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을 보험업에 적용하려면 P2P(Peer to Peer, 개인간) 보험을 활성화해야 할 듯한데, 그러면 보험회사는 없어져야 하는 건가요?"

필자가 최근 생명보험사에서 강의하다 받은 질문이다. 이 질문은 최근 한국 핀테크·블록체인 산업 전반에서 일어난 오류를 매우 잘 보여준 사례다. 무슨 오류일까? 좀 더 알기 쉬운 예시를 들어보자.

여름이면 으레 더워진다. 시원한 얼음을 만드는 얼음정수기 생각이 절로 난다. 최근 출시된 얼음정수기는 혁신적인 기능까지 가졌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은 날이 그리 덥지 않아 굳이 얼음정수기를 살 필요가 없다고 느낀다.

자 그런데, 누군가 ‘지금은 얼음정수기 기술이 충분하지 않아 얼음을 잘 못만든다. 하지만, 앞으로 얼음정수기 산업이 중요해질 것이기 때문에 대승적인 차원에서 제품을 사서 미래 한국의 먹거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면, 과연 얼음정수기를 사야 할까?

또는 날씨가 추워 딱히 얼음정수기가 필요하지 않은 늦가을, 누군가 ‘혁신적인 기술로 만든 얼음정수기가 나왔는데 정수기에 연결할 수도꼭지가 하나밖에 없다. 따라서 기존 제품을 버리고 새 혁신 얼음정수기를 사야 한다’고 이야기한다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우리가 얼음정수기를 사는 이유는 ‘새롭고 혁신적인 얼음정수기가 출시됐기 때문’이 아니라 ‘날씨가 더워져 얼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위 예시가 현재 한국 핀테크·블록체인 산업계의 주장과 같다고 생각한다.

한국 핀테크·블록체인 산업계는 늘 "우리가 혁신적이라고 생각되는 기술이 있는데, 이 기술은 미래 먹거리가 될 것이다. 따라서 아직 기술이 준비되지는 않았지만, 이 기술로 만든 제품을 사서 산업을 키워야 한다. 이 기술을 위해 규제도 없애고 기존 산업 전반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필자가 참석한 수많은 핀테크 및 블록체인 회의에서도 마찬가지 주장이 나온다. 블록체인을 적용하기 위해 규제를 풀고, 중앙청산소를 없애고 정보를 공유해야 한다는 주장이 당연하다는 듯 나온다.

지금 필자는 블록체인 기술이 혁신적인지, 정말 미래 먹거리가 될 것인지를 다루려는 것이 아니다. 블록체인 기술이 앞으로 성공할지 아닐지는 필자를 포함한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물론 업계에는 블록체인이 반드시 성공한다는 확신에 찬 예언자들이 많다. 하지만, 필자는 아니다.

필자가 꼭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블록체인의 필요성’이다. 아무리 혁신적인 기술이라도 지금 필요 없으면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 반대로 아무리 후진적인 기술이라도 지금 필요하면 적용해야 한다.

따라서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려면, 최소한 ‘왜 블록체인 기술이 이 산업 또는 이 분야에 적용되어야 하는지’, 즉 ‘왜 필요한지’를 먼저 검증해야 한다.

필요성 검증. 매우 상식적인 이야기인데, 너무나도 많은 이들이 검증 없이 ‘블록체인 기술은 일단 적용부터 돼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논의하는 모습을 보며 자주 놀란다.

참고로, 앞서 생명보험사 강의 중 받은 질문에 대한 필자의 대답은 이렇다.

"보험회사(중개자)가 중개하는 보험의 사회적 순이익(이익에서 손해를 뺀 값)이 블록체인이 중개하는 P2P 보험의 사회적 순이익보다 작을 때는 블록체인 도입을 검토해야겠지요. 하지만,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하기 위해 P2P 보험을 활성화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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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훈 교수(PhD, CFA, FRM)는 홍익대 경영대 재무전공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학계에 오기 전 대학자산운용펀드, 투자은행, 중앙은행 등에 근무하며 금융 실무경력을 쌓았습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학 박사를 마치고 자본시장연구원과 시드니공과대(University of Technology, Sydney) 경영대에서 근무했습니다.

주 연구분야는 자산운용, 위험관리, 대체투자입니다. 현재는 중소기업 분석 전문 우베멘토의 리서치 자문과 금융위원회 테크자문단을 포함해 현업 및 정책적으로 다양한 자문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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