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무역 분쟁 중인 미국과 중국 중 누구 편에 서기 애매한 상황이다. 정치·경제적 실리를 고려할 때 어느 한 쪽이 절대적인 우위에 있다 말하기 어려워 위험한 줄타기를 이어갈 수밖에 없는 처지다. 일각에서는 정부의 선택 여부에 따라 미국의 관세 폭탄을 받거나 혹은 중국발 제2의 사드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 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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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매체들은 연일 비공식적인 채널을 통해 미국 정부가 한국을 압박하고 있다고 보도한다. 출처가 공개되지 않은 외교라인 관계자가 해당 언론에 관련 정보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 고위 관계자는 외교 문서를 통한 공식적인 협조 요청은 없었다는 입장이다. 정부 내부에서 공유된 지시도 아직 없다. 세계 2강인 미·중간 무역 마찰로 인한 영향은 주변국에 치명적일 수 있는데, 출처 불명의 ‘트럼프 대통령의 의중이다’라는 둥 넘겨잡기식 분위기 조장은 문제가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 "미국 주장 ‘보안 이슈’는 개연성 있지만 증거는 없어"

27일 정부부처 고위 관계자는 "글로벌 시장은 국가간 경계없이 모두가 참여하는 공간이다"며 "어느 한 기업을 시장에서 퇴출시키려 한다면 협정 등 국가간 공식적인 커뮤니케이션 라인이 가동돼야 할텐데, 관련 정보에 대해 들은 바는 없다"라고 말했다.

또 "화웨이는 통신장비는 물론 일반 스마트 기기 등 다양한 제품을 유통하는 회사다"라며 "한국 정부가 화웨이와 관련한 제재를 하려면 당연히 범정부 차원의 논의가 있어야 하는데, BH(청와대) 등에서 내려온 지시는 없다"라고 덧붙였다.

미국은 중국과의 무역 분쟁 이슈에 키를 쥐기 위해 2018년 ZTE를 먼저 공략했고, 후속으로 화웨이 카드를 빼들었다. IT 분야 핵심 기업에 타격을 줌으로써 양국간 무역 분쟁에서 우위에 설 수 있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화웨이 퇴출을 추진하는 미국이 제시한 카드는 ‘보안’ 문제다. 미국은 수년째 화웨이가 네트워크 장비를 통해 수집한 정보를 중국 정부로 전달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이것이 제대로 먹혀들지 않자 화웨이가 판매하는 소비재 제품 시장을 직접 겨냥했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등 제품 생산과 유지 보수에 필요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기업과 화웨이 간 거래를 차단해버린 것이다. 구글이 안드로이드를 공급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나 퀄컴 등 반도체 기업이 납품을 중단하겠다고 한 것 등이다.

보안업계 한 관계자는 "일반적으로 미국이 얘기하는 화웨이 보안 이슈와 관련해 치명적인 문제는 미국 정부가 명확한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 정황 증거 이른바 ‘언노운’ 증거 밖에 없다는 점이다"라며 "으레 중국 기업은 정부의 통제하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보안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얘기하지만,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 제2의 사드 사태 우려

한국 정부는 무턱대고 미국의 요구대로 무턱대고 화웨이 퇴출에 나설 경우 발생할 수 문제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화웨이가 3월 29일 발표한 연간보고서를 보면, 2018년 화웨이 매출은 7212억위안(121조6000억원)으로 2017년 대비 19.5% 증가했다. 같은 기간 순이익은 593억위안(9조9985억원)에 달한다.

화웨이는 시장 규모가 큰 만큼 한국 기업과도 돈독한 관계를 이어왔다. 통신·제조 업계에 따르면, 한국 기업은 2018년 한해 화웨이를 통해 106억5000만달러(12조6522억원)의 매출을 발생시켰다. 대기업은 물론 중소기업의 매출이 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가 5월 15일 발표한 1분기 분기보고서를 보면, 2019년 1분기 주요 매출처는 애플과 AT&T, 도이치텔레콤, 화웨이, 버라이즌(영어 알파벳 순) 등이다. 이들 기업 대상 매출액은 전체의 12%쯤 된다. 화웨이 대상 매출 규모를 구체적으로 밝힌 것은 아니지만, 1분기 매출 52조3855억원 중 6조2862억6000만원을 이들 5개 기업에서 발생시켰다.

한국은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6년 7월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를 발표했는데, 이후 양국간 관계가 급랭했다. 중국에서는 한한령(한류 제한 명령)이 내려져 한국 콘텐츠 시장이 타격을 입었고, 롯데 등 중국에 진출했던 기업의 어려움도 가중됐다. 제조업계에 따르면, 자동차·화장품·식음료 등 다양한 기업이 사드로 인한 손실을 입었다.

한국 정부가 ‘화웨이 퇴출’이라는 카드를 꺼내들 경우 한중간 무역 분쟁이 불가피하게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무선 통신망에 화웨이의 제품을 사용한 곳은 LG유플러스 한 곳이다. 이 회사는 4G 때부터 화웨이 제품을 써왔고, 서울과 수도권 등에 화웨이가 만든 5G 기지국을 설치했다. LG유플러스는 LTE 때부터 새로운 표준 개발과 양질의 서비스 제공을 위한 협력을 해왔다. 5G 통신망 역시 마찬가지 과정을 거쳤다. 정부의 말 한마디로 LG유플러스의 현 상용망에서 화웨이 장비를 철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 스마트워치 등 화웨이가 만든 스마트 기기도 한국에서 대거 판매되고 있다. 이들 제품을 절판하는 등 과정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반응이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통신업계 한 관계자는 "통신망은 처음 설치할 때도 중요하지만 이후 ‘최적화’ 과정을 어떻게 진행하느냐도 중요한 일이다"라며 "요즘 업계에 나오는 말처럼 (LG유플러스가) 한 지역의 통신 기지국을 다른 회사 제품으로 바꾸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정부간 이해 관계에 따라 국가의 경제 정책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은 이해하지만, 화웨이 이슈에 대한 (우리 회사) 공식 입장이 무엇인지 얘기할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