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국가의 정책 흐름을 알아보는 방법 중 하나는 예산을 분석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전체적인 방향성, 중점 영역, 주요사업 등을 파악할 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 예산에서 나타난 슈퍼컴퓨터 정책은 어떨까?

미국 예산편성 절차를 살펴보자. 예산안 편성은 보통 1년쯤 시간이 소요된다. 이는 백악관 예산관리국(Office of Management and Budget)에서 부처에 잠정예산액을 통보하며 시작된다.

부처는 이에 기반해 세부 설명자료를 포함한 부처별 예산안을 작성한다. 이렇게 작성된 예산안을 2월 국회에 제출하고, 국회는 4월까지 검토한다. 이후 행정부와 의회 조율을 거쳐 새로운 회계연도 예산이 집행된다. 참고로 미국 회계연도는 10월 1일 시작해 이듬해 9월말 끝난다.

하지만 17/18 회계연도(2017.10.1~2018.9.30) 예산은 이렇게 진행되지 않았다. 트럼프 행정부는 2017년 1월에 시작됐다. 행정부가 출범하는 해에는 지난 정부가 작성한 안을 일부 수정해 2~3월에 의회에 제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트럼프는 이런 관행과 달리 예산의 대폭 수정을 추진했다. 결과적으로 3월에 요약본을, 5월 23일에 정식 예산안을 제출했고 의회는 이를 7월까지 검토했다.

 써밋(Summit) 슈퍼컴퓨터 개통식에서 축사하는 미국 에너지부 페리(Perry) 장관. / 구글 검색
써밋(Summit) 슈퍼컴퓨터 개통식에서 축사하는 미국 에너지부 페리(Perry) 장관. / 구글 검색
이렇게 제출된 17/18 예산안 특징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로 산업 측면에서 보면 예산안은 매우 긍정적이다. 공공 슈퍼컴을 주도하는 에너지부 차세대 엑사스케일급 슈퍼컴퓨터 예산은 5억달러(5633억원)가 넘는다. 이는 전년대비 77% 증가한 것이다. 핵무기 개발 총괄기관인 국가핵안전국(NNSA, National Nuclear Safety Administration)에 1억5000만달러(1690억원), 기초연구를 지원하는 과학국(OS, Office of Science)에 3억5000만달러(3945억원)로 나뉜다.

NNSA 예산은 국가안보를 강조하는 트럼프 입장에서 예상된 흐름이지만, 전체 예산 20%에 해당하는 9억달러(1조145억원)를 삭감하면서 슈퍼컴 부분만 증액한 OS 경우는 매우 특이하다. OS 6개 영역 중 5개 영역 예산은 대규모 삭감하면서 슈퍼컴 예산은 무려 70% 증액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기초과학 및 환경에 부정적인 예산안의 두 번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기후변화 등 기초과학 예산이 대폭 삭감됐고, 에너지 관련 신기술을 연구하는 에너지부 고등연구계획국(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 Energy) 예산은 전액 삭감됐다. 에너지 효율성 및 재생에너지를 연구하는 EERE (Energy Efficiency and Renewable Energy) 프로그램은 50% 삭감됐다.

산업 및 안보가 강조되면서 과학과 환경이 약화되는 이러한 모습은 18/19년 예산에서도 반복된다. 트럼프 행정부가 요청한 18/19년 에너지부 엑사플롭스급 슈퍼컴 예산은 6억4000만달러(7216억원)다. 17/18년 집행된 예산에 비해 무려 3억8000만달러(4284억원)가 증액됐다. 이는 NNSA 1억6000만달러(1804억원), OS 4억7000만달러(5301억원)로 나뉜다.

트럼프 행정부가 슈퍼컴퓨터 산업에 강력하게 지원하는 것과는 달리 슈퍼컴 활용을 포함한 기초과학 분야 지원은 대폭 약화됐다. 국립보건원(National Institute of Health) 예산은 60억달러(6조7674억원)가 삭감됐고, OS 예산은 9억달러(1조151억원)가 삭감됐다.

또 국립해양대기국(National Oceanic and Atmospheric Administration) 예산은 5%, 환경보호국(Environmental Protection Agency)는 31.4% 삭감됐다. 심지어 상징적인 항공우주국(NASA) 예산도 1억달러(1128억원) 삭감됐다.

과학 및 환경 부문 투자는 줄이면서 산업 및 안보에 투자를 늘이는 이러한 정책은 슈퍼컴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슈퍼컴 생태계 관점에서 보면 이는 매우 왜곡된 정책이다. 슈퍼컴을 제조하는 산업에는 투자를 확대하면서 이를 활용하는 과학기술 투자를 축소하는 것은 결국 공급을 늘리고 수요를 줄이는 결과를 낳는다. 슈퍼컴 투자대비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선 슈퍼컴퓨터 시스템, 연구 및 활용을 아우르는 생태계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시스템을 도입한다 해도 이에 대한 활용기술이 확보되지 않으면 이는 쇳덩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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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수 소장은 미국 보스턴대학에서 물리학 박사를 했고 독일 국립슈퍼컴센터 연구원,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슈퍼컴퓨팅센터 센터장, 사단법인 한국계산과학공학회 부회장, 저널오브컴퓨테이셔널싸이언스(Journal of Computational Science) 편집위원, KISTI 국가슈퍼컴퓨팅연구소 소장을 거쳐 현재는 사우디 킹 압둘라 과학기술대학교(KAUST) 슈퍼컴센터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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