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라이즌, AT&T에 이어 스프린트도 5G 상용화의 포문을 열며 미국이 통신강국 위상 회복에 박차를 가한다. 한국에 세계 최초 타이틀을 뺐기며 퍼스트 무버가 되겠다는 야심에 제동이 걸렸다. 미국 현지에서는 미국이 5G 시장에서 리더십을 회복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5월 31일(현지시각) 더버지, 엔가젯 등 미 IT매체에 따르면 스프린트는 5G 서비스 시작과 동시에 V50 정식 판매에 돌입했다. 스프린트는 애틀랜타, 댈러스-포트 워스, 휴스턴, 캔자스시티 지역에서 5G 서비스를 시작한다. 향후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뉴욕, 피닉스, 워싱턴 D.C. 등으로 서비스 지역을 확대한다.

. / 스프린트 홈페이지 갈무리
. / 스프린트 홈페이지 갈무리
스프린트는 이번 5G 상용화에서 "2180평방마일(5668㎢)의 커버리지를 통해 미국에서 가장 큰 5G 네트워크를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스프린트가 가장 넓은 커버리지를 자랑한다면 1위 통신사 버라이즌은 미국에서 최초로 5G 서비스를 시작한 것을 강조한다. 버라이즌은 현재 시카고와 미니애폴리스 등 일부 도시에서만 5G 스마트폰 서비스를 제공한다. 버라이즌은 5G 서비스를 연내 20개 도시로 확장한다.

◇ 세계 최초 타이틀 노렸으나 빛바래

버라이즌은 한국 이통3사와 세계 최초 타이틀을 놓고 경쟁을 벌였다. 한국은 버라이즌이 상용화 시기를 4월 11일에서 4일로 앞당긴다는 소식을 접한 후 버라이즌보다 2시간쯤 앞선 3일 오후 11시 5G 스마트폰을 개통해 세계 최초 5G 상용화라는 타이틀을 지켜냈다.

버라이즌 측은 한국 이통사가 6명의 셀럽(유명인)에게 서둘러 폰을 나눠주고 5G를 개통했다고 홍보했다는 점에서 세계 최초가 아니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버라이즌은 5G 전용 단말기가 아니라 4G로 개발된 모토로라 모토 Z3에 5G 모뎀칩이 달린 라우터를 연결해야 사용할 수 있다. 또 아직까지 극소수의 도시에서만 서비스한다는 점에서 화웨이, 에릭슨 등 주요 장비 업체들도 한국이 세계 최초로 5G를 상용화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분위기다.

◇ 아직 5G 준비 중인 AT&T와 T모바일

버라이즌 이외 미국 이통사는 아직 5G 본서비스에 인색한 모습이다. 2위 통신사업자인 AT&T는 19개 도시에서 5G 서비스를 제공 중이지만, 스마트폰 등 단말기 대신 모바일 라우터를 통해 서비스를 제공한다.

. / 더버지 갈무리
. / 더버지 갈무리
AT&T의 경우 아직 5G 스마트폰 서비스를 내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LTE 서비스에 '5G E'라는 이름을 붙여 논란이 됐다. 3위 통신사 스프린트는 2월 과장광고를 하고 있다며 뉴욕남부지방법원에 소송을 걸기도 했다.

4위 사업자 T모바일 역시 구체적인 상용화 일정 밝히지 않았지만, 뉴욕 맨해튼 등 일부 지역서 5G 관련 테스트를 진행 중이다.

◇ 5G 주도권 쥐고싶은 미국

미국은 글로벌 5G 경쟁에서 주도권을 쥐고 싶어 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4월 '차세대 통신망 5G 이니셔티브' 를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열어 5G 상용화를 독려했다. 2월에는 트위터를 통해서도 "미국은 가능한 한 빨리 5G, 심지어 6G 기술을 원한다"고 말했다.

미국은 외교적 대척점에 있는 중국보다 기술이 뒤처지고 있다는 점에서 정부와 업계 모두 위기감이 팽배하다.

