟁이 펼쳐질 것이란 우려를 사전에 차단한 셈이다.

SK하이닉스가 확보한 지분이 경영 참여와는 거리가 멀고, 향후 10년간 도시바메모리 기밀 정보에 대한 접근이 차단된다는 점에서 애초 기대한 만큼의 시너지를 내지 못할 것이란 관측도 있다. 하지만 이는 동종 사업자인 SK하이닉스가 독점금지법 심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조치로 풀이된다. 독점금지 당국의 인가 취득이 필요한 8개국·지역 가운데 미국과 일본, 브라질, 필리핀 4개국에서는 이미 심사를 통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과 중국, 대만, 유럽연합(EU) 4곳의 심사는 현재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