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원의 오덕이야기] (66) 세계관 리셋으로 99% 팬 잘라낸 SF만화 '파이브 스타 스토리즈'

입력 2019.04.13 07:00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오덕'(Otaku)은 해당 분야를 잘 아는 '마니아'를 뜻함과 동시에 팬덤 등 열정을 상징하는 말로도 통합니다. IT조선은 2018년 시작과 함께 애니메이션・만화・영화・게임 등 오덕 문화로 상징되는 '팝컬처(Pop Culture)' 콘텐츠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합니다. 어린시절 열광했던 인기 콘텐츠부터 최신 팝컬처 분야 핫이슈까지 폭넓게 다루머 오덕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 줄 예정입니다.

SF 만화 ‘파이브 스타 스토리즈(The Five Star Stories·이하 FSS)’는 거대 로봇 ‘모터헤드(MH)’와 이를 컨트롤하는 여성형 인조인간 ‘파티마'와 기사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만화는 4개의 태양계로 나눠 거주한 인류가 결정한 ‘성단력(星団歴)’ 원년(元年)을 기점으로 1만8097년, 성단력 이전 AD시대를 포함해 2만8000년에 육박하는 장대한 서사시를 그렸다.

파이브 스타 스토리즈 일러스트. / 야후재팬 갈무리
만화 FSS는 애니메이터로 활동하던 나가노 마모루(永野護)가 1986년 애니메이션 잡지 ‘뉴타입'을 통해 선보인 작품이다.

나가노는 1984년작 TV 애니메이션 ‘중전기 엘가임(重戦機エルガイム)’을 통해 FSS의 토대를 만들었다.

FSS 기획이 시작된 것은 출판사 카도카와를 통해 출간된 ‘중전기 엘가임' 설정집부터다. 나가노는 엘가임 제작 당시 구상한 세계관과 문화, 메카닉 설정을 바탕으로 만화 FSS를 구상한다.

카도카와는 일본 현지에서 엘가임 방송이 끝난 1985년 봄부터 나가노와 함께 만화 FSS를 준비한다. 나가노는 학생 시절 동인지(同人誌)를 통해 아마추어 만화가로 활동한 경력이 있지만, 애니메이션 제작 일을 하면서 만화가 감각을 잃은 상태였다. 카도카와는 조금씩 FSS를 연재하는 형태로 나가노에게 만화를 그리게 했다.

나가노는 FSS 연재 이전 ‘풀 포 더 시티(FOOL for THE CITY)’라는 락 음악을 소재로 한 만화를 애니메이션 잡지 뉴타입에 연재했다. 카도카와는 만화 연재가 마무리 된 1986년 4월 ‘파이브 스타 스토리즈'를 공개한다.

파티마 ‘라키시스'. / 야후재팬 갈무리
나가노는 엘가임 제작 과정에서 탄생한 세계관과 로봇 메카닉, 파티마 등의 아이디어를 만화 FSS에 융합한다. 나가노의 손을 거쳐 엘가임 대비 더 섬세한 디자인을 갖춘 FSS의 로봇 모터헤드는 절세미녀의 모습으로 그려진 파티마와 함께 SF 만화 팬들의 눈길을 끌기 충분했다.

극장판 FSS 마지막 장면을 담은 일러스트, 모터헤드 ‘나이트 오브 골드' 앞에서 아마테라스(소프)와 파티마 라키시스가 키스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 야후재팬 갈무리
만화 FSS는 단행본 기준 850만부가 판매되는 등 인기를 끌었다. 1986년부터 서서히 대중 인지도를 높여온 FSS는 1989년 극장용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다.
1989년작 극장 애니메이션 ‘파이브 스타 스토리즈' 영상. / 유튜브 제공
FSS 애니메이션은 만화책 1화를 토대로 A.K.D의 왕족이자 주인공 ‘아마테라스 미카도(레디오스 소프)’와 여주인공인 파티마 ‘라키시스'의 이야기를 담았다. 영화 말미에 등장하는 모터헤드 ‘나이트 오브 골드'는 아직도 많은 로봇 마니아의 입에 오르내릴만큼 인기가 높다.

◇ FSS 세계관 리셋으로 99.9% 팬 잘라낸 나가노

전 세계 로봇 마니아와 SF팬의 시선을 사로 잡은 FSS에 이변이 발생한다. 2013년 작가 나가노 마모루가 FSS 세계관 설정과 모터헤드 로봇 이름과 디자인을 확 바꾼 것이다.

