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억의 과학에세이] 가상화폐, '사이퍼펑크'의 꿈과 '파레토'의 저주

  • 이태억 KAIST 교육원장/대한산업공학회 회장
    입력 2018.01.22 18:14

    최근 가상화폐(암호화폐)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가상화폐는 정부와 금융기관이 독점한 거래 및 지불 수단 통제에서 벗어나 각 개인이 익명으로 서로 자유롭게 거래하도록 하는 획기적인 기술이다. 이에 대해 ▲정부가 규제하거나 통제할 권리가 없다는 주장 ▲가상화폐는 아무 가치 없는 신기루 ▲변동성과 투기성이 너무 강해 화폐나 투자상품이 될 수 없다는 주장 ▲가상화폐를 금지하거나 실명화하되 기반 기술인 블록체인은 분리해서 육성해야 한다는 주장 등 다양한 의견이 팽팽히 맞선다. 각국 정부의 대응 정책도 제각각이고 갈팡질팡이다. 기술 혁신이 초래한 사회경제 변혁에 정부와 사회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꼴이다.

    가상화폐와 블록체인을 둘러싼 논점을 이해하려면 이들의 탄생 배경과 철학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대에 이르러 거의 모든 금융거래와 경제활동은 정부, 은행, 카드사 등 암호화된 중앙집중식 인증 체계에 의해 통제·조정된다. 암호는 온라인 뱅킹과 같은 금융거래와 카드 지불 등에 광범위하게 이용된다. 가상화폐와 블록체인 기술의 시작은 이러한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 운동으로 시작됐다. 많은 저서나 자료에도 널리 소개돼 있지만, 제임슨 로프가 정리한 내용을 중심으로 '사이퍼펑크(Cypherpunk)'의 기원을 잠시 살펴보자.

    1970년대 이전까지 암호는 주로 정부기관들이 비밀리에 사용하는 기술이었다. 휫필드 디피 박사와 마틴 헬만 박사가 데이터 암호화 표준과 공개키 암호 기술을 발표하면서 암호는 민간 부문에서도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 들어 데이비드 차움 박사가 '디지캐시'와 함께 평판시스템 등 익명 거래 시스템을 제안했다. 1992년네는 에릭 휴즈, 티모시 메이, 존 길모어에 의해 사이퍼펑크 모임이 시작됐다.

    에릭 휴즈는 사이퍼펑크 선언문에서 "프라이버시는 전자 시대의 열린 사회를 위해 필요하다. 프라이버시는 비밀과는 다르다. 프라이버시는 전 세상이 알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고, 비밀은 어떤 누구도 알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다. 프라이버시는 세상에 선택적으로 노출하는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즉, 익명성을 유지해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면서 열린 거래와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하는 암호 기술을 개발하자는 것이다.

    이후 사이퍼펑크 모임은 블록스트림, 해시캐시, 디지캐시, PGP(Pretty Good Privacy), SSL(Secure Socket Layer) 등 중요한 암호 및 거래 기술을 만들었다. 1997년 아담 백이 창안한 해시캐시는 익명성을 보장하고 이중 지불을 방지할 수 있는 가상화폐였다. 이메일을 보낼 때 우표 대신 해시캐시를 지불하게 함으로써 비용 부담 때문에 대량 스팸 메일 발송을 못하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1998년 웨이 데이는 비머니(b-money)라는 익명의 개인 간 계약을 체결하는 새 방법을 제안했다. 이는 각 참여자가 비머니를 얼마나 갖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모든 참여자의 별도 데이터베이스에 해시함수로 암호화해 서로 연결된 블록으로 저장하게 한다는 점에서 블록체인 개념과 상당히 유사하다.

    그는 거래 발생에 의해 새로운 블록을 추가할 때 가장 먼저 암호를 풀어 성공한 참여자에게 비머니 인센티브를 주는 '작업증명'과 보유한 가상화폐의 양에 따라 일부 참여자에게만 우선적으로 인센티브를 주는 '지분증명' 방법도 제안했다. 작업증명은 현재 비트코인과 같은 대부분의 가상화폐가 채택한 방식이며, 일부 다른 가상화폐는 지분증명 방식을 채택하기도 한다.

    2004년 할 피니는 해시캐시를 사용해 '재사용 가능한 작업증명'을 만들었다. 비로소 가상화폐의 근간이 되는 블록체인 기술이 만들어진 것이다. 2005년 닉 자보는 이를 이용해 '비트골드'라는 가상화폐를 제안했다. 비트골드는 총액을 제한하지 않았으나, 비트골드를 만들기 위해 동원된 계산량에 따라 가치가 정해졌다.

