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전식 이차전지의 맏형 격인 ‘원통형 배터리’가 퇴출 위기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원통형 배터리는 날로 슬림화·경량화되는 IT 기기에서 더 이상 차지할 공간이 없어지면서 한때 퇴물 취급 받았다. 하지만, 최근 무선 가전제품이 늘어나고, 전기로 구동하는 퍼스널 모빌리티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 90년대 캠코더로 시작한 원통형 배터리, 2010년 정점 찍고 내리막

원통형·각형·파우치형 배터리. / 삼성SDI 제공
원통형·각형·파우치형 배터리. / 삼성SDI 제공
원통형 리튬이온 배터리는 1990년대 초 일본에서 먼저 개발해 상용화됐다. 초창기 원통형 배터리는 지름 14㎜, 길이 50㎜인 ‘14500’과 지름 20㎜, 길이 50㎜인 ‘20500’ 규격을 따랐다. 14500은 가장 많이 사용되는 1차 전지 AA 규격과 크기가 같고, 20500은 니켈카드뮴 배터리와 니켈수소 배터리 크기와 같았다. 하지만, 당시 이차전지의 주력 시장이었던 캠코더에서 쓰기에 14500은 용량이 너무 적고, 20500은 크기가 너무 크다는 평가를 받았다.

20500 배터리를 개발했던 일본 업체는 캠코더에 적합한 배터리 사이즈를 다시 고민해 시장조사를 거친 후 ‘18650’이라는 규격을 정하게 된다. 이는 캠코더를 한 손으로 쥐었을 때 가장 안정감을 느끼는 크기를 고려한 것이다. 이후 휴대성을 강조한 일본 전자 업체의 캠코더가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홈 비디오 시대를 열면서 원통형 배터리의 시작을 알렸다.

캠코더 열풍 이후 2000대 들어서는 노트북의 등장으로 원통형 배터리의 본격적인 전성시대가 열렸다. 당시만 해도 두껍고 무거웠던 노트북은 하판 뒤쪽에 착탈식 카트리지가 있고, 이 카트리지를 열어보면 원통형 배터리가 6개에서 8개까지 줄지어 있었다. 배터리 충전은 카트리지를 노트북에 부착한 후 충전 케이블을 연결하는 지금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배터리 수명이 다하면 따로 카트리지만 구매해 쓸 수 있다는 점은 장점이었다.

노트북 시장이 지속적으로 성장하면서 원통형 배터리도 날개돋친 듯 팔려나갔다. 시장조사업체 B3에 따르면, 2002년 3억셀 수준이었던 원통형 배터리 수요는 연평균 21%의 성장률을 기록하며 2010년에는 16억셀까지 확대됐다. 이 중 노트북용 원통형 배터리 수요만 12억셀에 달했다.

하지만, 2011년부터 휴대성을 강조한 울트라북 트렌드가 불기 시작하면서 두껍고 무거웠던 기존 노트북의 자리를 빠르게 잠식했다. 노트북이 갈수록 슬림해지기 시작하면서 착탈식 카트리지 방식보다는 납작한 파우치형 배터리를 내장한 일체형 디자인이 대세로 떠올랐다. 때맞춰 스마트폰까지 등장하면서 IT 기기에서는 파우치형 배터리가 주력으로 부상했다. 2011년 정점을 찍은 원통형 배터리 수요는 이후 빠르게 내리막길을 걸었다.

◇ ‘코드리스' 트렌드 타고 부활, 전기차 한 대에 수천개 탑재

몇 년 하향세를 걷던 원통형 배터리는 IT가 아닌 비(非) IT 분야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대표적인 예가 일명 ‘코드리스'로 불리는 무선 기기다. 전동공구를 비롯해 청소기와 같은 생활가전이 거추장스러운 코드를 벗어던지고 무선으로 변신하면서 다시 원통형 배터리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배터리 업계에 따르면, 국내에서는 무선 청소기용 원통형 배터리 수요가 많고, 해외에서는 전동공구와 전원공구용 원통형 배터리 수요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원통형 배터리의 최대 강점은 표준화된 규격이 완성돼 있어 비교적 낮은 생산단가로 대량 생산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수십년간 효율성과 안전성도 검증받았다. 제조사 입장에서는 개별 제품에 따라 새로운 규격을 고민할 필요없이 필요한 에너지에 따라 여러 개의 원통형 배터리를 이어붙여 쓰는 게 편리하다는 점도 큰 메리트다.

원통형 배터리는 소형 무선기기에 그치지 않고 전기차를 비롯해 전기자전거, 전기스쿠터, 골프카트 등 퍼스널 모빌리티 시장까지 진출하면서 예전의 명성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2018년 원통형 배터리 수요는 47억셀로 급증할 것으로 관측되는데, 이는 대당 셀 탑재 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모빌리티 시장이 빠르게 성장한 것과 궤를 같이 한다. 2010년까지만 해도 원통형 배터리 수요의 80%가 IT 분야에서 나왔다면, 2018년에는 96%가 비 IT 분야에서 나올 것으로 전망된다.

수천개의 원통형 배터리로 만들어지는 테슬라 전기차의 배터리팩. / 유튜브 갈무리
수천개의 원통형 배터리로 만들어지는 테슬라 전기차의 배터리팩. / 유튜브 갈무리
전기차의 경우 아직 시장이 만들어지는 과정인 만큼 자동차 제조사별로 원통형과 각형, 파우치형을 두루 고려하고 있다. 테슬라는 원통형 배터리를 주력으로 쓰는 대표적인 업체다. 재규어의 차세대 전기차도 원통형 배터리를 탑재할 계획이다. 삼성SDI, LG화학 등 국내 배터리 제조사는 원통형과 각형, 파우치형을 모두 만들지만, LG화학이 상대적으로 파우치형에 집중하는 반면, 삼성SDI는 여전히 원통형의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다고 판단하는 편이다.

IT와 비 IT 분야를 넘나들며 배터리의 비중이 날로 커지면서 원통형 배터리도 진화 중이다. 배터리 업계는 한 시대를 풍미한 원통형 배터리 규격인 18650보다 에너지 용량을 최대 50%까지 늘린 지름 21㎜, 길이 70㎜의 ‘21700’ 규격을 새로 개발해 원통형 배터리의 새로운 표준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삼성SDI 한 관계자는 "21700 배터리는 주요 성능인 용량, 수명, 출력을 동시에 극대화할 수 있는 최적의 규격으로 평가받고 있고, 다른 규격과 비교해 원가 경쟁력도 높다"며 "이를 바탕으로 전기차, 전동공구, 전기자전거, 에너지저장장치(ESS) 등 다양한 수요처에 적용할 수 있어 원통형 리튬이온 배터리의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잡을 전망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