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흔히 말하는 '오덕'(Otaku)은 해당 분야를 잘 아는 '마니아'를 뜻함과 동시에 팬덤 등 열정을 상징하는 말로도 통합니다. IT조선은 2018년 시작과 함께 애니메이션・만화・영화・게임 등 오덕 문화로 상징되는 '팝컬처(Pop Culture)' 콘텐츠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합니다. 어린시절 열광했던 인기 콘텐츠부터 최신 팝컬처 분야 핫이슈까지 폭넓게 다루머 오덕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 줄 예정입니다.

1982년 일본서 방영된 로봇 애니메이션 ‘전투메카 자붕글(戦闘メカ ザブングル·Xabungle)’은 국내에서 김청기 감독이 공개한 ‘슈퍼 태권브이’가 디자인을 도용했던 작품으로 유명하다.

슈퍼태권브이 디자인은 원본 로봇인 자붕글과 비교해 머리와 가슴의 V자를 제외하면 거의 같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전투메카 자붕글 일러스트. / 선라이즈 제공
전투메카 자붕글 일러스트. / 선라이즈 제공
자붕글은 1979년작 ‘기동전사 건담'으로 로봇 애니메이션에 혁명을 일으켰다고 평가받는 토미노 요시유키(富野由悠季) 감독이 제작한 작품이며, 애니메이션 제작사 선라이즈(1982년 당시 일본선라이즈)의 창립 10주년 기념 작품이기도 하다.

자붕글이 기획됐던 1981년 일본은 선라이즈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기동전사 건담'의 폭발적인 인기로 건담 프라모델 등 모형 상품이 불티나게 팔리던 상황이었다.

일본 매체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건담 프라모델 붐이 일었던 1981년 장난감 전문 기업 반다이(현재 반다이스피리츠)는 50종이 넘는 건담 프라모델 상품을 선보였으며, 1984년에는 일본 국내에서만 건담 프라모델 누적 판매 수가 1억개를 넘어섰다.

건담을 필두로 한 리얼로봇 애니메이션은 한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1980년대 당시 애니메이션 주요 시청자였던 어린이들에게는 내용이 너무 어려웠던 것이다.

선라이즈는 리얼로봇을 표방하면서도 어린이 시청자를 흡수할 수 있는 로봇 작품을 기획하게 되며, 그 결과가 바로 ‘전투메카 자붕글'로 나타났다.

자붕글 일러스트. / 야후재팬 갈무리
자붕글 일러스트. / 야후재팬 갈무리
자붕글은 ‘미국 서부극'을 연상시키는 무대를 배경으로 가솔린 엔진으로 움직이며, 핸들·엑셀·브레이크로 마치 자동차처럼 조종할 수 있는 대형 로봇 ‘워커 머신'이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으로 완성된다.

리얼로봇이지만 액션은 슈퍼로봇처럼 화려하게 만들었다. 주인공도 어린이 만화 등장인물처럼 얼굴이 동그랬다. 내용도 어린이가 웃으면서 볼 수 있게 코미컬한 연출이 많다.

자붕글 명장면 ‘ICBM 미사일' 받아내기. / 야후재팬 갈무리
자붕글 명장면 ‘ICBM 미사일' 받아내기. / 야후재팬 갈무리
자붕글 애니메이션에는 우주에서 떨어지는 ICBM 미사일을 워커 머신이 받아내는 장면이 그려진다. 이는 사실성을 추구하는 리얼로봇에서는 그야말로 ‘말도 안되는 설정'이며, 화려한 액션을 추구하는 열혈로봇 애니메이션에서나 볼 수있는 장면이다.

◇ ‘몰살의 토미노’ 별명 없애기 위해 주요 캐릭터 사망 없앤 자붕글

토미노 감독은 ‘몰살의 토미노(皆殺しの富野)' 별명을 의식한 듯 자붕글에서는 등장인물이 거의 죽지 않는 시나리오를 선택한다.

토미노 감독은 1977년작 ‘무적초인 점보트3’에서 당시 애니메이션 업계에 만연한 ‘해피엔딩' 관행을 깨뜨리기 위해 외계인이 인간을 폭탄으로 만들어 인류를 몰살하고, 주인공을 제외한 대부분의 등장인물을 가차 없이 죽여버리는 등 충격적인 결말을 그렸다.

무적초인 점보트3 블루레이 패키지 일러스트. / 아마존재팬 갈무리
무적초인 점보트3 블루레이 패키지 일러스트. / 아마존재팬 갈무리
점보트가 당시 어린이를 위해 만든 애니메이션이란 점을 고려하면 과격한 결말이라 평가할 수 있다.

