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한두 푼 더 벌려고 '신뢰'라는 장사 밑천 바닥낸 PC부품 유통업자들

입력 2019.07.12 05:00 | 수정 2019.07.12 09:33

자동차 운전자들은 내릴 때는 찔끔 천천히, 오를 때는 빨리 급등하는 기름값에 부아가 난다. 요즘 PC용 메모리 모듈 가격 변동이 그렇다. 기름값보다 더하다. 자고 일어나면 메모리 가격이 거의 1만 원씩 오르는 상황이다.

지난주만 해도 3만원 안팎을 오가던 삼성 DDR4 8GB 제품이 9일을 기준으로 순식간에 4만원대까지 치솟았다. 무려 30%가 넘는 인상 폭이다. 11일 기준으로 어느덧 5만원대를 바라본다. AMD가 8일 출시한 ‘3세대 라이젠’ CPU가 화제로 떠오르면서 PC 시장이 반짝 살아나자 일부 업자들이 메모리 가격을 갑자기 대폭 올렸다. 애꿎은 소비자만 피해를 본다.

7월 첫 주 기준 삼성전자 DDR4 8GB 메모리 모듈의 가격 비교 정보. 동일 제품의 가격이 1주일만에 1만원 이상 올랐다. / 다나와 갈무리
여기에 일부 업자는 ‘재고가 없다’며 소비자들이 온라인으로 구매한 거래까지 일방적으로 취소하거나, 구매 취소를 유도하면서 논란을 키웠다. ‘일본 정부의 메모리 반도체 핵심 소재 공급 제한으로 메모리 수급이 어렵다’는 이유다.

업자들의 주장은 실제 메모리 업계 상황과 정 반대다. 일본이 핵심 소재 수출을 제한해도 최근 수개월에 걸쳐 누적한 메모리 재고가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과잉 생산과 수요 감소로 누적된 재고를 보관 비용이 제조사들에 큰 부담일 정도다. 오히려 어떻게 재고를 처리할지 고민이다.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재고를 줄이는 게 낫다. ‘재고 없음’은 말도 안 되는 핑계인 셈이다.

글로벌 메모리 시세 조사기관 디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일본의 소재 수출 규제 발표와 메모리업체들의 감산설이 떠돌아도 주요 메모리 제품 거래 가격은 하루 평균 1%~2% 정도 오르는 데 그친다. 무려 30% 이상 급등한 곳은 한국의 메모리 시장뿐이다.

한 커뮤니티에 공유된 일부 업자가 고객에게 보낸 ‘메모리 구매 취소 요청’ / 쿨앤조이 커뮤니티 갈무리
일부 업자들의 횡포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재작년 암호화폐 채굴 열풍으로 그래픽카드 수요가 급증했을 때도, 지난해 인텔의 공급 부족으로 CPU 제품 가격이 크게 올랐을 때도 기승을 부렸다. 몇천 원이라도 더 비싸게 팔려고 재고가 있는 제품도 없다고 튕기거나, 판매 완료한 거래를 취소하고 동일 제품을 더 비싼 가격으로 재등록하기도 했다. 당장 필요하다고 멋모르고 구매한 소비자만 이른바 ‘호갱’이 된다.

양심적인 유통업자도 정직하게 장사하기도 쉽지 않다. PC 부품 유통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최저가 확인을 위한 가격 비교사이트는 본래 기능을 잃은 지 오래다. 오히려 업자들의 가격담합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는 수단이 됐다. 정상(?)가격으로 등록하면 즉시 동종 업계로부터 압박이 들어온다. ‘왕따’를 당해 실제로 제품 공급을 받지 못해 장사를 못 하게 되는 상황도 발생한다고 한다.

뿔난 소비자들이 행동에 나섰다. ‘해외 직구’다. 시장 규모가 크고 경쟁 업체들이 많은 만큼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가격이 장점이다. 국내에서는 가끔 보이는 ‘특판’ 행사도 자주 한다. 할인 폭도 훨씬 크다. 배송비와 200달러 이상 제품에 붙는 부가세를 고려해도 국내보다 몇만 원 이상 저렴한 경우가 흔하다. 특히 초기 불량만 아니면 오래 써도 고장이나 애프터서비스(AS)를 받을 일이 거의 없는 CPU와 메모리는 인기 직구 품목이다.

최근 아마존이 한국어 서비스를 시작하고, 한국 직배송 비중을 늘렸다. 덩달아 PC 부품의 해외직구 수요는 더욱 느는 추세다. 직배송 제품은 하자가 생기면 아마존에서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직구의 최대 걸림돌인 ‘사후 지원’ 문제에서 훨씬 자유로운 셈이다. 배송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게 단점이다. 그래도 국내에서 바가지를 쓰기 싫으면 참을 만한 수준이다.

해외 직구가 는다는 것은 국내 PC 부품 유통 시장에 대한 신뢰도가 땅에 떨어졌다는 의미다. 도대체 어느 나라 어느 곳에 있는지 모를 해외 부품업체를 더욱 신뢰한다는 것 아닌가. 당장의 사소한 이익에만 급급해 장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신용’까지 내던진 국내 PC 부품 유통 시장의 장래가 어둡다. 유통업자가 자초한 일이니 안쓰럽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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