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전자, 디스플레이, 조선, 철강, 중공업, 유화학 등 우리나라 주력산업의 대부분이 어렵다. 중국의 맹렬한 추격도 문제지만 경영여건이 어려워졌다.

1980년대 중반 한 국가에서 주력산업의 수명은 25~30년이라는 통설이 있었다. 해당 산업의 노동력 의존성이 높아 경제발전에 따른 인건비가 올라가면 결국 경쟁력을 잃고 후발국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이에 일본은 1980년대 중반에 한국 등 추격으로 쇠퇴하는 중후장대 산업보다 경박단소형 산업으로 변화를 꾀했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TV, 워크맨과 같은 휴대용 전자기기 등 첨단 전자산업으로 산업구조를 혁신한 것이다.

산업 수명주기설은 우리에게는 자동차, 조선, 철강, 중공업 등의 산업이 유럽에서 미국을 거쳐 일본으로 갔다가 결국 한국으로 온다는 희망의 메시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당시 정부에서 전략적으로 육성하던 조선, 철강, 자동차, 중공업 등 중후장대 산업은 우리나라에서도 2010~2020년을 전후해 쇠퇴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시사한다.

요즘 우리 주력산업 상황을 보면 섬뜩하게도 이같은 저주가 맞아떨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기술혁신, 신제품 개발, 자동화 및 정보화, 현명한 산업육성 전략으로 ‘산업 수명주기의 저주’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하지만, 냉엄한 국제 경쟁과 산업 현실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낙관적 또는 안이하게 대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공정한 게임의 룰을 요구하기 힘든, 시장 규모가 큰 중국이 우리가 성공해왔던 같은 길로 우리를 맹렬히 추격해오고 있기에 걱정이 크다.

요즘 우리 경제를 버티는 힘은 반도체 산업이다. 총 수출의 20% 이상이 반도체이며, 30대 기업 영업이익의 58%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차지한다. 반도체 의존도가 심각한 수준이다.

그러면 우리 반도체 산업은 수명주기의 저주에서 자유로울까? 2017년 우리 반도체의 67%가 중국에 수출됐다. 이런 중국이 LCD를 거의 잠식한 후 10년 간 160조원을 투자해 반도체도 2025년까지 70%를 자급하겠다고 한다. 아직 중국은 5년 이상 격차가 있어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막대한 자금력과 소비시장을 갖고 있고, 전 세계 기술 인력을 흡입하고 있어 산업 수명주기설이 빈말 만은 아닐 것 같다.

삼성전자는 연간 30조원 이상을 투자하고 있다. 요즘 10나노대의 반도체 팹을 짓는데 15조 원쯤 소요되고 거의 2년마다 이런 팹 건설에 투자하고 있다. 이렇게 힘겹게 열심히 페달을 밟아야 쓰러지지 않고 버텨나가는 것이 반도체 산업이다. 그런데도 일각에서는 돈을 많이 버니 수십조원을 풀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치열한 산업 현실을 조금이나마 이해했으면 하는 안타까움이 앞선다.

1980년대 고 이병철 삼성 회장은 반도체가 미래 산업의 쌀이 될 것이라 선언하며 당시로서는 무모한 도전을 했다. 이때만 해도 삼성전자가 오늘날 세계를 주름잡게 될 줄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우리나라가 반도체 산업경쟁에서 앞서게 된 것은 반도체 산업 불황기에 리스크를 무릅쓰고 전략적으로 대규모 투자를 지속한 덕분이다. 1986년 삼성전자가 반도체라인에 막대한 투자를 지속했음에도 낮은 수율과 신인도 때문에 삼성그룹 전체가 자금난으로 위태하다는 소문도 돌았다.

어쩌면 당시 무모하게 보였던 투자는 오늘날 비난받는 오너 중심의 후진적 지배구조여서 가능했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최고의 두뇌가 집결해 불철주야 고심한 결실을 이제야 거두고 있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할 것이다.

