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량용 시스템 반도체’가 업계의 새로운 먹거리로 떠올랐다. 자동차가 첨단 기술 도입과 함께 ‘달리는 컴퓨터’로 진화함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반도체 수요가 뒤따르고 있다.

특히 전통적인 내연엔진 자동차 시장에 전기차와 수소차 같은 신 재생에너지 차, 자율주행차와 같은 새로운 종류와 개념의 자동차가 등장하면서 차량용 시스템 반도체 시장은 급격히 성장중이다. 메모리 의존도가 높던 국내 반도체 기업들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중심으로 차량용 시스템 반도체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당장 따라잡기보다는 중장기적인 전략으로 관련 산업을 확실하게 육성한다는 전략이다.

삼성전자의 차량용 반도체 ‘엑시노스 오토’. / 삼성전자 제공
삼성전자의 차량용 반도체 ‘엑시노스 오토’. / 삼성전자 제공
◇자동차 산업과 함께 성장해온 글로벌 차량용 반도체 시장

일반 자동차 한 대에는 ▲엔진, 트랜스미션 등을 제어하는 전기제어장치(ECU) ▲각종 전자장비를 조작하는 전자제어장치 ▲온도나 습도 등 차량 내/외부의 정보를 수집하는 각종 센서 등을 중심으로 수백 종의 반도체가 탑재된다.

여기에 자율주행차, 사물인터넷(IoT), 인공지능(AI) 등의 기술이 접목되면서 차량에 탑재되는 반도체의 수는 한 대당 수 천여개 수준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시장 규모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IHS에 따르면 2017년 340억달러(약 40조2600억원) 규모였던 차량용 반도체 시장은 오는 2022년까지 약 553억달러(약 65조5000억원) 규모로 성장할 전망이다.

이러한 차량용 반도체 시장은 자동차 산업 역사가 깊은 유럽과 미국, 일본을 중심으로 꾸준히 성장해왔다. 네덜란드의 NXP, 독일의 인피니온(Infineon), 미국의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 일본의 르네사스 일렉트로닉스(Renesas Electronics) 등이 대표적인 차량용 반도체 제조사다.

최근에는 인텔, 퀄컴, 엔비디아 등 실리콘밸리에 기반을 둔 비메모리 반도체 전문기업들이 새롭게 뛰어들어 판을 더욱 키우고 있다. 이들은 자율주행용 AI 시스템과 영상·사물을 인식 및 분석하는 비전(vision) 컴퓨팅 시스템, 사물인터넷(IoT)과 4G 및 5G 통신 기술에 기반을 둔 차량용 중·근거리 데이터 통신 솔루션 등을 중심으로 차량용 시스템 반도체의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오랜 세월 축적된 자동차 산업 노하우를 바탕에 둔 글로벌 기업들의 차량용 반도체 사업은 구조가 탄탄하다. 최근에는 경쟁력 향상과 포트폴리오 확대를 위해 인수합병(M&A)에 막대한 비용을 쏟아붓고 있다. 지난 2017년 인텔이 이스라엘 자율주행차 기술 기업 모빌아이(Mobileye)를 153억달러(17조5720억원)에 인수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는 당시 자율주행차 관련 최대 규모의 인수합병으로 꼽힌다.

르네사스의 인터실 인수, 아날로그디바이스의 리니어테크놀로지 인수 등도 대표적인 사례다. 모바일 AP 및 통신 부문반도체 전문기업인 퀄컴도 NXP 인수를 추진을 시도하다 무산된 사례도 있다. 이달 초에는 네트워크 및 메모리 컨트롤러 전문기업인 마벨(Marvell)이 동종 기업 어퀀시아(Aquantia)를 4억5200만 달러(약 5367억5000만원)에 인수했다. 업계에서는 어퀀시아가 보유한 차량용 반도체 포트폴리오 확보를 이번 인수합병의 이유로 본다.

인텔과 모빌아이이의 자율주행 테스트 차량 모습. / 인텔 제공
인텔과 모빌아이이의 자율주행 테스트 차량 모습. / 인텔 제공
◇‘탈 메모리’ 외치는 국내 반도체 업계…차량용은 아직 ‘걸음마’

D램(DRAM)과 낸드 플래시 등 메모리 반도체 중심으로 성장해온 국내 반도체 기업들도 이러한 차량용 반도체 시장의 가치를 내다보고 투자자 및 연구개발 비중을 늘리고 있다. 가장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는 곳은 삼성전자다. 모바일용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와 카메라용 이미지 센서를 자체 개발한 경험을 바탕으로 지난해 10월 차량용 프로세서 ‘엑시노스 오토(Exynos Auto)’와 차량용 이미지센터 ‘아이소셀 오토(ISOCELL Auto)’를 각각 선보였다.

그 중 ‘엑시노스 오토 V9’이 출시 3개월만인 지난 1월 세계적인 자동차 브랜드 아우디의 차량용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에 채택되는 등 성과를 내고 있다. 13일에는 글로벌 시험·인증기관인 독일의 ‘TUV 라인란드’로부터 자동차 기능안전 국제 표준인 ‘ISO 26262 기능안전관리(FSM, Functional Safety Management)’ 인증을 획득하며 안정성도 검증을 받았다.

엑시노스 오토는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용 V 시리즈 외에 ▲첨단운전자보조시스템(ADAS)용 A 시리즈 ▲텔레매틱스 시스템용 T 시리즈 등으로 구성된다. 삼성전자는 완성차 제조사의 수요에 따라 다양한 차량용 프로세서를 지속해서 선보인다는 계획이다. 최근 공개한 시스템 반도체 장기 육성 전략 ‘반도체 비전 2030’에서도 차량용 반도체는 당당히 핵심 분야에 포함되어 있다. 지난 2016년 인수한 미국의 차량용 전장 전문 기업 하만(HARMAN)과도 연계해 시장 점유율을 늘려나갈 것으로 보인다.

SK하이닉스도 차량용 반도체 분야에서 속도를 높이고 있다. 이미 다양한 차량용 시스템 메모리 제품을 개발해 납품하고 있는 SK하이닉스는 2016년 말부터 차량용 반도체 전담팀 꾸리고 본격적인 비 메모리 시스템 반도체 개발에 힘을 쏟고 있다.

특히 차량용 시스템 반도체의 개발과 기술 및 경험 획득을 위해 자동차 분야와 연결된 SK그룹 내 다른 계열사와와의 연계를 확대하고 있다. 인텔과 아우디 등 충분한 경험과 기술력을 갖춘 글로벌 IT 및 자동차 기업과의 협력도 강화하고 있다. 지난 3월 중국의 차량용 AI 반도체 전문기업 호라이즌로보틱스에는 6억 달러(약 6800억 원)의 투자를 결정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SK하이닉스는 추후 자율주행차용 GPU와 AI 연산에 최적화된 신경망처리장치(NPU) 등을 자체적으로 개발한다는 전략이다.

차량용 반도체는 다른 반도체와 달리 ‘신뢰성’과 ‘안정성’이 매우 중요하다. 고속으로 운행하는 자동차에서 제품의 결함은 큰 사고와 인명피해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만큼 단기간에 성과를 보기가 쉽지 않다. 장기간 축적된 노하우도 중요하다. ‘탈 메모리’를 외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단기전략보다는 10년 단위의 중장기적인 전략을 세운 것도 꾸준한 투자와 노하우 축적을 통한 ‘신뢰성 확보’를 우선한 것으로 풀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