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ICO(가상통화공개)의 자금조달실적은 VC(벤처캐피털)의 실적을 초과했다. 블록체인 기업이 ICO로 조달한 자금은 3억2700만달러(3685억원)다. 반면, VC로 조달한 자금은 2억9500만달러(3325억원)다.

최초의 ICO가 이뤄진 2013년 이후, 불과 4년만에 새로운 자본조달 경로가 전통 자본조달 경로를 넘어선 것이다.

2018년 하반기 가상화폐 가격이 폭락하자 ICO의 팽창 속도도 주춤한 모습이다. 그럼에도 STO(Security Token Offering, 증권형 토큰공개), IEO(Initial Coin Offering, 거래소 코인공개) 등 자본조달의 본질은 유지한 채 이름만 조금씩 바꾼 방식이 투자자를 유혹하고 있다.

기업가 관점에서 VC보다 ICO를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ICO는 VC처럼 자금 조달 시 복잡하고 세세한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다. VC는 소수의 대주주만 투자 기회를 갖게 되나, ICO는 민주적이고 포괄적이어서 훨씬 더 많은 소비자가 소액으로 투자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ICO가 급격히 팽창하면, VC는 반대로 위축되리라는 이야기가 있다. 지금 시장 상황과 논의를 두고 보면 딱히 틀리지도 않은 이야기다. 하지만, ICO를 통한 자본조달은 (최소한 아직까지는) ‘블록체인 기반 사업’에만 적용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즉, ICO의 자본조달 규모가 VC의 그것을 뛰어 넘었다는 이야기는 ‘블록체인 사업 투자가 나머지 VC에 대한 투자규모를 상회한다’는 의미다. 모든 VC가 투자기회를 ICO에 빼앗겼다는 의미가 아니다.

또한, 많은 VC가 ICO에 투자하기도 한다. 좋은 비즈니스 플랜을 가진 ICO라면 VC가 투자하지 않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다만, 거의 모든 소비자가 ICO에 직접 투자할 수 있기 때문에, LP(Limited Partnership)의 형태를 가진 VC가 자신의 펀드매니저에게 지불하는 높은 수수료를 정당화하기 어렵게 될 수 있다.

소비자가 직접 투자할 수 있다는 것이 펀드 출자기관(LP)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거나 VC가 ICO 보다 비효율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VC의 펀드매니저가 자신의 투자자인 GP(운용사·General Partner) 보다 ICO 프로젝트의 가치를 더 전문성 있게, 정확하게 판단한다면 그들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다. LP를 비롯한 전문 투자자는 투자 실사 과정에서 위험 신호를 더 잘 볼 수 있다. 반면, 일반 소비자는 기업가와 접촉할 길이 없으므로 이들 위험 신호를 결코 알 수 없다. 이는 ICO 투자가 VC 투자보다 위험한 이유이기도 하다.

기업가 입장에서는 당연히 제약이 많은 VC보다 자유로운 ICO 자금을 받는 것을 선호하게 될 것이다. 물론 VC의 전문적인 조언을 필요로 하는 경우라면, ICO보다 VC를 선호할 수도 있다.

VC는 자본을 필요로 하는 초기단계 기업에게 운영·제품 홍보·생산라인 관리·시장 침투 방법 등 전문적인 조언을 해 준다. 사업 경험이 부족한 기업가라면 VC가 제공하는 부수적인 경영 관련 서비스에 큰 매력을 느낄 수 있다.

VC는 창업자를 기존 창업 경험자나 전현직 임원, 전문 인력 등과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프로젝트의 성격을 파악하고 좋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분리하는 역할도 한다. 이러한 장점이 있는 이상, ICO가 각광받더라도 VC의 역할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블록체인 스타트업 업계에서 ICO는 더 저렴하고 신속하며 효율적인 자금 조달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이에 VC생태계가 혼란해진 것은 사실이다. 이로 인해 ICO와 VC가 경쟁 관계하는 의견이 있다.

그럼에도, ICO는 VC를 대체하지는 않을 것이다. 둘 다 공존할 것으로 생각한다. 각자 장점과 역할이 있어서다.

ICO냐 VC냐, 선택은 창업자의 역량과 목적에 따라 이뤄질 것이다. 오직 자금만 조달하려는 창업자는 아마 ICO를 선택할 것이다. 반면, 자금 외에 기업 운영 사항을 비롯한 추가 지원을 원하는 사람들은 VC와 상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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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훈 교수(PhD, CFA, FRM)는 홍익대 경영대 재무전공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학계에 오기 전 대학자산운용펀드, 투자은행, 중앙은행 등에 근무하며 금융 실무경력을 쌓았습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학박사를 마치고 자본시장연구원과 시드니공과대(University of Technology, Sydney) 경영대에서 근무했습니다.

주 연구분야는 자산운용, 위험관리, 대체투자입니다. 현재는 중소기업 분석을 전문으로 하는 우베멘토의 리서치 자문과 금융위원회 테크자문단을 포함하여 현업 및 정책적으로 다양한 자문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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