화웨이 같은 중국 통신장비 업체가 낮은 가격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등의 토대가 되는 5G 기술에서 우위를 선점할 경우, 경제뿐만 아니라 국방안보 분야에서도 우월한 지위를 위협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최근 강행한 멍완저우 부회장 신병 인도 요구와 화웨이 금지령도 중국의 통신굴기를 견제하기 위한 행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한국의 세계 최초 5G 상용화 타이틀 빼앗으려 버라이즌이 무리하게 상용화 일정을 앞당긴 것 역시 주도권을 쥐고 싶어하는 미국의 조바심을 보여주는 예다.

◇ 미국 내에서도 회의적인 5G 리더십

이미 5G 시대가 도래한 상태에서 후발주자인 미국이 주도권을 쥐는 것이 사실상 어렵다는 평가도 나온다. 미국 싱크탱크 허드슨연구소의 토마스 듀스터버그 수석 연구원은 ‘미국의 5G 구축에 대한 문제점과 전망'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5G 경쟁에서 미국이 주도권을 쥐기 기대하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미국 전역에 걸쳐 5G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는 최소 수천억달러(수백조원)에 달하는 비용이 든다. 통신사들이 막대한 구축 비용을 수년 내 조달하는 데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우)와 시진핑 중국 국가수석 / 일러스트 IT조선 김다희 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우)와 시진핑 중국 국가수석 / 일러스트 IT조선 김다희 기자
게다가 미국은 메이저 통신장비업체가 없다. 최대 네트워크 장비업체 화웨이를 배제하면 5G 장비를 노키아와 에릭슨 제품을 사용해야 한다. 노키아와 에릭슨이 기술이나 가격 면에서 우월한 지에 대해서는 아직은 의문부호가 붙는다.

듀스터버그 연구원은 미국의 이러한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새로운 접근 방법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그 방안 중 하나는 네트워크 가상화 기술이다. 네트워크 가상화 기술은 기존의 하드웨어로 연결된 네트워크를 중앙서버가 지원하는 소프트웨어 기반 구성으로 전환하게 된다. 즉 비용이 많이 드는 물리적 통신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없다.

◇ 미국 통신 장비업체들 사라진 이유는?

미국이 어쩌다 통신기술 주도권을 잃게 됐는지에 대한 분석도 속속 나온다. 파이낸셜타임즈(FT)는 ‘왜 미국에는 화웨이에 대적할 라이벌 기업이 없는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1990년대까지 전 세계를 주도하던 미국의 통신기술이 어떻게 쇠락의 길을 걷게 됐는지에 대해 분석했다.

기사에 따르면 1996년 제정된 미국의 '정보통신법’은 무선 통신사업에 진입장벽을 낮추고 신규 사업자의 시장 참여를 대폭 확대했다. 그 결과 무선 통신시장에 중소업체가 난립하면서 네트워크 중복투자가 발생했다. 당시 세계 통신장비업체였던 루슨트와 모토로라는 재정이 열악한 중소업체들에게 금융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네트워크 장비를 공급했다.

이후 경쟁이 과열되고 시장이 포화됨에 따라 다수의 중소 통신사업자들이 도산했다. 이들에게 금융을 대가로 제품을 공급했던 루슨트 등 장비업체들은 재정난에 허덕이게 된다. 루슨트는 2006년 프랑스기업 알카텔(Alcatel)과 합병해 알카텔-루슨트(Alcatel-Lucent)를 출범하며 위기 타개를 모색했지만 결국 2016년 노키아에 인수됐다. 2010년 노키아는 모토로라의 네트워크사업까지 인수했다. 이후 미국의 통신장비 업체는 전무한 상황이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미국 통신기술 쇠락의 원인 중 하나로 초창기 이동통신망 구축 당시 무선통신기술 표준 난립 문제를 지목했다. 유럽은 1987년부터 GSM 방식으로 무선네트워크 표준을 통일했다. 미국은 통신사업자들이 자체 판단에 따라 표준을 채택했다.

버라이즌과 스프린트는 CDMA 방식을, AT&T와 T모바일은 GSM 방식을 택했다. 하나의 표준방식에 집중하지 못한 루슨트는 뒤늦게 CDMA와 UMTS 방식에 집중했지만, 이미 유럽과 아시아에서는 GSM 방식이 표준으로 자리잡은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