토미노 감독은 한술 더 떠 1980년작 ‘전설거신 이데온'에서는 인류를 멸망시키는 대규모 학살을 연출한 바 있다.

등장인물이 (거의)죽지 않는 자붕글 애니메이션을 살펴보면 반경 1킬로미터 범위 내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죽일 수 있는 탄도미사일을 맞아도 로봇만 망가질뿐 내부 탑승자는 멀쩡하다.

토미노 감독이 자붕글에서 등장인물을 죽이지 않은 까닭은 어린이 시청자를 끌어들여 장난감 매출을 끌어 올리기 위함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에 따르면 토미노 감독이 등장인물 대부분을 죽이고 잔혹한 장면을 집어넣었던 ‘점보트’와 ‘이데온'은 성인과 청년층의 눈길은 끌었지만, 정작 애니메이션 제작비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장난감 매출은 추락시키는 결과를 불러왔다.

주연 캐릭터가 죽지 않고, 적 캐릭터도 마냥 미워하기 힘든 개그 만화 같은 작품 구성은 1983년작 ‘은하표류 바이팜(銀河漂流バイファム)’과 제타건담의 후속작인 ‘더블제타(ZZ) 건담'에서도 사용된다.

◇ 미야자키 감독작 ‘미래소년 코난’, ‘루팡3세' 구성 모방한 자붕글

자붕글은 ‘미래소년 코난'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

1999년 출간된 토미노 감독 인터뷰집에 따르면 토미노는 "자붕글을 제작할 때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작인 코난을 모방하는 것부터 시작했다"고 밝힌 바 있다. 자붕글 로망 앨범에서 토미노는 "애니메이션 제작진에게 미야자키 감독의 ‘루팡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 모방할 것을 지시했다"고 밝혔다.

자붕글 일러스트. / 야후재팬 갈무리
자붕글 일러스트. / 야후재팬 갈무리
자붕글 로봇 디자인에 참가했던 ‘이즈부치 유타카(出渕裕)’는 "토미노 감독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에 대한 동경심을 품고 있었다"고 단바인 설정 자료집에서 전한 바 있으며, 토미노 감독 자신도 ‘건담 G의 레콘기스타' 인터뷰를 통해 "나는 미야자키 하야오 같은 천재와는 상대가 안됐다"고 말했다.

◇ 日로봇 애니 최초로 이야기 도중 ‘주인공 로봇 교체극’ 그려낸 자붕글

전투메카 자붕글은 일본 로봇 애니메이션 역사상 이야기 도중에 주역 로봇이 교체되는 첫 번째 작품이기도 하다.

자붕글과 워커 개리어. / 야후재팬 갈무리
자붕글과 워커 개리어. / 야후재팬 갈무리
애니메이션에서는 주역 로봇이라 할 수 있는 자붕글이 파괴되고, 주인공 ‘지론'이 자붕글과 전혀 다른 ‘워커 개리어(Walker Gallia)'로 갈아타는 장면이 그려진다.

마징가Z의 경우 후속작 ‘그레이트 마징가'를 위해 이야기 마지막 부분에 다른 로봇을 등장시켰다. 하지만 자붕글은 애니메이션 중반에 자붕글을 버리고 새로운 주인공 로봇을 내세웠다.

주역 로봇이 바뀐 까닭은 자붕글 애니메이션이 우주극에서 서부극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우주극을 배경으로 디자인 된 자붕글 로봇이 서부극에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기체라는 것이다. 참고로, 자붕글 애니메이션은 기획 당시 토미노가 아닌 다른 감독이 제작할 예정이었다. 감독이 바뀌면서 애니메이션 무대와 설정도 변경된 셈이다.

하이메탈R 워커 개리어 액션 피규어. / 반다이스피리츠 제공
하이메탈R 워커 개리어 액션 피규어. / 반다이스피리츠 제공
1982년 출간된 토이저널에 따르면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2대의 자붕글은 서로 합체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자붕글에서 워커 개리어로 주역 로봇이 바뀌는 교체극에 따라 합체되는 자붕글 대신 변신·합체 기능을 갖춘 워커 개리어가 애니메이션 스폰서이자 장난감 제조사인 ‘클로버'를 통해 장난감으로 만들어졌다.

일본 장난감 업계에 따르면 첫 번째 주역 로봇인 자붕글과 달리, 클로버에서 출시된 워커 개리어 장난감은 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