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 한번에 서울 한복판이 통신지옥으로 변했다. 24일 KT 아현국사에서 발생한 화재로 KT가 제공하는 전화, 인터넷, IPTV 서비스 등을 사용하는 인근 지역 시민과 소상공인이 불편을 겪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경찰, 국방부 등 국가 기관 통신망에 장애가 생겼고, 70대 노인이 119 신고를 못해 사망한 사건도 일어났다. 평일 발생한 사고였다면 초각을 다투는 은행·증권업계의 거래 피해도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단순 광케이블 화재 사고가 아닌 심각한 국가 재난이 초래될 수 있었다는 우려가 나왔던 이유다.

모든 것이 이어져 있는 초연결 사회에서 발생하는 통신망 장에는 사회에 치명상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정부는 이런 초연결 사회의 치명적 약점을 깨닫고 제대로 된 사후 대응책을 마련하거나 사전 관리 강화에 중점을 두지 않았다. KT 통신대란은 ‘연결’의 중요성은 알아도 ‘단절’의 가능성은 외면한 인재(人災)였던 셈이다.

26일 김홍진 전 KT 사장은 "백업 체계와 우회로가 없는 네트워크 설계 미비의 문제인지 운영의 미숙인지 먼저 판단해야 한다"며 "국가 핵심 인프라로 활용되는 통신망을 기업이 제대로 운영토록 하려면 정부가 대규모 망구축 프로젝트에 제값을 지불하고, 통신비 인하 등 과도한 압박은 줄여야한다"고 말했다.

경찰과 소방대원이 25일 오전 KT 아현국사 앞 공동구 화재현장에서 화재 원인을 조사하기 현장 감식을 진행하는 모습. / 조선일보 DB
경찰과 소방대원이 25일 오전 KT 아현국사 앞 공동구 화재현장에서 화재 원인을 조사하기 현장 감식을 진행하는 모습. / 조선일보 DB
◇ 예고된 ‘불통’…전국망 아니면 ‘백업 체계’ 구축 의무 없어

KT 서울 아현국사 지하 통신구 화재로 인해 서울시내 관할지역 통신망은 24일 오전부터 ‘먹통’이 됐다. 불은 이날 오전 11시 12분쯤 발생했고 10시간 만인 오후 9시 26분에 꺼졌다. 화재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완전복구까진 1주일가량 걸릴 전망이다.

국민 안전과 관련된 긴급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의 경우 대체 가능한 별도 통신망을 구축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

KT에 따르면 아현국사는 국사 가운데 중요도가 떨어지는 D등급에 해당해 아직 백업 체계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보통 국사 등급은 A부터 D까지 4단계로 구분된다. 전국망에 영향을 미치는 수준을 고려해 정부에서 이를 정해준다. 백업 체계를 갖춘 A~C등급과 달리 D등급은 단순 광케이블(단선)만 있는 곳이다.

서울 마포와 서대문 등 일부 지역만 관할하는 아현국사에도 백업 체계가 구축됐다면 복구 시간이 빨라졌을 수 있다. 하지만 아현국사는 D등급 이어서 백업 시스템 구축 의무가 없다.

KT에 따르면 아현지사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은 KT만 따졌을 때 전국에 56개 있다. 이중 백업 체계는 29곳이 갖췄다. 나머지 27곳은 여전히 위험에 노출된 셈이다.

오성목 KT 네트워크 부문 사장은 25일 아현국사에서 취재진과 만나 "(D등급 국사) 백업 체계 구축에는 많은 투자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케이블을 복구하고 있는 KT 직원. / KT 제공
케이블을 복구하고 있는 KT 직원. / KT 제공
◇ 허술한 소방 규정…국가 중요 인프라 주말 근무자 2명

허술한 기존 방재 시스템과 소방 규정을 보완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통신구에는 소화기 한대만 비치돼 있었고 스프링클러 등 방재시설은 전무했다. 통신구 길이가 500m 미만이면 방재시설을 설치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주말 근무자는 단 두명에 불과해 즉각 대응이 어려웠다. 국가 중요 인프라에 해당되는 시설 경비를 위해 두명만 근무한다는 점은 논란이 될 수 있다.

이같은 관리 현실을 두고 시대의 변화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24일 아현국사 화재에 대해 ‘정보통신재난 위기관리 표준매뉴얼’에 따라 ‘주의’ 단계를 발령했다. 또 관계 부처 및 이통사와 협의해 중요 통신시설 전체를 종합 점검하고 재발 방지책을 12월말까지 마련할 계획이다.

이통업계 한 전문가는 "KT화재 사태는 단순 화재 사태가 아닌 국가 재난 및 안보 차원에서 봐야한다"며 "이제라도 예방, 대비, 대응, 복구 등 정보통신재난에 대한 제대로 된 매뉴얼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황창규 KT 회장이 25일 오전 전날 화재가 발생한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KT아현국사를 찾아 기자회견을 하고 통신 장애 등과 관련해 사과하고 있다. / 조선일보 DB
황창규 KT 회장이 25일 오전 전날 화재가 발생한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KT아현국사를 찾아 기자회견을 하고 통신 장애 등과 관련해 사과하고 있다. / 조선일보 DB
◇ 관계당국, 화재 원인 규명 절차…KT "소상공인 손실 보상 별도 검토"

서울 서대문경찰서는 25일 오전 10시30분부터 경찰·소방·KT·한국전력 등 4개 기관이 화재 현장인 KT 아현빌딩에서 1차 합동 감식을 벌인 결과 지하 1층 통신구(케이블 부설용 지하도) 79m가량이 소실된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더 정확한 화재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26일 오전 10시 2차 정밀 합동 감식을 실시한다. 2차 감식에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도 참여한다.

KT에 따르면 25일 오후 6시 기준 인터넷 회선은 97%, 무선은 63% 복구됐다. KT 한 관계자는 "인터넷은 21만5000명의 가입자 가운데 21만명의 회선이 복구됐다"며 "무선은 2883개 가운데 1780개 기지국이 복구됐다"고 말했다.

KT는 화재로 피해를 본 유무선 가입 고객에게 1개월 요금 감면을 시행할 방침이다. KT는 25일 입장문을 통해 "1개월 감면 금액 기준은 직전 3개월 평균 사용 요금이며 감면 대상 고객은 추후 확정한 뒤 개별 고지할 예정이다"라고 설명했다.

무선 고객은 피해 대상 지역 거주 고객을 중심으로 보상을 진행한다. 특히 소상공인은 향후 별도 검토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황창규 KT 회장은 "모든 역량을 기울여 이른 시일 내 완전복구가 이뤄지도록 할 것"이라며 "KT는 화재 원인 규명을 위해 소방 당국에 적극 협력하고, 분석을 통해 동일한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전국의 모든 통신시설에 대한 안전점검을 실시하는 등 재발 방지책을 시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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