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흔히 말하는 '오덕'(Otaku)은 해당 분야를 잘 아는 '마니아'를 뜻함과 동시에 팬덤 등 열정을 상징하는 말로도 통합니다. IT조선은 2018년 시작과 함께 애니메이션・만화・영화・게임 등 오덕 문화로 상징되는 '팝컬처(Pop Culture)' 콘텐츠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합니다. 어린시절 열광했던 인기 콘텐츠부터 최신 팝컬처 분야 핫이슈까지 폭넓게 다루머 오덕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 줄 예정입니다.

SF 로봇 마니아는 인기작 ‘파이브 스타 스토리즈(The Five Star Stories)’의 시작을 1984년작 애니메이션 ‘중전기 엘가임(重戦機エルガイム)'이라 평가한다.

중전기 엘가임 일러스트. / 야후재팬 갈무리
중전기 엘가임 일러스트. / 야후재팬 갈무리
엘가임은 애니메이션 ‘기동전사 건담'으로 인기 제작자 대열에 오른 ‘토미노 요시유키(富野由悠季)’ 감독이 1983년작 ‘성전사 단바인(聖戦士ダンバイン)’ 후속작으로 선보인 작품이다.

토미노 감독은 엘가임 제작 당시 입사 4개월 차 신입 애니메이터 ‘나가노 마모루(永野護)’를 캐릭터 및 메카닉 디자이너로 기용하는 깜짝 인사를 단행한다.

나가노 마모루는 SF 인기작 ‘파이브스타 스토리즈(The Five Star Stories)’를 창조한 인물로, 1984년작 엘가임은 그의 처녀작에 해당한다.

마징가Z로 대표되는 슈퍼로봇과 확연히 다른 ‘기동전사 건담', 로봇과 판타지를 결합해 신선한 재미를 제공한 ‘성전사 단바인’ 등 기존에 없던 로봇 애니메이션 작품으로 성공 가도를 달리던 토미노 감독은 또다시 새로운 로봇 작품을 고민하게 된다.

중전기 엘가임 애니메이션 오프닝 영상. / 유튜브 제공

나가노의 손을 통해 섬세하게 그려진 로봇 ‘헤비메탈'은 토미노 감독의 눈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나가노가 그린 로봇 ‘헤비메탈’은 기존 로봇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토미노는 엘가임 메카닉 디자인을 맡은 나가노에게 로봇과 어울리는 캐릭터를 그릴 수 있겠느냐고 제안했고 나가노는 이를 흔쾌히 수락한다.

중전기 엘가임 일러스트. / 야후재팬 갈무리
중전기 엘가임 일러스트. / 야후재팬 갈무리
당시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입사 4개월차 신참에게 고참 베테랑 제작자의 영역을 맡긴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 애니메이션 업계 관계자의 시각이다. 애니메이션 제작사 선라이즈는 토미노의 결정에 반발했고, 토미노는 회사를 설득시키기 위해 시간을 들였다.

토미노 감독의 후광을 업고 나가노는 신참으로서 얻기 힘든 메카닉과 캐릭터 디자인을 함께 진행하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

토미노는 나가노 외에도 애니메이션 엘가임 제작에 훗날 제타(Z)건담 작화감독이 된 ‘키타즈메 히로유키(北爪宏幸)’ 등 20대 젊은 인재를 대거 투입했다. ‘더 텔레비전' 등 당시 잡지 매체에 따르면 토미노 감독은 "작품을 신참 교육에 이용하고 있다"는 등의 비판도 받았다.

애니메이션 ‘중전기 엘가임'은 모두 54화가 만들어졌다. 토미노 애니메이션 중 시리즈가 아닌 단일 작품으로는 편 수가 가장 길다

◇ 파이브 스타 스토리즈의 원형 ‘엘가임'

토미노 감독은 "엘가임은 나가노의 작품"이라 말한다.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는 나가노가 엘가임 세계관 구성에 상당 부분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나가노는 엘가임 세계관 속에 녹아있는 문화적 배경을 만드는 등 토미노 감독과 각본가 와타나베 유우지(渡邉由自)가 쓴 스토리 라인 위에 자신이 구상한 엘가임의 세계관을 구축했다. 토미노는 나가노의 엘가임 세계관 대부분을 수용했다.

