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을 처음으로 검증한 역사적인 실험이 이뤄진 지 100년 만에 블랙홀의 비밀에 한발 더 다가가는 연구성과가 나왔다. 한 대학원생의 아이디어, 이를 수용한 전 세계 과학자들의 집단지성이 일궈낸 쾌거다.

200명 넘는 과학자가 참여한 ‘사건지평선망원경(EHT)’ 프로젝트 연구진은 최초로 초대질량 블랙홀을 관측한 영상을 지난 10일(현지시각) 공개했다.

중심의 검은 부분은 블랙홀(사건지평선)과 블랙홀을 포함하는 그림자이고, 고리의 빛나는 부분은 블랙홀의 중력에 의해 휘어진 빛이다. 관측자로 향하는 부분이 더 밝게 보인다. / EHT 제공
중심의 검은 부분은 블랙홀(사건지평선)과 블랙홀을 포함하는 그림자이고, 고리의 빛나는 부분은 블랙홀의 중력에 의해 휘어진 빛이다. 관측자로 향하는 부분이 더 밝게 보인다. / EHT 제공
사건지평선이란 블랙홀 안팎을 연결하는 경계지대를 뜻한다. EHT는 블랙홀 영상을 포착하려는 국제 협력 프로젝트이자, 전 지구에 걸친 전파망원경 8개를 연결한 거대 가상 망원경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들이 발표한 영상은 처녀자리 은하단 중앙에 위치한 거대은하 ‘M87’ 중심부에 있는 블랙홀을 보여준다. 이 블랙홀은 지구로부터 5500만광년 떨어져 있으며, 무게는 태양 질량의 65억배에 달한다.

◇ 전지구적 ‘가상 망원경'으로 상상 속 블랙홀을 눈에 담아내

블랙홀은 극단적으로 압축된 천체로, 매우 작은 공간 내에 엄청난 질량을 포함하고 있다. 지구 질량의 블랙홀을 가정하면 지름이 탁구공 절반보다도 작다. 이러한 천체는 존재 자체로 시공간을 휘게 하고, 인근에 있는 물질을 초고온으로 가열시키는 등 주변 환경에 극단적인 영향을 끼친다.

심지어 블랙홀 중심부의 강한 중력에는 빛조차 빨려들어간다. 블랙홀 중심과 거리가 있는 사건지평선 바깥을 지나는 빛은 그나마 휘어지는 정도다. 이러한 사실은 1915년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을 통해 예측했고, 1919년 에딩턴의 개기일식 관측으로 입증된 바 있다. 블랙홀의 존재 역시 우리은하 중심에 있는 궁수자리A를 통해 처음 증명됐다.

이렇듯 블랙홀은 빛까지 삼켜버리기 때문에 사실상 우리가 블랙홀은 눈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교과서나 논문에서 본 블랙홀 이미지는 모두 이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상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블랙홀 뒤편에 있는 밝은 천체나 블랙홀 주변에서 내뿜는 빛이 왜곡돼 블랙홀 주위를 휘감으면서 블랙홀의 윤곽을 볼 수 있게 된다. 이 윤곽을 ‘블랙홀의 그림자'라고 한다. 이번에 EHT가 공개한 영상에서도 블랙홀의 그림자를 확인할 수 있다.

EHT는 블랙홀 관측을 위해 6개 대륙 8개 전파망원경을 연결한 전지구적인 거대 가상 망원경을 만들었다. 수백~수천킬로미터(㎞) 떨어진 8개 전파망원경으로 동시에 같은 천체를 관측해 전파망원경 사이 거리에 해당하는 구경을 가진 가상의 망원경을 구현하는 방법이다.

8개 전파망원경이 각자 전파 신호를 포착하고, 이 신호를 한데 모아 가상 망원경 초점에서 종합하면 사실상 지구만한 크기의 전파망원경 효과를 낼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EHT는 프랑스 파리에서 미국 뉴욕에 있는 신문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수준의 높은 분해능을 자랑한다.

