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전기차업체 테슬라가 비상장 전환 자금의 원천으로 사우디아라비아(이하 사우디) 국부펀드를 지목하면서, 미국 실리콘밸리 등 전 세계 IT업계에 미치는 사우디의 영향력에 관심이 쏠린다. 하지만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의 IT 기업 투자 관련 행보가 향후 정치적, 재정적 위협이 될 수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사우디는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사장 주도로 2017년 1000억달러(112조9100억원) 규모로 출범한 IT 전문 투자 펀드인 '비전 펀드'에 450억달러(50조 8095억원)를 출연하는 등 IT 업계의 큰 손으로 부상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13일(이하 현지시각) 테슬라 공식 블로그를 통해 "2년 전 사우디 국부펀드가 테슬라 상장 폐지와 관련해 비공개로 접근해 왔다"며 "2017년 초 석유 경제를 다변화할 필요성에 대해 관심을 표시하기 위해 처음 만났고, 이후 몇 차례 추가 회의를 했다"라고 밝혔다.

또 머스크는 "사우디 국부펀드는 (테슬라의) 비상장 전환을 추진할 충분한 자본을 보유하고 있다"며 "7월 31일에도 사우디 국부펀드 관계자와 만났으며, 이것이 7일 (테슬라를 비상장 전환할) 자금이 확보됐다고 말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고 말했다.

4월 7일(현지시각) ‘스티브 잡스 시어터’를 방문한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팀 쿡 애플 CEO(왼쪽에서 두 번째). / 트위터 갈무리
4월 7일(현지시각) ‘스티브 잡스 시어터’를 방문한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팀 쿡 애플 CEO(왼쪽에서 두 번째). / 트위터 갈무리
사우디는 테슬라 지분 5%를 가진 대주주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사우디는 테슬라 주식을 확보하기 위해 20억달러(2조2582억원)를 투입했다. 여기다 테슬라가 상장 폐지를 위해 주식 매입에 필요한 자금을 대겠다고 나선 것이다. 시장에선 테슬라가 비상장을 위해 700억달러(79조3590억원)가 필요하다고 추정한다.

사우디가 테슬라 등 IT 업계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선 배경에는 사우디의 실세 왕세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있다. 빈살만 왕세자는 석유 의존 경제에서 탈피해 첨단기술과 투자 중심지로 거듭나는 국가 개발 프로젝트 '비전 2030'를 추진 중이다.

사우디는 비전 2030 투입 예산으로 7000억달러(790조3700억원)를 잡았다. 이 중 5000억달러(564조5500억원)는 사우디 북서쪽 2만6500㎢ 부지에 세워질- '중동판 실리콘밸리'인 미래 신도시 '네옴' 건설에 쓰인다. 사우디는 비전 2030의 일환으로 2000억달러(225조7800억원) 규모의 태양광발전 사업도 추진한다.

빈 살만 왕세자의 IT 업계에 대한 관심은 사우디 국부펀드가 손정의 사장이 만든 비전펀드에 투자하면서 이목을 끌기 시작했다. 사우디 국부펀드는 2017년 5월 출범한 비전펀드의 모금액 절반 가까이 투자했다. 한때 사우디 국부펀드와 소프트뱅크는 투자 결정권을 놓고 갈등을 빚으면서 비전펀드 출범이 5개월 정도 늦어질 정도로 사우디의 입김은 결정적이다.

소프트뱅크 주도로 이뤄진 비전 펀드 투자는 빛을 발하고 있다. 소프트뱅크는 6월 말까지 1년여 동안 비전펀드를 이용해 사무실 공유 서비스 위워크, 온라인 메시징 앱 슬랙, 온라인 대출업체 소피 등 29개 기업에 271억달러(30조5931억9000만원)를 투자했다. 비전 펀드 투자 성공에 힘입어 소프트뱅크의 올해 2분기 영업이익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9% 급증하기도 했다.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사장 / 조선일보 DB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사장 / 조선일보 DB
사우디는 비전펀드와 별도로 개별 IT 기업에 대한 투자도 진행했다. 사우디는 2016년 세계 최대 차량공유서비스 우버의 지분 5% 확보를 위해 35억달러(3조9511억5000만 원)를 쏟아부었다, 증강현실(AR) 스타트업으로 주목받고 있는 매직리프에는 4억달러(4515억6000만원)를 투자했다.

빈 살만 왕세자가 3월 19일부터 3주 일정으로 미국을 방문했는데, 당시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와 세르게이 브린 구글 창업자, 순다 피차이 구글 CEO, 제프 베저스 아마존 CEO, 사티아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 CEO, 로버트 아이거 월트디즈니 회장 등 실리콘밸리와 할리우드 거물이 그를 맞이했다.

살만 왕세자는 애플, 아마존과 데이터 센터 건설에 대해 의논했으며, 브린을 만나 클라우드 컴퓨팅과 사이버 보안 관련 논의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애플은 살만 왕세자로부터 사우디 사업장에서 남녀가 함께 일해도 된다는 보장을 받았다.

하지만 살만 왕세자의 행보를 우려하는 쪽도 있다.

살만 왕세자는 3월부터 여성의 운전을 허용하고, 4월부터 영화관에서 남녀가 동석할 수 있도록 했다. 여성의 비키니 착용과 음주를 할 수 있는 관광 특구를 설치하는 등 기존과 다른 혁신 정책을 펼친다. 하지만 살만 왕세자는 2017년 6월 당시 왕세자였던 사촌 형 빈나예프를 가택 연금하고 제1 계승자에 오른 인물이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정적을 제거하는 등 호전적인 면모를 있는 셈이다.

FT는 "살만 왕세자는 권력을 잡기 위해 국내에서 정적을 참수하는 등 억압적으로 정권을 이끌고 있다"며 "실리콘밸리의 자유주의 엘리트를 포용하는 것은 위선일 수 있다"고 비판했다.

IT 전문 매체 리코드 역시 "사우디는 실리콘밸리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면서도 "사우디는 완전히 통합되지 않은 상태로 투자를 하는 데 있어 정치∙재정적 위험이 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