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블록체인 현장] ①네덜란드의 3각 동맹 '더치 디지털 델타'

입력 2018.06.27 14:32 | 수정 2018.07.01 06:06

유럽 대륙이 블록체인 바람으로 꿈틀대고 있다. 블록체인을 정치·경제·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고 각 분야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동력으로 활용하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유럽 각국의 행보는 가상화폐 가격 등락에 울고웃는 한·중·일 지역의 한탕주의 흐름이나 묻지마 투자 분위기와는 확연히 다르다. 새 기술 패러다임으로 ‘골디락스(Goldilocks·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이상적인 경제 상황)’ 시대를 준비하는 유럽의 블록체인 혁신 현장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이쪽으로 오세요. 상황판을 보면서 설명할게요. 네덜란드블록체인연합(The Dutch Blockahin Coalition·DBC)의 워킹 그룹이 실제 진행하는 프로젝트들입니다. 안드레씨는 ‘디지털 ID’ 프로젝트 리더이고요, 저는 블록체인을 활용한 ‘필드랩(현장 연구)’을 이끌고 있습니다.”

네덜란드 제3의 도시 헤이그에서 차로 20분 달리면, 세계 대학 랭킹에서 50위권을 자랑하는 델프트공과대학이 나온다. 이 대학 캠퍼스 빌딩에는 지난해 3월 출범한 블록체인 민관 협력단체 DBC의 사무실이 자리 잡고 있다.

프란스 판에터 네덜란드블록체인연합 사무국장(coalitiemanager)/류현정 기자
지난 6월 25일(현지시간) DBC 사무실에서 만난 프란스 판에터 DBC 사무국장(coalitiemanager)은 분홍, 파랑, 노랑 포스트잇으로 가득 메워진 벽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이 벽은 DBC 산하 실무반(워킹그룹) 이름, 각 그룹 리더와 회원, 단기 목표와 성과 등을 포스팃에 쓰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일종의 DBC 업무 상황판이었다.

판에터 사무국장은 “‘OKR(Objective, Key Result)’라는 성과 관리 기법을 활용해 3개월마다 진행상황을 점검하고 있다”면서 “‘스마트계약’ ‘대학 교수 재교육’ 등 DBC 산하에는 20개의 워킹 그룹이 있다"고 말했다.

◇ 민·관·학 3각 동맹의 블록체인 실험 '더치 디지털 델타'

네덜란드는 지난해 3월 27일 정부, 기업, 대학이 참여해 기반 기술을 개발하고 법 등 새로운 제도를 제안하는 블록체인 동맹인 DBC를 출범시켰다. 네덜란드 최대 은행인 ABN암로와 네덜란드은행을 비롯해 ING(보험), CMS(법무), PWC(컨설팅), 델프트 공대, 중앙 정부(경제부, 내무무, 법무부), 왕립공증인협회 등 35개 기업, 정부 조직, 연구소, 협회 등이 참여한다. 기업 회원들은 연간 회비로 3만5000 유로를 내야 한다. 정부는 연간 예산(약 100만 유로)의 25%를 제공한다. 네덜란드의 민·관·학 블록체인 3각 동맹을 ‘더치 디지털 델타(Dutch Digital Delta)’라고 부른다.

르네 패니 드브리스(RENÉ PENNING DE VRIES)는 DBC에서 정보통신 분야 명예 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필립스와 NXP의 반도체 분야 고위 임원 출신이다. 드브리스는 “모든 당사자가 협력을 통해 블록체인 기반 디지털 신뢰시스템을 구현해 보려는 시도는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판에터 사무국장은 “이런 협력이 이뤄진 것은 네덜란드 국가 총생산(GDP)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무역, 물류, 금융, 식료품 분야가 불록체인과 결합하면 발전가능성이 크다는 데 당사자들의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네덜란드 스히폴 공항 내부. 스히폴 공항은 유럽 물류 허브로 꼽힌다. /류현정 기자
네덜란드는 인구 1700만명, 국토 면적 4만 1528㎢ (남한의 절반)에 불과하지만, 세계 6위에 자랑하는 무역 대국이다. 지난해 GDP 성장률이 10년간 최대치인 연 3%에 달하는 등 요즘 경제도 호황이다. 하지만, ‘작은 정부'의 전통이 강한 네덜란드에서는 정부가 특정 분야에 대규모 예산을 투입해 프로젝트를 주도하는 것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 두바이나 싱가포르처럼 정부가 주도해 ‘톱다운 방식’으로 블록체인 프로젝트를 수행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DBP의 3대 실행 계획(action line)도 여러 이해당사자의 끊임없는 토론을 통해 만들었다. 3대 실행 계획은 ▲블록체인 기반 디지털 아이덴터티(ID) 개발 ▲제도 정비 ▲인재 양성이다. 20개 워킹그룹의 활동도 최상위 목표인 3대 실행 계획을 수행하기 위한 하부 과제로 짜여 있다.

판에터 사무국장은 “DBC의 놀라운 점은 예산이 아니라 운영에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DBC에 참여하는 35개 기업과 기관, 연구소들이 DBC에 인력을 파견하도록 협약을 맺었다"면서 “파견 인력은 총 노동 시간의 50%를 DBC의 워킹 그룹 업무에 쓰며 실질적인 성과를 만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 “파일럿 프로젝트가 ‘변화의 순간'을 가져왔다”

네덜란드 정부는 35개의 블록체인 파일럿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6월 26일 만난 마로스 폼프(Maroles Pomp)는 이 프로젝트의 기획 업무를 맡고 있다. 그는 “작은 규모로 시작해 시제품을 만들고 현장 테스트를 해보며 적용 범위를 넓히는 것이 네덜란드 정부가 일하는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네덜란드 정부는 2016년부터 블록체인에 관심을 갖고 공공 서비스에서 활용할 만한 서비스를 기획했다. 이후 파일럿 프로제트를 공동으로 진행할 스타트업을 찾았다. 현재 네덜란드 정부의 블록체인 파일럿 프로젝트에는 60여개의 스타트업이 참가한다. 대표적인 프로젝트로는 ‘정부 보조금 서비스’ ‘ 산후 관리 서비스’ ‘학위 증명 서비스’ ‘ 공항 입국 관리 서비스’ ‘ 음식물 및 유통 관리 서비스’ ‘독성 폐기물 관리 서비스' 등이 있다.

