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가 IT기술 트렌드를 이끄는 잘나가는 기업이라는 화려한 이면 뒤에 ‘갑질’ 행위로 거래 관계 업체들을 옥죄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직급이나 나이, 계약 관계 등에서 우위에 있는 사람이 사회통념에 맞지 않게 남을 함부로 대하거나 착취, 괴롭힘 등을 가하는 갑질이 산업계 중에서도 기술 주도적이며 혁신을 추구하는 IT 분야에서도 예외없이 행해진 것이다.

최근 구글이 협력사에 대한 갑질로 유럽연합(EU)으로부터 과징금 폭탄을 맞는 등 IT 공룡 기업의 갑질 행위에 대한 우려와 경계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 인공지능 스타 엔비디아…안 보이는 곳에서는 ‘갑질’

딥러닝, 머신러닝 등으로 대표되는 인공지능(AI) 관련 기술이 급성장하면서 컴퓨터용 부품 공급사 중 하나였던 엔비디아는 단숨에 인공지능 분야의 스타로 떠올랐다. 주력 상품인 GPU(그래픽 프로세서 유닛)가 AI 연구 개발에 필수적인 하드웨어로 주목받으면서 이 분야 핵심 기업으로 발돋움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2016년 딥러닝 기반 인공지능 바둑기사 ‘알파고’가 최상급 실력의 인간 기사들을 연거푸 꺾으면서 차세대 인공지능 기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이후, 당시 20달러대 후반에 불과했던 엔비디아의 주가는 2018년 초 200달러를 돌파했다.

엔비디아의 지포스 GTX 1060 그래픽카드 레퍼런스 모델. / 엔비디아 제공
엔비디아의 지포스 GTX 1060 그래픽카드 레퍼런스 모델. / 엔비디아 제공
그러나 엔비디아가 본업인 그래픽카드용 GPU 시장에서는 협력사들을 상대로 한 ‘갑질’ 행위로 구설수에 오르내리고 있다. 올해 초 업계에서 논란이 됐던 ‘지포스 파트너 프로그램(Geforce Partner Program, 이하 GPP)’이 대표적이다.

엔비디아가 올해 초 선보인 GPP는 참여한 그래픽카드 제조사에 다양한 최신 기술 제공과 그에 대한 기술적인 지원을 우선으로 제공하는 한편, 웹과 소셜 미디어 등에서 엔비디아가 진행하는 이벤트나 행사에서 GPP 파트너 브랜드를 홍보해주는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엔비디아는 GPP를 통해 참여 기업들에게 사실상 경쟁사와의 거래를 끊으라고 압박했다. GPP에는 각 제조사의 대표 ‘게이밍 브랜드’에 경쟁사인 AMD의 GPU를 사용한 제품을 출시하면 안 된다는 조항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에이수스의 ‘ROG(Republic Of Gamers)’, 기가바이트의 ‘어로스(AORUS)’, MSI의 ‘트윈 프로져(Twin Frozer)’ 등 각 제조사의 대표 게이밍 하드웨어 브랜드는 엔비디아 GPU를 탑재한 그래픽 카드나 노트북 등에서만 사용해야 한다는 것.

각 제조사들은 PC 시장의 가장 핵심 타깃인 게이머를 겨냥해 게이밍 브랜드를 수 년에 걸쳐 키워 왔다. 엔비디아의 GPP 조항은 각 제조사의 핵심 라인업에 대해 경쟁사 제품을 쓰지 말라는 것과는 다름 없는 것이어서 논란이 됐다.

구글 안드로이드 운영체제 이미지.  / 구글 안드로이드 홈페이지 갈무리
구글 안드로이드 운영체제 이미지. / 구글 안드로이드 홈페이지 갈무리
◇ 울며 겨자 먹기 제조사...논란 커지자 발 뺀 엔비디아

실제로, 엔비디아가 GPP를 발표한 이후 이들 제조사는 각자 대표 브랜드 제품에 AMD GPU를 사용한 제품을 출시하지 않았다. 출시하더라도 전에 없던 생소한 신규 브랜드로 선보이거나 다소 등급이 떨어지는 하위 브랜드로 선보였다. 실제로 에이수스의 경우 오랫동안 공들여온 게이밍 브랜드인 ROG와는 별도로 새 게이밍 브랜드 ‘아레즈(AREZ)’를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내놓아야 했다.

연간 PC 판매량이 계속 감소하는 등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제조업체들은 GPU 공급에서 ‘갑’의 위치에 있는 엔비디아가 제시한 GPP를 거부할 수 없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엔비디아의 GPU가 탑재된 ‘지포스’ 그래픽카드는 현재 전 세계 게임용 고성능 그래픽카드 시장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경쟁사인 AMD의 GPU 성능이 상대적으로 뒤처지면서 경쟁에서 밀렸기 때문이다.

그래픽카드 시장에서 절대적인 점유율을 갖는 엔비디아의 눈 밖에 나면 필요할 때 GPU를 충분히 공급받을 수 없게 된다. 실제로 과거 대표적인 친 엔비디아 브랜드였던 미국의 ‘XFX’는 AMD GPU를 탑재한 그래픽카드를 함께 출시했다는 이유로 지포스 GPU를 공급받지 못한 사례가 있다.

HP와 델 등 게이밍 브랜드를 강화한 글로벌 PC 제조사들은 엔비디아의 GPP에 담긴 몇몇 조항을 문제 삼고 이 프로그램 참여를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사태를 파악한 AMD와 일부 하드웨어 매체가 GPP의 문제점을 공론화하면서 파장이 커지기 시작했다.

논란이 확대되자 결국 엔비디아는 5월 4일 자사 블로그를 통해 GPP를 조기 종료한다고 밝혔다.

엔비디아가 GPP를 조기 종료한 것은 최근 시장 지배력을 남용한 IT 기업의 갑질에 대한 각국 공정거래위원회의 규제 움직임과 관련이 있다.

EU 집행위원회는 2015년 4월부터 3년에 걸친 조사 결과를 통해 구글이 주요 스마트폰 제조사들에 안드로이드 OS의 앱스토어인 구글플레이를 사용하려면 크롬 브라우저, 구글 지도 등의 구글 자체 앱을 기본 설치하도록 강제함으로써 소비자들의 선택을 제한해 왔다고 밝혔다.

특히 EU는 구글이 자사 앱의 사전 설치를 거부한 제조사가 안드로이드가 아닌 다른 운영체제를 탑재한 스마트폰을 제조 및 판매하는 것까지 방해했다고 강조했다. 시장에서 거의 독점이나 다름없는 점유율과 그로 인한 시장에서의 절대적인 지위를 내세워 제조사들의 자유로운 제품 개발과 출시 및 판매하는 일련의 기업 활동까지 침해했다는 것이다.

결국 18일(현지시각) 유럽연합(EU)은 구글이 스마트폰 운영체제(OS)인 안드로이드로 시장 지배력을 남용했다며 역대 최대 규모인 43억4000만 유로(약 5조7000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국내 한 PC 업계 관계자는 “엔비디아 역시 GPP에 대한 논란이 본격적인 조사나 소송 등으로 이어졌다면 반독점법 위반으로 인한 천문학적인 과징금을 회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며 “상황이 더 커지기 전에 조기 수습을 위해 GPP 조기 종료 카드를 꺼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