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업을 진행하기 전에 법률 검토를 받고 있다. 변호사들이 '법에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의견을 내면서 100개 중 90개는 못했다."

표철민 체인파트너스 대표가 지난 10월 29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열린 '체인파트너스 미디어 콘퍼런스'에서 털어놓은 얘기다. 그는 "그렇게 1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니 내가 변했다. 이제는 불법이 아닌 건 무조건 하겠다"고 말했다.

블록체인 스타트업들이 ‘포지티브 규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포지티브 규제란 법에 나열된 것만 허용하는 법 적용 방식이다.

비트코인 이미지. / 조선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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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블록체인 업계에 따르면, 암호화폐(가상화폐) 거래소 지닉스(Zeniex)는 'ZXG 크립토 펀드 1호'를 팔았다가 자본 시장법 위반 혐의로 검찰 수사선상에 놓이게 됐다.

한·중 암호화폐 거래소 지닉스는 지난 9월 '세계 최초 펀드형 토큰'이라고 홍보하며 자체 발행한 암호화폐 ZXG를 이용한 'ZXG 크립토 펀드 1호'를 내놓았다. 지닉스는 ‘ZXG 크립토 펀드 1호’는 공모 2분 만에 목표액 1000이더리움을 모두 모았다. 지닉스는 72시간 동안 추가로 투자를 받았고, 추첨을 통해 투자자를 선택했다.

이에 대해 금융당국은 9월 24일 "가상통화 펀드는 금융감독원에 등록된 사실이 없고, 투자설명서도 금융감독원 심사를 받은 사실이 없으며, 펀드 운용사와 판매회사, 수탁회사 등도 금융위 인가를 받은 사실이 없다"며 자본시장법 위반 소지가 있다고 판단했다. 지닉스는 앞서 "펀드 출시 전 법률검토를 받았다"고 했지만, 결국 금융 당국 제재 방침이 나온지 4일 만인 10월 29일 두 번째 암호화폐 펀드 상품 출시를 전면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엄밀하게 말하면 한국에서 암호화폐는 ‘회색 지대’에 놓여 있다. 관련 행위를 합법이라고 명시해놓은 법률도 없고 불법이라고 명시한 법률도 없다. 암호화폐공개(ICO)가 대표적이다. 금융 당국은 2017년 9월 암호화폐 공개(ICO)를 구두로 사실상 금지했다. 하지만 암호화폐에 대한 정의는 고사하고 ICO 관련 법률도 없다.

국회에서 4건 이상 암호화폐, ICO 관련 입법안이 제출됐지만, 처리는 요원하다. 20대 국회의원 임기가 끝나는 2020년까지 해당 입법안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해, 암호화폐 관련 입법 공백 상태가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블록체인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가이드라인이라도 명확하게 만들어줘야 한다"며 "언제 범법자로 낙인찍힐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인력 수급도 어려운 상태"라고 호소했다.

또다른 업계 관계자는 "공무원들이 자신이 담당할 때는 암호화폐와 관련한 그 어떤 것도 만들지 않겠다는 자세가 만연하다. 이렇다보니 ‘회색 지대'에 놓인 투자자들만 피해를 입게 생겼다"고 말했다.

가령, 블록체인 업체가 내놓은 백서(White paper)를 암호화폐 발행업자의 단순한 청사진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암호화폐 투자자와 일종의 계약으로 볼 것인지에 따라 투자자 피해 구제 범위도 달라진다. 하지만 이 역시도 지금 상태로서는 모호하다.

안찬식 법무법인 충정 변호사는 "백서를 일종의 계약이라고 봤을 경우, ICO 프로젝트 참여자 또는 토큰 구매자가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진행하면 투자자 편에 선 판결이 나올 수 있다"면서도 "반면, 백서를 단순한 청사진에 불과해 변경 가능하다는 것을 인지한 경우는 참여자가 소송에서 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규제 공백 상태이다 보니, 역설적으로 사업자가 지나친 주장을 펴기도 쉬운 상황이다.

C업체 대표는 지난 10월 한 공개 밋업에서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ICO를 (합법적으로)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1년 전 금융 당국이 ICO를 유사수신행위 또는 형법으로 제재하겠다고 발표했지만, 1년 동안 아무것도 만들지 않았다"며 "ICO와 가장 유사한 온라인소액투자중개법을 이용하면 ICO를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한 변호사는 "크라우드 펀딩 중개업자가 이를 취급하는 것은 유사수신행위에 해당하지 않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암호화폐 발행업자 책임까지 면제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