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회사는 부문(Division)이 다르면, 다른 회사보다 장벽이 높아요. 차라리 다른 회사라고 생각하는 게 편합니다."

국내 최대 통신회사의 한 고위 간부는 2000년대 초반 "경쟁사와 싸우기 위해 내부의 힘을 모으려고 해도, 부문 간 장벽때문에 각자 도생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기업 내부 부서가 서로 담을 쌓고 정보를 공유하지 않고, 내부 권력 싸움을 하는 현상을 사일로(Silo)현상이라고 한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전 세계 모든 기업이 공통으로 사일로 문화를 갖고 있다. 삼성전자의 경우 무선사업부, 반도체 사업부, 가전 사업부가 내부에 각자 소왕국을 구축하고 내부에서 치열하게 싸운다. 애니콜 신화의 주역인 이기태 전 삼성전자 무선부문 사장 시절에 무선 사업부는 삼성 안에서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소왕국이었다.

대부분 회사는 밖에서 보면 한 회사 같지만, 내부는 여러 개 사일로가 독립된 형태로 작동한다.
대부분 회사는 밖에서 보면 한 회사 같지만, 내부는 여러 개 사일로가 독립된 형태로 작동한다.
사일로 조직과 칸막이 문화는 디지털 시대에 꼭 바꿔야 할 혁신의 대상이다. 기업의 리더는 사일로 조직이 빛의 속도로 변화하는 디지털 시대에 ‘측정하고 반응하는 기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잘 알기 때문이다.

첫째, 사일로 조직은 같은 일을 중복해서 하면서 회사의 돈과 시간 자원을 낭비한다. SK그룹의 경우 여러 곳에서 비슷한 사업을 추진하면서 모두 실패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으로 디지털 음원 사업이다. 누구보다 먼저 디지털 음원 사업(멜론)에 뛰어들었으면서도 멜론을 매각한 뒤, 아직 제대로 된 음원 플랫폼을 못 갖고 있다.

둘째, 사일로 조직은 사내 권력 싸움을 한다. 다른 부서가 잘 나가면 축하해주지 않고 배 아파하면서 시기와 질투를 일삼는다. 심지어 잘 나가는 부서가 사고치기를 바라기도 한다. 또 사고가 터지면 책임 전가에 골몰한다. 또 사일로 조직은 사내 정치의 온상이다. 라인이나 하는 파벌을 만들어 승진과 보직 싸움의 중심 역할을 한다.

셋째, 사일로 조직은 회색지대 문제는 애써 외면하려고 한다. 그래서 전사적 문제 포착 능력이 떨어진다. 누구라도 댐의 작은 구멍을 발견하면, 즉시 전 회사에 알려 조기경보를 해야 한다. 하지만 사일로 조직에서는 일단 작은 구멍이 누구 일인지, 누구 책임인지를 살피면서 자기 일이 아니면 말하지 않는다.

사일로 조직의 이런 특성은 기업 리더가 원하는 애자일 협업과 창의 경영을 불가능하도록 작동한다. 사일로 조직과 문화가 살아 있는 한, 협업과 창의 경영을 위한 제도와 플랫폼을 도입해도 그런 것들을 껍데기로 만들어 버린다.

사일로 조직을 어떻게 부수고 새로운 수평 조직을 만들 것인가?

가장 극단적이며 근본적인 혁신 방법으로 홀라크라시(Holacracy)가 있다. 브라이언 로버트슨이 고안하고, 자포스 CEO 토니 셰이가 도입해 실험하고 있는 경영 시스템이다. 홀라크라시는 중간 관리자를 완전히 없애고, 모든 구성원에게 고유 역할을 부여하고, 서클이라는 협의체를 통해 공통 과제를 해결하는 방식이다.

실리콘 밸리 유명 벤처캐피털리스트인 존 도어는 인텔 시절에 앤디 그로브 회장에서 배운 ‘OKR(Objective Key Result)’을 사일로 조직의 폐해를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확신한다. 그는 구글, 아마존 등 자신이 투자한 IT 회사에 OKR을 접목해 큰 성과를 거뒀다. OKR은 말단 사원부터 CEO까지 목표를 정의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는데 필요한 핵심 결과를 구체적으로 설정하도록 하는 방안이다.

OKR은 애자일 방식의 하나인 스크럼 방식에서 핵심으로 사용된다. 아마존의 경우 매일 10분 정도 스크럼 보드앞에 모여서 OKR에 따라 각자 그날 할 일, 전날 일의 결과물 등을 포스트잇으로 공유하게 한다. 모두 자신의 일 처리 과정을 투명하게 공유함으로써, 칸막이를 없애는 효과를 얻는 것이다.

카카오는 직책이나 직급 호칭 없이 영어 이름으로 부르는 기업 문화를 도입했다. 이런 방식은 나이와 경력 서열을 중시하는 유교 문화에서 탈피해 누구나 의견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사일로는 기업의 성장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뿌리를 내린 것이다. 그 폐해가 심각해도 리더의 의지만으로 쉽게 없애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 애자일 협업을 작동시키려면 사일로 조직을 부수는 방법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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