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는 자동차를 나타내는 지표로 작용합니다. 아무리 감성적인 면을 내놔봐야 결국에는 숫자를 통해 객관적인 평가를 받기 마련입니다. 다시 말해 디자인을 표현하는 말은 대단히 주관적인 인식에 기초하지만 ‘㎜’로 표시하는 자동차 크기는 누구나 똑같이 인식하는 성질의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숫자는 객관적인 지표지만, 때로는 함정으로 작용한다. / 유튜브 갈무리
숫자는 객관적인 지표지만, 때로는 함정으로 작용한다. / 유튜브 갈무리
그런데 때로는 이 숫자가 ‘함정’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객관적인 수치에 집착한 나머지 본질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죠. 대표적인 것이 바로 ‘배기량’입니다. 과거 배기량은 자동차의 크기와 성능을 설명하는 주요한 숫자로 여겨졌지만, 최근에는 결코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엔진의 배기량을 줄여 연료효율을 높이는 ‘다운사이징’ 기술이 도입됐기 때문입니다.

다운사이징 엔진은 배기량은 줄였으나, 성능을 유지하는 다양한 기술이 동원됩니다. ‘터보차저’가 대표적입니다. 때문에 작은 배기량을 갖고도 상위급 엔진에 맞먹는 성능을 내고, 배기량이 작은 만큼 연료소모를 줄여 연비를 높입니다.

최근 출시한 혼다 10세대 신형 어코드는 기존의 2.5리터 가솔린 엔진을 1.5리터 터보엔진으로 변경했습니다. 그런데 중형 세단인 어코드가 1.5리터 엔진을 장착했다는 점에서 ‘엔진이 너무 작은 것 아니냐’는 비판이 일었습니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엔진 배기량만 달라졌을 뿐, 성능이 줄어든 것은 아닙니다.

실제 2.5리터 가솔린 엔진을 장착한 9세대 어코드의 최고출력은 188마력입니다. 1.5리터 터보엔진이 장착된 10세대 어코드의 최고출력은 194마력입니다. 배기량은 10세대가 작지만 출력은 되려 6마력이 높습니다. 그런데도 1.5리터 엔진이 중형세단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제대로 함정에 빠진 형국입니다.

연비도 때로 숫자의 함정에 빠집니다. 자동차를 출시하기에 앞서 자동차 회사는 정부에 ‘연비’를 신고해야 합니다. 이게 바로 이른바 ‘공인연비’로 알려진 수치입니다. 공인연비는 절대적인 값이 아닙니다. ‘한 자동차가 이정도의 연비를 낼 수 있다’는 기준점으로 작용할 뿐입니다. 그래서 정부는 몇년 전 ‘공인연비’가 아닌, ‘표시연비’로 용어를 바꾸기도 했습니다. ‘공인’이라는 말이 절대적인 기준으로 적용할 우려가 커서입니다. 또 정부가 인증했다는 의미로 해석되는 탓에 연비 논란이 나올 경우 책임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자동차의 연비는 표시된 연비에 비해 운전자의 습관에 좌우되는 경향이 강합니다. 연비 측정은 상당히 제한된 조건에서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운전자가 조건과 유사한 습관을 가지고 있다면 표시연비에 가까운 연비가 기록되겠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므로 차이가 생깁니다.

자동차 회사들이 ‘실연비’를 강조하는 것이 이 때문입니다. 엄격한 배출가스 및 연비 기준으로 자동차의 표시연비는 계속해서 낮아지고 있다보니, 실제 자동차가 기록하는 연비는 반대로 높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최근 운전자들이 연비운전을 하다보니 실연비는 더욱 높아집니다.

통계도 잘 살펴봐야 할 숫자의 함정 중 하나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판매 통계는 어떤 단체가 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데, 먼저 각 국산차 회사가 매월 1일에 내는 판매실적은 ‘판매량’에 근거합니다. 즉, 자동차 회사가 ‘몇 대 팔았나’를 기준하고 있어 허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토부가 집계하는 신차판매량은 ‘등록’에 기초합니다. 다시 말해 6월달에 자동차 회사는 120대를 팔았다고 발표해도, 100대만 신규등록됐다면 국토부 통계는 100대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 통계의 함정은 잘 살펴봐야 합니다. 여러 통계를 동시에 분석할 때 편차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한국수입자동차협회의 경우 단일 차종의 등록통계를 제품군이 아닌, 엔진 및 구동방식에 따라 집계합니다. 예를 들어 벤츠 E클래스를 E 200, E 220, E 350, E 350 4매틱 등으로 세분화해 통계를 냅니다. 반면 국산차 회사는 쏘나타를 동력계 구분 없이 하나로 표시합니다. 따라서 수입차협회 기준으로 베스트셀링 모델을 뽑으면, 10위 내에 같은 차가 여러 대 포함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차로 인식하는데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