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국제 ICT 기구에서 양자암호통신 국제표준 예비 승인을 받는 성과를 냈지만, 이내 망신살이 뻗쳤다. SK텔레콤과 KT 간 논쟁으로 잘못하면 표준 권고안 채택이 무산될 처지다. 표준 업계는 충분히 예견했던 일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주무부처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이하 과기정통부)는 기업간 이해관계가 걸린 일이라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고, 국제 표준 단체에서의 한국 위상은 깎였다.

과기정통부는 지난달 국제전기통신연합 전기통신표준화부문 스터디그룹(ITU-T SG13)이 한국 주도로 개발한 양자암호통신 네트워크 프레임워크 권고안 1건(에디터: KT 김형수)을 국제 표준(ITU-T Y.3800)으로 예비 승인했다고 1일 밝혔다. ITU는 큰 이견이 없는 한 예비 승인 안건을 최종 표준으로 확정한다. 이번 표준은 ITU 양자암호통신 분야에서 채택한 최초 표준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한국 정부와 통신사업자가 수년간 글로벌 이해당사자를 설득한 결과물이다.

하지만 ITU-T 산하 SG13(양자암호통신 소관)과 SG-17(암호기술을 다루는 스터디 그룹)은 예비 승인 하루만에 이례적으로 조정회의를 열고 예비 승인 안건을 재논의하기로 결정했다. SK텔레콤이 승인 전까지 반대하는 등 이슈가 있었다. SG-13이 예비 승인한 안건은 다시 논의 테이블에 올라, 향후 논의 과정에서 한국이 주도해 만든 표준이라는 타이틀이 빠질 수 있다.

SK텔레콤 측은 "양자암호통신 표준 권고안 마련 과정에서 표준의 완성도를 높이고 표준간 호환성 강화를 위한 기술 보완을 요청했다"며 "국제표준 회의에서 주체간 의견을 조율하는 중 종종 발생하는 일"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KT측은 "이번 논란은 KT와 무관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정부 관계자 역시 "국립전파연구원 측이 SG13가 열린 제네바를 방문해 기업간 이견을 중제한 것으로 안다"며 "하지만 정부가 기업간 다툼에 직접 개입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한 발 뺐다.

양자암호통신 표준 재논의 사태에 대한 표준업계 시선은 싸늘하다. 익명을 요구한 한 관계자는 "ICT 분야 표준을 논의하는 국제 회의는 국익 중심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다반사지만, 이번 사태는 한국의 ICT 분야 경쟁력을 약화할 수 있는 요인이 될 수 있다"라며 "업체간 이해관계 문제로 표준 성과 자체가 공중으로 붕 뜨지 않을지 우려하며, 과거 분위기를 봤을 때 충분히 예견한 일이다"고 말했다.

한국은 2014년 이재섭 ITU 표준화총국장 배출과 ICT 분야 월드컵인 ‘ITU 전권회의’ 부산 개최, 5G 세계 최초 상용화 등 글로벌 ICT 표준 분야에서의 위상이 높다. 하지만 이번 양자암호통신 사태로 국제적 망신을 당했다. 과기정통부가 이해 관계가 첨예한 모든 일을 중재하지 못하겠지만, 최소한 예비승인 전 의견을 조정할 수 있지 않았을까. 무엇보다 힘들게 이룬 한국 주도 양자암호통신 표준 타이틀만은 지킬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