FSS 세계관 ‘리셋’ 정황은 2006년 드러났다. 나가노는 뉴타입 잡지 2006년 5월호를 통해 ‘꽃의 시녀(詩女·우타메) 고딕메이드’ 제작을 발표했으며, 2012년 11월 70분 분량의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형식으로 공개됐다.
꽃의 시녀 고딕메이드 극장 애니메이션 소개 영상. / 유튜브 제공
거대로봇과 소년, 소녀의 이야기를 담은 고딕메이드는 FSS와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는 스핀오프 작품으로 소개됐다. 하지만, 외전으로 소개된 이 작품의 설정과 로봇 명칭·디자인이 그대로 2013년 5월, 9년만에 다시 연재된 FSS에 적용됐다.

리셋된 FSS 세계관 속 거대 로봇 모터헤드는 ‘고딕메이드'로 이름이 바뀌었다. 중세 기사처럼 두터운 장갑으로 무장됐던 로봇 디자인은 전혀 다른 골격에 약간의 장갑을 더한 듯한 모습으로 환골탈태했다. 인기가 높았던 모터헤드 ‘레드 미라쥬'와 ‘나이트 오브 골드'도 본래의 형태를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디자인이 대폭 바뀌었다.

FSS 세계관 리셋 이전 ‘레드 미라쥬' 모터헤드. / 웨이브 제공
FSS 세계관 리셋 이후 ‘레드 미라쥬(짜라투스트라 아프타 브링어)' 고딕메이드. / 야후재팬 갈무리
FSS의 큰 변화에 기존 만화 팬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팬들의 반발을 예측했던 나가노는 2012년 고딕메이드 관련 인터뷰를 통해 "FSS 팬 99.9%를 버린다"고 자신의 생각을 밝히기도 했다.

나가노는 FSS의 세계관 설정과 로봇 디자인을 변경한 구체적인 이유에 대해 아직 입을 열지 않았다. FSS 팬은 ‘엘가임과 FSS간의 저작권 문제'가 있을 것으로 추측했지만, 최근에는 모터헤드 메카닉 구조에 결함이 있어 나가노가 이를 세계관과 함께 변경했다는 논리가 힘을 받고 있다.

나가노는 뉴타입 1986년 9월호 인터뷰를 통해 "FSS는 엘가임의 꼬리가 아니다"라며 FSS가 엘가임에서 파생된 작품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FSS 팬들은 나가노의 이런 발언을 토대로 나가노가 FSS에서 엘가임의 그림자를 지웠다고 추측했다. 실제로 ‘모터헤드'에서 ‘고딕메이드'로 바뀐 로봇 모양에서는 엘가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FSS에서 모터헤드가 사라졌지만 FSS의 간판 캐릭터라고 할 수 있는 ‘파티마'는 살아남았다.

파티마 ‘마치'. / 트위터 갈무리
나가노는 1983년작 엘가임 제작 당시 헤비메탈 로봇 머리 부분에 유기연산 컴퓨터인 인조인간 ‘파티마’를 탑승시키는 설정을 토미노 감독에게 제안했다. 하지만, 토미노는 기계와 인간을 융합하는 것은 시청자에게 혼란을 준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제작 단계에서 나온 아이디어지만 실제 작품에는 반영되지 않은 셈이다.

모터헤드 메카닉 구조에 결함이 있어 FSS가 리셋됐다는 주장은 뉴타입과 하비재팬 잡지에 실린 나가노의 발언을 토대로 한 것이다.

나가노는 2006년 뉴타입 인터뷰를 통해 "고딕메이드 로봇은 일본 기업이 실제로 제작한 로봇 디자인에 환멸을 느껴 제작했으며, 2003년쯤 초기 디자인을 완성했다"고 밝혔다.

하비재팬 2013년 1월호 인터뷰에서 나가노는 "높이 30미터가 넘는 로봇이 빨리 움직이기 위해서는 25년전 만든 모터헤드와 모빌슈트 관절로는 불가능하다"며 "거대로봇에 레일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FSS 고딕메이드 ‘카이제린'(엠프레스) 100분의 1스케일 모형. / 보크스 제공
리셋된 FSS에 등장하는 거대 로봇 ‘고딕메이드'는 하나가 아닌 두 개의 척추 골격(라이온 프레임)과 길이가 긴 목, ‘트윈스윙'이라 이름 붙은 관절, 동체 대비 큰 손발 구조를 가진 것이 특징이다.

나가노는 자신이 디자인한 고딕메이드와 같은 골격과 관절이 아니면 거대 로봇이 움직일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일본 현지 만화 팬들은 나가노가 FSS 세계관 리셋 이후 로봇의 이름을 모터헤드에서 고딕메이드로 바꾼 것이 기존 FSS 팬들에 대한 배려라고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이름을 달리하는 것으로 기존 모터헤드 팬들의 마음의 상처를 줄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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