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수출의 큰 축을 맡고 있는 전자 업계가 중국의 제조 굴기(倔起), 미·중 무역전쟁 등의 영향으로 위기를 맞았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2017년부터 이어진 반도체 특수는 아직 수출의 버팀목 역할을 하지만, 이마저도 착시효과에 불과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디스플레이 업계는 중국의 저가 공세에 시달리며 일년 전과는 정반대의 우울한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한국이 4차 산업혁명을 대표하는 인공지능(AI), 5G와 같은 분야에서 이렇다 할 리더십을 보이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다. IT조선은 불확실성이 큰 대내외 환경에서 한국 전자 산업이 당면한 현실을 냉정하게 살펴봤다. <편집자주>

중국은 그동안 양적 성장에 치우쳤던 제조 산업을 질적 성장으로 끌어올리겠다고 밝혔는데, ‘제조 굴기’ 중 핵심은 단연 ‘반도체'다. 중국은 2025년까지 200조원을 쏟아부어 현재 13.5% 수준인 반도체 자급률을 70%까지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천명했다. 이른바 ‘중국 제조 2025’ 계획이다.


삼성전자의 2세대 10나노급 D램. / 삼성전자 제공
삼성전자의 2세대 10나노급 D램. / 삼성전자 제공
반도체는 용도에 따라 연산 및 논리 작업 등을 위한 시스템 반도체와 정보 저장 및 처리를 위한 메모리 반도체로 크게 구분한다.

중국은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 어느 정도 자급률을 끌어올린 상태다. 반도체 설계를 담당하는 팹리스 시장도 비교적 활성화돼 있고, 팹리스로부터 설계를 넘겨받아 실제로 반도체를 위탁 생산하는 파운드리 업체도 다수 있다. 반면,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는 아직 걸음마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중국은 메모리 반도체 수급을 전량 수입에 의존한다. 주력 수입 대상은 전 세계 메모리 반도체 1위를 달리는 한국이다.

한국은 대표적인 메모리 반도체인 D램과 낸드플래시 모두 석권했다.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2018년 1분기 D램 시장에서 한국 기업이 차지하는 시장 점유율은 72.8%(삼성전자 44.9%, SK하이닉스 27.9%)에 달한다. 낸드플래시는 비록 D램만큼 압도적이지 않지만, 46.8%(삼성전자 37%, SK하이닉스 9.8%)의 점유율로 미국과 일본을 크게 앞선다.

반도체는 10년 이상 멀리 내다보고 투자를 단행해야 할 정도로 장기적인 안목과 꾸준한 개발 여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그만큼 신규 시장 진입이 어렵고, 후발주자가 시장 주요 플레이어를 따라잡기도 쉽지 않다. 한국은 2017년 메모리 반도체 가격 폭등으로 메모리 슈퍼사이클(장기호황)을 만났는데, 이같은 달콤한 열매를 오롯이 수확할 수 있었던 것도 오랜 격변의 시기를 꿋꿋이 버텨온 투자 덕분이다.

하지만, 제조 굴기를 선언한 중국이 메모리 반도체를 직접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매 분기 실적 잔치를 벌인 국내 반도체 업계에 위기감이 찾아올 수 있다는 관측에 힘이 실린다.

중국의 메모리 반도체 제조 공정은 한국에 크게 뒤쳐진 것은 맞다. 중국이 연내 생산할 것으로 알려진 낸드플래시는 삼성전자가 이미 4년 전 양산한 2세대 32단 3D 낸드인 것으로 나타났다. 삼성전자는 최근 적층 단수를 96단까지 끌어올린 5세대 3D 낸드 양산을 시작했다. D램은 이보다 기술 격차가 더 크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단기간에 중국이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흔들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하지만, 기술력만 앞선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당장 한국 반도체 업계의 수요처는 중국에 집중돼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5월 반도체 수출 매출 109억달러(12조3330억원) 중 69%에 달하는 75억달러(8조4860억원)가 중국에서 발생했다. 중국이 비록 품질은 떨어지는 제품이라도 자국 메모리 반도체 사용 비중을 늘리면 한국은 수출에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일각에서는 한국의 반도체 산업 불균형을 지적한다. 메모리 반도체 시장만 놓고 보면 ‘반도체 코리아'라는 수식어가 잘 들어맞지만, 시스템 반도체까지 들여다보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전 세계 시스템 반도체 시장에서 한국 기업이 차지하는 점유율은 2017년 기준 3%에 불과하다. 대만(6.9%)은 물론 중국(4.1%)에도 밀린다.

메모리 반도체 기술 초격차를 유지하는 한편, 시스템 반도체 산업 경쟁력을 키우는 정부 정책과 산·학·연 공동 대응 전략이 절실하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