    드디어 2008년 사토시 나카모토라는 익명의 개발자가 해시캐시와 비트골드를 발전시켜 비트코인을 창안했다. 거래의 자유를 향한 사이퍼펑크의 오랜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나카모토는 2009년 오픈소스 비트코인 클라이언트 프로그램을 설치해 최초의 블록을 만들고, 50비트코인을 채굴한 뒤 할 피니에게 10비트코인을 줬다. 이후 소수의 암호연구자와 프로그래머가 비트코인을 채굴하고 주고받았으나 거래량이 많지 않아 실물가치가 형성되기는 쉽지 않았다.

    비트코인 최초의 실물거래는 2010년 어떤 프로그래머가 피자 두 판에 1만비트코인을 지불하면서 시작됐다. 2011년 위키리크스, 전자 프론티어 재단 등 비영리 재단은 비트코인으로 기부를 받기 시작했다. 상품 및 서비스 대가로 비트코인을 받는 곳이 점점 늘어났다.

    원시시대 물물교환처럼 정부가 발행한 공인 화폐를 통하지 않고, 비트코인을 매개로 개인 간 직거래가 이뤄지기 시작한 것이다. 은행과 카드 회사를 통하지 않으니 수수료도 없고 실명도 노출되지 않았다. 게다가 누구나 컴퓨터에 오픈소스인 비트코인 클라이언트 프로그램만 설치하면 작업증명에 참여해 비트코인을 채굴할 수 있다고 하니 많은 사람이 뛰어들었다. 현대판 골드러시가 시작된 것이다.

    비트코인이 확산되자 2012년 말 최초의 비트코인 거래소가 생기고, 달러 등 실물화폐로 교환되기 시작했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은 익명으로 처리된다. 참여자는 늘어나는데 비트코인 공급이 부족해지니 자연스레 가격이 폭등했다. 비트코인 총 개수를 2100만개로 제한하고, 참여자가 늘어날수록 채굴이 힘들도록 해둔 알고리즘 때문이다. 채굴자가 너무 몰려 금맥이 고갈되고, 금 가격이 폭등하자 새로운 금광맥을 찾는 것처럼 많은 유사 가상화폐가 생겨나 사람이 몰려들었다.

    여기에 각국 정부의 갈팡질팡 정책과 규제, 거래소 해킹, 뉴스 미디어의 열띤 보도, 가상화폐에 의한 일확천금 소문까지 겹치니 가격이 심하게 요동쳤다. 가격 변동이 커지니 투기 및 투자 기회도 커져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게 되었다. 참으로 절묘하다. 과연 새로운 거래와 부의 질서에 대한 꿈이 가까워진 듯하다.

    가상화폐 설계와 확산이 너무 절묘해서 외계인이 인류에게 정부와 금융 권력의 통제에서 벗어난 공평하고 자유로운 새로운 거래질서를 만들어주기 위해 가상화폐를 만들어 퍼뜨렸다는 설이 나올 법하다. 사토시 나카모토는 천재인가, 희대의 사기꾼인가? 그는 이미 개발된 암호 기반 익명 거래 기술을 적절하게 잘 조합해 사이퍼펑크의 꿈을 실천했을 뿐이다.

    많은 사람이 사이퍼펑크 철학과 문화를 동경하고 추종하는 것은 아닐까? 가상화폐는 개인 간 자유로운 거래가 이뤄지던 물물교환 시대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우리의 원초적인 꿈을 실현한 것인지도 모른다.
    또는 상위 20% 소수가 전체 부의 80%를 차지한다는 '파레토 법칙'대로 이미 구조화·고착화돼버린 부의 불평등·불균형을 지탱하는 기존 화폐와 경제 체제에서 탈피하기 위해 새로운 경기장과 경기규칙을 만든 것이 아닐까? 게임머니, 게임아이템 거래, 각종 사이버 인센티브 등에 익숙한 젊은층에게는 가상화폐가 낯설지 않고, 새로운 기회의 땅으로 보일 수도 있다.

    게다가 금을 찾으러 떠난 유럽인들의 대항해, 미국 서부 개척 시대의 골드러시처럼 부의 기존 질서에서 탈출구를 찾는 본능을 가상화폐가 절묘하게 자극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가상화폐는 정말 우리가 꿈꾸던 거래의 자유를 통한 부의 분배를 실현할 것인가? 코넬대학의 에민 귄 시어러 교수 등이 참여한 가상화폐 연구그룹이 2년간 조사한 결과를 담은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4대 비트코인 채굴자가 네트워크 전체 채굴 능력의 53%를 차지한다. 이더리움은 3대 비트코인 채굴자가 61%를 과점 중이다. 리플의 경우, 기업이 코인 배분을 통제하고 50% 이상을 갖고 있다. 비트코인 노드의 56%, 이더리움 노드의 28%가 채굴용 컴퓨터를 데이터센터에 두고 있다고 한다.

