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수출의 큰 축을 맡고 있는 전자 업계가 중국의 제조 굴기(倔起), 미·중 무역전쟁 등의 영향으로 위기를 맞았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2017년부터 이어진 반도체 특수는 아직 수출의 버팀목 역할을 하지만, 이마저도 착시효과에 불과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디스플레이 업계는 중국의 저가 공세에 시달리며 일년 전과는 정반대의 우울한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한국이 4차 산업혁명을 대표하는 인공지능(AI), 5G와 같은 분야에서 이렇다 할 리더십을 보이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다. IT조선은 불확실성이 큰 대내외 환경에서 한국 전자 산업이 당면한 현실을 냉정하게 살펴봤다. <편집자주>

중국 제조 굴기의 첫 희생양은 디스플레이 업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이 2005년 일본을 제치고 세계 액정표시장치(LCD) 시장에서 1위를 차지한 지 13년 만에 벌어진 일이다.

LG디스플레이 파주 단지 전경. / LG디스플레이 제공
LG디스플레이 파주 단지 전경. / LG디스플레이 제공
조짐은 2017년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중국 디스플레이 굴기의 중심에는 단연 중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고, 그 지원에 힘입어 물량 공세로 한국을 무너뜨린 징둥팡(BOE)이 있다.

23일 디스플레이 업계에 따르면, LCD 패널은 팔면 팔수록 손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시장 가격이 바닥을 쳤다. 버티는 쪽은 오로지 정부 지원금으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고 있는 중국 업체뿐이다. 이로 인해 지난해 호실적을 기록한 삼성디스플레이와 LG디스플레이는 올해 들어 보릿고개를 넘는 형국이다.

BOE는 올해 1분기에만 1250만대의 TV용 LCD 패널을 출하하며 LG디스플레이를 제치고 이 시장 1위로 올라섰다. 출하 면적 기준으로는 여전히 LG디스플레이가 선두지만, BOE가 10.5세대(2940㎜×3370㎜) 초대형 LCD 패널 생산라인을 가동하기 시작하면서 이마저도 따라잡힐 가능성이 커졌다.

중국 패널 업체가 이처럼 출혈경쟁을 유발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 지원금으로 손해를 메우면 되기 때문이다. 당장 큰 수익을 내지는 못해도 규모의 경제를 완성할 동안 시간을 끌면서 경쟁사 점유율을 뺏어온다는 전략이다.

삼성디스플레이와 LG디스플레이는 일찍이 LCD 출구전략의 하나로 유기발광다이오드(OLED)로의 체질 개선에 주력했으나, 예상보다 빨리 찾아온 중국의 공세에 비상이 걸렸다. 특히 전체 매출에서 LCD 비중이 컸던 LG디스플레이는 1분기 983억원의 적자를 기록한 데 이어 2분기에는 적자 폭이 더 늘어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삼성디스플레이의 경우 일찍이 스마트폰용 중소형 OLED 패널 시장은 선점하면서 상대적으로 충격이 덜하지만, 전반적으로 사정이 녹록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여기에 중국은 LG디스플레이의 광저우 OLED 공장 승인까지 차일피일 미루며 자국 디스플레이 업체가 주도권을 쥘 시간을 벌어줬다. LG디스플레이 광저우 공장은 최근에야 중국 승인을 받아 내년 말 가동을 목표로 착공에 들어갈 수 있게 됐다. 중국이 OLED 기술까지 공공연히 넘보고 있는 상황인 만큼 중국 현지 공장 설립에 대한 우려도 크지만, 세계 최대 시장을 내버려둘 수도 없는 난처한 상황인 셈이다.

디스플레이 업계 한 관계자는 “중국 디스플레이 업체는 한국과 비교해 품질이 상대적으로 떨어져도 제품을 계속 공급할 수 있는 내수 시장을 믿고 물량 공세를 펼치지만, 장기적으로는 스스로 LCD를 사양산업으로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향후 수익성 측면에서 자충수가 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