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흔히 말하는 '오덕'(Otaku)은 해당 분야를 잘 아는 '마니아'를 뜻함과 동시에 팬덤 등 열정을 상징하는 말로도 통합니다. IT조선은 애니메이션・만화・영화・게임 등 오덕 문화로 상징되는 '팝컬처(Pop Culture)' 콘텐츠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합니다. 어린시절 열광했던 인기 콘텐츠부터 최신 팝컬처 분야 핫이슈까지 폭넓게 다루머 오덕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 줄 예정입니다. [편집자주]

‘푸른유성SPT 레이즈너(蒼き流星SPTレイズナー)’는 건담 애니메이션을 탄생시킨 선라이즈가 로봇 애니메이션이 한창 쏟아지던 1985년에 선보였던 작품이다.

감독은 인기 리얼로봇 ‘보톰즈'를 만든 ‘타카하시 료스케(高橋良輔)’다. 그는 1975년 ‘용자 라이딘'을 시작으로 1976년 ‘콤바트라 브이', 1981년 ‘다그람’, 1983년 ‘보톰즈', 1984년 ‘가리안’, 1987년 드라구나', 1989년 ‘마동왕 그랑조드', 1990년 ‘마신영웅전 와타루2’ 등 다수의 로봇 애니메이션에서 원작 및 감독으로 활동했다.

푸른유성SPT 레이즈너 오프닝 영상. / 유튜브 제공

타카하시 감독은 애니메이션 기획 초기 레이즈너를 기존 로봇과 차별화시키기 위해 로봇 애니메이션의 원점이라 평가받는 ‘아톰'의 요소를 가져와 자율 의사(意思)와 인격을 부여하려 했다.

하지만, 1985년은 건담의 인기로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있고 사실성을 추구하는 리얼로봇이 대세였던 시기다. 감독은 이를 의식해 이야기 초반에 로봇 레이즈너에 탑재된 컴퓨터 ‘레이'가 기계적인 대답만 하게끔 설정하고, 이야기 중반부부터는 컴퓨터 레이에 숨겨진 시스템 ‘폴론'을 등장시켜 레이즈너를 아톰처럼 생각을 가진 로봇으로 변화시킨다.

폴론은 초기 사람의 목숨보다 임무와 사명을 우선시하는 비정함을 보이지만, 최종적으로는 주인공이자 파일럿인 ‘에이지'를 믿고 따르게 된다. 에이지를 신뢰하게된 폴론은 레이 컴퓨터를 다시 표면으로 끄집어낸다. 에이지의 동료로서 레이의 존재감을 키운 것이다.

푸른유성SPT 레이즈너 일러스트. / 선라이즈 제공
푸른유성SPT 레이즈너 일러스트. / 선라이즈 제공
레이즈너 시대 배경은 ‘1996년'이다. 애니메이션이 제작됐던 1985년에서 그리 멀지않은 미래다. 1980년대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체제가 유지되던 시기다. 애니메이션에서는 미국소련 냉전이 확대돼 우주 규모 전쟁으로 발전된 상황을 배경으로 그렸다.

애니메이션 스토리는 크게 2부작으로 구성됐다. 1부는 외계행성 그라도스 군대가 지구를 침략하는 과정을 그렸고, 2부는 전쟁으로부터 3년뒤 그라도스의 지배하에 놓인 지구를 무대로 하고 있다.

레이즈너 2부 이야기는 비슷한 시기에 등장해 큰 인기를 모았던 만화 ‘북두의 권'의 영향으로 폐허가 된 지구를 배경으로 로봇과 로봇의 육탄전을 그렸다.

푸른유성SPT 레이즈너 한장면. / 유튜브 갈무리
푸른유성SPT 레이즈너 한장면. / 유튜브 갈무리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에 따르면 2부 이야기 구성은 캐릭터 디자이너로 참여한 ‘타니구치 모리야스(谷口守泰)’의 의견이 반영된 결과다. 타니구치는 만화 ‘북두의 권' 팬으로도 유명하며, 그의 취향은 자신이 제작에 참여했던 ‘보톰즈'와 ‘레이즈너', ‘기갑계 가리안', ‘시티헌터' 등 애니메이션에서도 드러난다.

애니메이션 이야기는 코스믹컬처클럽(우주체험교실)에 참가한 소년·소녀가 화성에 도착하고 얼마되지 않아, 갑자기 등장한 기동병기 ‘SPT(Super Powered Tracer)’의 습격을 받는다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그라도스군 SPT의 공격으로 위기에 빠진 소년·소녀는 SPT 레이즈너 파일럿인 ‘알바트로 나르 에이지 아스카'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에이지는 이들에게 자신이 그라도스인과 지구인의 혼혈임을 밝힌다. 소년·소녀들은 에이지를 믿지 못하지만 거듭되는 전투 속에 서로의 신뢰를 쌓아가게 된다. 에이지 일행은 지구로 돌아가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그라도스의 지배에 놓인 1999년 지구를 무대로 한 2부에서는 소년소녀들이 적과 아군으로 나뉘어져 서로 싸우게 되고, 그 사이 죽은줄로만 알았던 에이지가 푸른SPT 레이즈너와 함께 돌아온다.