반도체는 가장 기술혁신이 빠르고 경쟁이 치열한 산업이다. 먼저 회로선폭을 미세화 해 소비전력을 줄이면서 처리속도와 집적도를 높이고 제품경쟁력과 생산성 및 원가경쟁력을 함께 높인 혁신경쟁이 대표적이다. 1947년 전류흐름을 개폐할 수 있는 트랜지스터 소자가 처음 발명된 후 트랜지스터의 집적화가 꾸준히 개선돼 1970년대 1만2000㎚(나노미터), 1980년대 3500㎚, 1990년대 900㎚를 거쳐 이제 7㎚, 6㎚를 선점하려는 경쟁이 치열하다.

회로패턴을 새긴 마스크를 통해 빛을 투과시켜 감광액을 바른 웨이퍼에 감광시키는 노광공정은 회로선폭이 너무 미세화되면서 파장이 극도로 짧은 극자외선(EUV)를 사용한다. 2000년대 초반부터 연구된 대당 수천억원대 EUV 노광장비는 아직 팹에서 양산성이 완전히 검증되지 않았음에도 팹당 수십대씩 설치되고 있다.

웨이퍼 크기는 100㎜에서 200㎜를 거쳐 2000년대에 300㎜로 대구형화됐고, 450㎜도 검토되고 있다. 한 단계 증가할 때마다 웨이퍼당 칩 개수를 2.25배씩 늘려 양산 경제성을 높일 수 있다. 수백대의 공정장비를 지나면서 500단계쯤 초정밀 화학공정을 거치는 과정만큼 효율성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웨이퍼 구경이 증가하면 공정기술, 공정장비구조, 반송시스템 등이 완전히 달라진다.

또 웨이퍼에서 칩을 잘라내 연결선을 부착하고 플라스틱으로 패키징할 때에도 동일 또는 이종의 여러개 칩을 함께 수직으로 쌓아 함께 패키징하는 멀티칩 모듈로 만들어 집적도를 높인다.

반도체의 회로선폭 경쟁은 거의 극한단계에 도달했다. 선폭을 더 줄이면 각 트랜지스터 내 소스에서 드레인으로 전자가 흘러갈 통로가 너무 좁아져 전류흐름 개폐 기능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거나 전하를 일시 저장하는 커패시터의 전류누설과 간섭이 커진다.

단계마다 10~20%씩 선폭을 줄이는 경쟁이 한계에 부닥친 것이다. 즉 혁신 속도가 늦어지고 품질 리스크와 제조원가는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 추격자는 따라오는데 더 도망갈 곳이 없는 절박한 상황이다. 영화 ‘델마와 루이스’에서 경찰의 추격을 받다가 그랜드캐년의 낭떠러지로 전속으로 질주해 날아오르는 장면이 기억난다. 날아오를 날개가 필요한 상황이다.

선폭 미세화 장벽을 돌파하기 위해 온갖 창의적인 방법이 동원되고 있다. 회로 구조와 재료를 바꿔 버티는 방법이다. 소스에서 게이트를 거쳐 드레인으로 전자가 흘러가는 통로 높이를 높여 전류 흐름량을 늘리는 핀펫(FinFET) 기술, 실리콘관통전극(TSV) 등을 이용해 3차원으로 여러 칩을 적층하는 3D 반도체 기술, 신소재에 의한 P/M/R RAM 기술 등이 대표적이다. 땅값이 비싸고 좁은 곳에 건물이 고층화되고 새로운 건축소재를 사용하는 것과 비슷하다.

온갖 지혜를 짜내 3㎚까지는 겨우 갈 수 있을 것 같지만 그 이후는 완전히 신개념의 혁신적 소자기술이 나와야 할 것이다. 반도체 소재를 실리콘에서 인듐갈륨비소나 그래핀 등으로 바꾸는 모험도 해야할 판이다.

반도체 업계는 회로 아키텍처에서 선폭을 감소시키는 공정 혁신을 하고 12~18개월 후에는 같은 선폭에서 회로 아키텍처를 혁신하고, 12~18개월 후 또다시 선폭을 감소시키는 틱톡(Tick-Tock) 전략을 구사했다. CPU를 이런 방식으로 매번 혁신해 신제품을 만든 인텔마저도 선폭 미세화가 한계에 이르자 사실상 이 전략을 포기했다. 수율 및 품질 리스크가 증가하고 비용이 폭증하기 때문이다.