세계 각지에 흩어진 8개 전파망원경을 연결해 만든 거대 사건지평선망원경 개요. / EHT 제공
세계 각지에 흩어진 8개 전파망원경을 연결해 만든 거대 사건지평선망원경 개요. / EHT 제공
EHT를 구성하는 각 전파망원경은 하루에만 350테라바이트(TB)에 달하는 데이터를 생성한다. 이 데이터를 최종 영상으로 바꾸는 데 필요한 분석은 독일 막스플랑크 전파천문학연구소와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 헤이스택 관측소의 슈퍼컴퓨터를 활용했다. 놀라운 과학 연구의 배경에 최첨단 IT 기술이 있었던 셈이다.

연구진은 여러 번의 관측자료 보정과 영상화 작업을 통해 고리 형태 구조와 블랙홀의 그림자를 발견했다. 또 M87의 사건지평선이 400억㎞에 조금 못 미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블랙홀의 그림자 크기는 이보다 2.5배쯤 더 크다.

◇ 한 대학원생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집단지성으로 일궈낸 성과

EHT 구축과 이번 성과는 수십년간의 관측과 기술적·이론적 연구의 정점을 보여준다. EHT 국제 협력 연구는 전 세계 연구자들의 긴밀한 공동 작업을 요구했고, 13개 파트너 기관이 EHT를 만들기 위해 기존에 있던 기반 시설뿐 아니라 각국 정부 기관으로부터 지원을 받으며 함께 참여했다.

이 전지구적인 가상 망원경 프로젝트도 처음에는 한 대학원생의 아이디어에서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EHT 프로젝트에도 참가한 케이티 보우먼이 그 주인공이다.

케이티 보우먼. / 캘리포니아공과대학 제공
케이티 보우먼. / 캘리포니아공과대학 제공
보우먼은 3년 전 대학원생 시절, 지구로부터 수천만광년이나 떨어져 있고 촘촘하게 구성된 블랙홀과 블랙홀의 그림자를 관측하기 위해서는 지구 크기의 망원경이 필요하다는 가설을 처음 제시했다. 보우먼은 실제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EHT로 수집한 데이터를 이미지로 정제하는 과정에서도 큰 역할을 했다.

초대질량 블랙홀은 질량이 태양의 수십만배에서 수십억배에 이른다. 블랙홀의 그림자 크기는 그 질량에 비례하기 때문에 무거운 블랙홀일수록 그림자도 더 크다. M87의 블랙홀은 거대한 질량과 상대적으로 가까운 거리 덕분에 지구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큰 블랙홀의 그림자 중 하나로 예측됐고, EHT의 완벽한 관측 대상으로 낙점됐다.

보우먼은 CNN과의 인터뷰에서 "EHT 프로젝트는 어느 한 사람 힘으로 해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며 "많은 배경을 가진 여러 사람들이 참여한 덕분에 가능했다"고 술회했다.

한국에서는 한국천문연구원 소속 연구자 등 8명이 동아시아관측소 산하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망원경과 칠레 아타카마 밀리미터·서브밀리미터 전파간섭계의 협력 구성원으로서 EHT 프로젝트에 참가했다. 한국이 운영하고 있는 한국우주전파관측망과 동아시아우주전파관측망 관측 결과도 이번 연구에 활용됐다.

손봉원 한국천문연구원 박사는 "이번 결과는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 대한 궁극적인 증명이며, 그간 가정으로만 접근했던 블랙홀을 실제 관측해 연구하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한다"며 "향후 EHT의 관측에 한국의 기여도는 더욱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EHT 프로젝트 총괄 단장인 쉐퍼드 도엘레만 하버드 스미스소니안 천체물리센터 박사도 "우리는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불가능하리라 여겨졌던 일을 이뤄냈다"며 "인류에게 최초로 블랙홀의 모습을 보여준 이번 결과는 천문학 역사상 매우 중요한 발견이며, 200명 넘는 과학자들의 협력으로 이뤄진 이례적인 과학적인 성과"라고 이번 연구의 의의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