파이브 스타 스토리즈 일러스트. / 야후재팬 갈무리
파이브 스타 스토리즈 일러스트. / 야후재팬 갈무리
토미노가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인조인간 ‘파티마'의 존재다. 나가노는 헤비메탈 로봇 머리 부분에 유기연산 컴퓨터인 파티마를 탑승시키는 설정을 토미노에게 제안하지만, 토미노는 기계와 인간을 융합하는 것은 시청자에게 혼란을 준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애니메이션 제작 단계에서 나온 파티마는 파이브 스타 스토리즈에서 그려진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나가노는 ‘마리아'란 이름의 기계적인 몸과 얼굴을 가진 여성형 로봇을 그린다. 엘가임의 세계에서 여성들의 반발이 심해 로봇을 실제 여성처럼 만들지 못한다는 문화적 설정이 바탕이 됐다.

엘가임에서 채용되지 못한 ‘파티마' 아이디어는 만화 ‘파이브 스타 스토리즈'를 통해 실현된다. 파이브 스타 스토리즈에는 거대 로봇 ‘모터헤드'의 머리 부분에 여성형 기계 생명체 ‘파티마'가 탑승하며, 모터헤드는 파티마 없이 조종하기 어려운 존재로 그려진다.

◇ 무버블 프레임 선구자 ‘헤비메탈’

‘헤비메탈’은 엘가임 애니메이션 속에 등장하는 로봇을 지칭하는 말이다. 애니메이션에서는 인간형 로봇은 헤비메탈, 인간 모습을 벗어난 로봇은 ‘머시너리'라 부른다. 헤비메탈은 또다시 ‘오리지널', ‘A급', ‘B급' 등으로 분류된다.

높이 기준 18미터쯤의 크기를 지닌 헤비메탈은 골격과 장갑을 분리한 ‘무버블 프레임(MORVABUL F-LAME)’ 구조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중전기 엘가임 일러스트. / 야후재팬 갈무리
중전기 엘가임 일러스트. / 야후재팬 갈무리
골격과 장갑이 일체화된 구조에서는 폭넓고 다채로운 움직임이 불가능하지만, 이를 분리하면 현실감을 더하면서도 작중에 다채로운 로봇 액션을 펼칠 수 있다. 토미노 감독은 1985년작 ‘기동전사 제타건담'에서 나가노의 무버블 프레임을 채용한 제타 건담 모빌슈트를 선보인다.

무버블 프레임 구조는 프라모델 등 모형 상품에서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다관절 구조 몸체에 장갑을 덧대는 방식이라 프라모델 모형에서도 다채로운 액션 장면을 연출할 수 있다.

나가노는 모형 제작에 조예가 깊은 인물로 알려졌다. 나가노는 18세 당시 모형 전문 기업 타미야가 주최한 ‘밀리터리 피규어 개조 콘테스트'에 참가해 입상한 경력을 갖추고 있다. 또, 파이브 스타 스토리즈 연재 당시 모형 잡지 모델그래픽스에 자신의 작품을 선보인 바 있다.

헤비메탈 로봇은 ‘빛 에너지'를 동력원으로 삼고 있다. 로봇의 장갑 표면은 태양 빛을 에너지로 변환시키는 ‘솔라 제네레이터'가 탑재됐다.

주인공 ‘다바'가 조종하는 A급 헤비메탈 ‘엘가임(L-GAIM)’도 태양 에너지를 바탕으로 움직인다. 크기는 높이 기준 24미터에 달한다.

무기는 고대 왕과 기사가 결투에 사용했다는 설정을 바탕으로 세이버(검)과 창(랜서) 등 물리적으로 충격을 주는 무기와 바인더라 불리는 방패를 사용한다. 총기류인 런처는 원거리 공격에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