네덜란드 정부는 스타트업과 블록체인 파일럿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의 기획업무를 맡은 마로스 폼프(Maroles Pomp) 씨. /류현정 기자
네덜란드 전 국민은 건강보험에 의무적으로 가입해 있으며 출산 후 산후조리를 받게 돼 있다. 폼프는 “출산 관련 서류를 제출하고 보험사가 이를 확인해 산후 조리사에게 돈이 지급하는 데 한달 이상 걸린다"면서 “블록체인 기반 산후 관리 서비스를 이용하면, 즉시 보험 처리가 가능하다는 것을 파일럿 프로젝트를 통해 확인했다"고 말했다. 산모와 산후 조리사가 애플리케이션에 산후 관리 정보만 입력하면, 블록체인에 기록되고 보험사가 이를 확인해 바로 돈을 지급한다는 것이다. 이 시범 서비스는 네덜란드 보험사 1곳과 협업해 제공 중이다.

그는 “네덜란드 정책 당국자들도 처음에는 블록체인을 이해하기 어려워했고 각종 정책을 만드는 데도 소극적이었다"면서 “하지만, 파일럿 프로젝트를 통한 실증 사례가 쌓이자, 당국자에게도 ‘변화의 순간(change moment)’이 찾아왔다"고 말했다.

이제 네덜란드는 유럽 여러 국가 중에서도 블록체인 기반 서비스와 산업을 육성하는 데 가장 적극적인 나라 중 하나로 꼽힌다. 지난해에는 콘스탄테인 네덜란드 왕자(Prince Constantijn of the Netherlands)가 국영 방송에 출연해 네덜란드가 블록체인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 적도 있다. 입헌군주국인 네덜란드에서 왕자의 발언은 블록체인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일으키는 계기가 됐다. 콘스탄테인 왕자는 스타트업 육성 기관인 ‘스타트업 델타'의 홍보대사직도 맡고 있다.

폼프는 “인도 등 개발도상국과 협업도 늘리려고 하고 있다”면서 “인도는 인구가 많기 때문에 작게 테스트를 해도 네덜란드에서 전국 단위로 테스트해 보는 것과 유사한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유럽 GDPR이 블록체인 업계에서도 이슈"

헤이그는 네덜란드 국회와 정부 부처, 국제 재판소와 세계 각국 대사관이 몰린 행정 중심 도시다. 이곳 정부 청사에서 만난 프란스 라이커스(Frans Rijkers) 네덜란드 내무부 국가신원정보국 전략자문은 “최근 유럽연합(EU)이 발효한 새 개인정보보호법(GDPR)에도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프란스 라이커스(Frans Rijkers) 네덜란드 내무부 국가신원정보국 전략자문. 그는 블록체인과 스마트폰으로 신원을 인증할 수 있는 ‘디지털 아이덴터티' 시범 서비스를 선보였다. /류현정 기자
그는 국가신원정보국에서 추진하는 블록체인 파일럿 프로젝트에 광범위하게 참여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디지털 아이덴터티' 프로젝트는 신원 증명의 당사자를 국가에서 개인으로 바꾸는 획기적인 시도로 주목받고 있다. 공공 기관에서 한번만 신원 증명을 받으면, 해당 정보가 해시값(암호화한 정보) 형태로 블록체인에 올라가 언제어디서나 신분을 증명할 수 있게 된다. 네덜란드 국가신원정보국은 캐나다 정부와 협력해 디지털 아이덴터티를 암스테르담 공항과 토론토 공항에서 실증해보는 사업을 내년에 진행할 예정이다.

라이커스 자문은 “우리가 추진하는 디지털 아이덴터티는 개인 정보를 암호화한 해시값만 블록체인에 올려 인증이 필요한 은행이나 공항에서 확인해보는 구조”라면서 “이것이 GDPR 규정에 부합하는 지 EU 측 문의해 뒀다"고 말했다. 그는 “디지털 아이덴터티를 유럽 전역에 확산하는 목표도 갖고 있기 때문에 GDPR 규정 부합은 더욱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GDPR은 유럽 지역 거주자의 개인정보 수집, 활용, 삭제에 대한 엄격한 기준을 담은 규정으로 이를 위반한 기업은 연 매출의 4% 또는 2000만 유로 중 큰 금액을 과징금으로 내야 한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정부 청사. /류현정 기자
스타트업과의 협업을 통해 공공 분야 블록체인 파일럿 프로젝트를 이끄는 폼프도 비슷한 취지의 말을 했다. 그는 “한번 기록하면 삭제할 수 없는 블록체인의 비가역성이 EU의 ‘잊힐 권리’에 배치될 수 있다는 의견이 현장 검증 과정에서 나왔다"면서 “조만간 35개 파일럿 프로젝트 중 전국 단위로 확산할 프로젝트 3개를 선발할 예정인데, EU 규정에 맞지 않는 프로젝트, 부동산처럼 이미 규제가 너무 많아 블록체인에서는 구현하기 어려운 프로젝트는 우선 선발 대상에서 제외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2018 KPF 디플로마-블록체인 과정에 참여 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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