    이는 애초 이상과는 달리 가상화폐가 상당히 편중되고 기업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암호 권력이 소수 권력에 중앙집중화되는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암호 인증 권한을 익명의 개인에게 분산해 민주화를 이루겠다는 사이퍼펑크의 염원과는 거리가 먼 결과다. 경쟁이 있는 곳에는 불평등과 편중이 따르는 파레토의 저주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가상화폐를 채굴하기 위해서는 작업증명을 위한 암호 작업에 막대한 컴퓨팅 자원이 요구된다. 미국전기공학회 잡지 스펙트럼의 2017년 기사는 이로 인한 전력 문제와 전력 절감 노력을 자세히 설명한다. 웹 사이트 blockchain.info에 의하면 2017년 말 비트코인 네트워크에서 작업증명을 위해 초당 2000경건쯤에 달하는 256비트 암호해시가 처리됐다. 이를 위해서는 120만 가구가 사용할 만한 2기가와트(GW)의 전력이 필요하다.

    채굴 난이도는 지수적으로 어려워지고 있어 전력 소모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다. 채굴자도 단순 CPU 대신 병렬 처리를 위한 그래픽카드를 사용하다 최근에는 채굴 전용 주문형 반도체를 사용한다. 최신 주문형 반도체는 2009년 CPU보다 100만분의 1 수준 전력으로 1억 배나 고속으로 채굴할 수 있다. 그러나 채굴자와 채굴 난이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반해 주문형 반도체의 처리속도 증가는 그렇게 빠르지 못하다.

    이더리움의 경우, 경쟁적 채굴로 막대한 전력 소모를 초래하는 작업증명 방법 대신 코인 보유 비율에 따라 선택된 소수에게만 채굴 권한을 주는 지분증명 방식으로 전환하는 중이다. 인텔은 무작위로 선정된 채굴자에게만 정해진 시간 동안 채굴 권한을 부여하는 방식을 개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외에도 다양한 전력절감을 위한 블록체인 기술이 개발되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력요금을 절감하면서 채굴 능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막대한 전용 채굴 장비를 구매해야 하므로 결국 막대한 자본을 가지거나 이미 많은 가상화폐를 보유한 채굴자가 더 많은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결국 파레토의 저주를 피하지 못하는 것이다.

    가상화폐 채굴에서 공평한 기회를 찾지 못한 누군가는 거래에서 기회를 찾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결국 더 많이 가진 자가 유리한 게임이다. 가상화폐 거래가 투기가 될지 투자가 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평등한 채굴, 거래의 자유, 안정된 거래의 꿈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정부 및 사회경제 체제가 진화해 가상화폐가 만들어내는 소용돌이에 적응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시행착오가 필요할 것이다.

    거래를 실명화하거나 금지하고, 블록체인을 분리 육성하겠다는 것이 가상화폐와 블록체인 발전 과정을 볼 때 과연 실효성이 있을지, 지금처럼 많은 사람의 참여를 이끌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정부와 많은 기업이 검증된 제한된 사용자로만 구성된 비공개 블록체인으로 의료정보 등 정보 공유, 부동산 등기 및 거래 등 계약 정보 공유, 물류 정보 공유 등 다양한 응용을 시도 중이다. 그러나 가상화폐의 강력하고 효과적인 채굴 보상체계 없이 많은 참여자로부터 블록 갱신과 유지를 위한 동기와 책임을 이끌어내고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을 수 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새로운 질서는 오랜 시간의 도전과 저항을 통해 만들어진다. 파레토의 저주를 피해 사이퍼펑크의 꿈을 이루는 데는 좀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 외부필자의 원고는 IT조선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태억 교수는 KAIST 산업 및 시스템 공학과 교수, 교육원장이며 대한산업공학회 회장입니다. 대통령 직속 규제개혁위원회 위원, 교육부 대학구조개혁위원회 위원, 신성장동력기획단 위원, KAIST 정보시스템연구소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자동화, 정보기술 응용, 산업지능 분야 전문가이며, 일방전달방식강의에서 탈피하는 수업방식 혁신을 통한 교육혁신, 교육의 기회 균등 실현을 위한 온라인대중공개강좌(MOOC) 확산에 노력하고 있습니다. 서울대, KAIST, 오하이오 주립 대학에서 학·석·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과학기술정보통신부(옛 미래창조과학부) 및 한국연구재단의 '이달의 과학기술자상'을 수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