근래 퀄컴의 스냅드래곤 810의 발열사태가 그 예다. 이에 인텔 등은 동일 선폭을 유지한 채 설계 및 공정을 최대한 오랫동안 개선, 최적화하는 것으로 전략을 바꿨다.

극한적 선폭경쟁은 양산 공정뿐 아니라 설계 및 개발 과정의 복잡성과 위험성을 극도로 높인다. 매킨지는 2014년 75개사의 2000개 이상 반도체 개발프로젝트를 조사 분석해 2016년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이미 칩 복잡성 증가가 개발 생산성 상승을 초월해 50% 이상의 개발 프로젝트가 10주 이상 지연된다고 한다.

새로운 기술적 도전과 모험 과정에서 기술 리스크가 너무 커지면 기술 전략의 선택에 따라 기업의 명운과 반도체 산업 판도가 완전히 바뀔 수 있다. 과거 아날로그 브라운 TV기술에 집착하다 디지털화된 LCD TV로 변신이 늦어 TV 시장을 한국에 내준 소니, 필름 카메라에 집착하다 디지털카메라로 변신이 늦어 최근 완전히 사라진 코닥 등을 보면 식은 땀이 날 일이다.

사실 소니와 코닥은 LCD TV기술과 디지털카메라 기술을 선도적으로 개발해놓고 있었다. 파괴적 혁신기술이 나와도 과거 기술의 성공으로 굳건히 자리 잡은 경영진과 기술자의 고집과 저항의 장벽을 넘어서지 못한 것이다. 비슷한 일이 반도체에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법이 없다. 크레이튼 크리스텐슨의 ‘혁신기업의 딜레마’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반도체 팹은 이미 대부분 무인 자동화돼 작업현장의 인건비 의존이 높지 않다. 극한 선폭 경쟁과 팹 운영 효율성 증대를 위해 설계, 개발, 공정의 고급 개발인력과 엔지니어에 크게 의존한다. 이에 산업 및 경제 발전에 따른 인건비 상승에 기반한 산업 수명주기설은 적합하지 않다.

하지만 선폭 미세화의 물리적 한계라는 장벽을 얼마나 빨리 돌파하느냐가 수명을 연장하는 열쇠다. 최고의 인재가 결집한 반도체 산업에서 어려운 난관을 잘 헤쳐갈 것이라 믿고 싶다. 삼성전자는 이미 수년 전 박사급 인력이 6000명을 넘어섰다. 지금도 지속적으로 박사 졸업생을 요구하는 것을 보면 문제를 제대로 보고 있다는 안도감이 든다.

정작 대학에서 반도체가 인기 분야가 아니라는 점이 걸린다. 정부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지만 쓸데없는 간섭과 규제보다는 선폭 경쟁의 장벽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리스크를 완화하기 위한 연구개발 투자, 인력양성, 규제완화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

고 이병철 회장의 ‘산업의 쌀’이라는 말이 새삼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첨단 산업의 핵심 부품이라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먹고 살 ‘식량’이라는 점을 지적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요즘 세상에는 쌀이 없으면 빵이라도 먹으면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아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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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억 교수는 KAIST 산업 및 시스템 공학과 교수, 교육원장이며 대한산업공학회 회장입니다. 대통령 직속 규제개혁위원회 위원, 교육부 대학구조개혁위원회 위원, 신성장동력기획단 위원, KAIST 정보시스템연구소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자동화, 정보기술 응용, 산업지능 분야 전문가이며, 일방전달방식강의에서 탈피하는 수업방식 혁신을 통한 교육혁신, 교육의 기회 균등 실현을 위한 온라인대중공개강좌(MOOC) 확산에 노력하고 있습니다. 서울대, KAIST, 오하이오 주립 대학에서 학·석·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과학기술정보통신부(옛 미래창조과학부) 및 한국연구재단의 '이달의 과학기술자상'을 수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