주인공 에이지는 아폴로 우주계획으로 달에서 조난된 지구인 남성 ‘켄 아스카'와 켄을 구조한 그라도스인 여성 ‘알바트로 밀 아이라 아스카' 사이서 태어난 지구인과 외계인의 혼혈이다. 가족 구성은 부모와 누나인 ‘쥬리아’ 등을 합해 4명이다.

푸른유성SPT 레이즈너 일러스트. / 선라이즈 제공
푸른유성SPT 레이즈너 일러스트. / 선라이즈 제공
레이즈너 애니메이션은 당시 10%쯤의 높은 평균 시청률을 기록했으나, 1985년말 스폰서 기업인 산요전기에서 발생된 ‘산화탄소중독사고'로 애니메이션 투자를 중단한다. 여기에 1985년 이후 발생된 프라모델 판매 부진으로 애니메이션 스폰서로 참가했던 반다이마저 어려워졌다.

결국 레이즈너 애니메이션은 메인 스폰서였던 반다이의 의견에 따라 38화에서 이야기를 마무리해야만 했다. 갑작스런 결정은 37화와 마지막편인 38화가 서로 내용이 이어지지 않는 결과를 가져왔다. 37화에서 크게 파손된 레이즈너 로봇이 38화에서 돌연 개조강화된 모습으로 나타나 그라도스군의 2세대 SPT ‘자카르'와 대등한 전투를 벌이는 모습을 보인다.

스폰서 기업의 애니메이션 투자 중단으로 그려지지 못했던 마지막 부분은 도시바를 통해 판매된 오리지널 비디오 애니메이션(OVA)를 통해 공개됐다. OVA는 모두 3편으로 구성됐으며, 마지막 3편에서 37화와 38화 사이에서 그려지지 못한 부분과 레이즈너 애니메이션 엔딩을 그려냈다.

푸른유성SPT 레이즈너 일러스트. / 선라이즈 제공
푸른유성SPT 레이즈너 일러스트. / 선라이즈 제공
타카하시 감독은 1986년 라디오 방송 ‘스타차일드'에 출연해 "중노동을 마치고 편해졌지만, 마라톤처럼 완주하고 싶었다"며 애니메이션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데 따른 아쉬움을 드러냈다.

타카하시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본래 예정됐던 마지막편 구상을 털어놨다. 감독에 따르면 진정한 마지막편은 지구에서 그라도스인의 차별을 걱정한 주인공 에이지가 레이즈너 마크2 로봇을 타고 그라도스 행성으로 돌아가, 그라도스정부의 지배체제로부터 그라도스인을 해방시킨다는 내용이 담길 예정이었다.

타카하시 감독은 인터뷰 내용과는 별개로 총 52화로 기획됐던 레이즈너 애니메이션 내용을 담은 소설책을 선보인 바 있다.

타카하시 감독에 따르면 그라도스인과 지구인과의 이야기는 앞서 공개한 로봇 애니메이션 ‘은하표류 바이팜' 기획 당시 존재했던 설정을 가져온 것이다. 소년소녀와 에이지가 지구로 돌아오는 여정도 바이팜의 이야기를 답습한 셈이다.

애니메이션 업계에 따르면 로봇 애니메이션이 넘쳐 흘렀던 1980년대 애니메이션 업계에서는 작품간 기획 내용과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사례가 많았다. 레이즈너의 기획 내용 일부는 1987년작 ‘드라구나'에 사용됐고, 드라구나 기획 일부는 1988년작 ‘마신영웅전 와타루'에 사용되기도 했다.

한편, 레이즈너 소재 프라모델은 반다이가 제작했다. 반다이는 당시 72분의 1스케일, 100분의 1스케일로 레이즈너 로봇을 프라모델 상품으로 선보였다. 반다이는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는 ‘스냅핏 키트' 기술과 반투명 부품을 도입하는 등 경쟁사 대비 앞선 기술을 레이즈너 프라모델을 통해 자랑했다.

레이즈너 30주년 기념 프라모델. / 반다이스피리츠 제공
레이즈너 30주년 기념 프라모델. / 반다이스피리츠 제공
레이즈너는 당시 인기작 제타건담 애니메이션과 함께 등장했던 탓에 프라모델 키트 품질이 건담에 비해 낮았으며, 이는 소비자들의 불만을 사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 8비트 게임기 ‘패밀리컴퓨터'의 폭발적인 인기로 TV애니메이션을 보지않고 게임을 즐기는 어린이가 늘어나면서, 1986년이후 프라모델 판매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애니메이션 방송이 끝난 이후에는 웨이브 등 반다이 외 모형 제조사에서 레이즈너 프라모델이 출시되기 시작했다. 웨이브, 코토부키야 등 프라모델 제조사는 72분의 1스케일로 레이즈너 모형 상품을 선보였다.

레이즈너는 반다이가 스폰서로 참여한 작품인만큼 인기 게임 ‘슈퍼로봇대전' 시리즈에도 다수 춣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