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처음으로 넷플릭스에 애니메이션을 공급한 제작사가 있다. 바로 폴리곤픽처즈(Polygon Pictures)다.

폴리곤픽처즈는 2014년 7월, 회사 창립 30주년 기념작인 ‘시도니아의 기사(シドニアの騎士)’로 넷플릭스와 직접 계약을 한다. 당시 일본에는 넷플릭스 서비스가 시작되지도 않은 때다.

이후 회사는 ‘아인(亜人)’, ‘고질라 괴수혹성(GODZILLA 怪獣惑星)’, ‘블레임(BLAME!)’ 등의 작품을 넷플릭스에 차례차례 선보인다. 신작 ‘레비우스(Levius)’도 11월 넷플릭스로 방영될 예정이다.

일본 현지에서만 소비되던 성인향 일본 애니메이션이 넷플릭스를 타고 190개 이상 국가로 뻗어 나간 것이다.

폴리곤픽처즈의 행보는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에 적지않은 충격을 줬다. ‘제작위원회’라는 폐쇄적인 콘텐츠 제작 체제에서 벗어나 고품질의 작품을 제작자가 의도한 대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빡빡한 예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이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자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넷플릭스가 보여준 글로벌 콘텐츠 투자 금액 규모는 저예산 속에 발버둥 치는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와 큰 차이를 보였기 때문이다.

2019년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시카프)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시오타 슈조(塩田周三)’ 폴리곤픽처즈 대표는 "넷플릭스가 북미와 유럽인이 가진 애니메이션에 대한 생각을 바꿔놓았다"고 말했다.

시오타 슈조(塩田周三) 폴리곤픽처즈 대표. / 김형원 기자
시오타 슈조(塩田周三) 폴리곤픽처즈 대표. / 김형원 기자
시오타 대표에 따르면 북미와 유럽은 최근까지도 애니메이션을 어린이의 전유물로 치부했다. 일본이 1980년대부터 성인향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공급한 것과 비교하면 문화적으로 큰 차이를 보인 셈이다.

북미·유럽 시청자의 이런 인식은 현지 콘텐츠 업계 관계자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는 ‘마크 워던(Mark Worden)’ 작가 겸 컨설턴트는 "북미와 유럽 등 서구권에서는 ‘애니메이션은 어린이를 위한 것'이라는 인식이 강했다"며 "현재 서구권 20대 초반 젊은 세대 사이서 만화와 애니메이션 콘텐츠 소비가 뚜렷해졌고, 과거 일본을 중심으로 성장했던 성인향 애니메이션 콘텐츠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라고 16일 서울에서 열린 SPP 2019 콘퍼런스를 통해 밝힌 바 있다.

시오타 슈조 폴리곤픽처즈 대표는 "일본에서 만들어지는 전체 애니메이션 중 60%쯤이 ‘성인을 위한 작품'이다"며 "세상 어디를 뒤져봐도 이런 나라는 일본밖에 없다"고 말한다.

시오타 대표에 따르면 일본 애니 업계는 성인향 애니메이션 콘텐츠 제작에 강하지만 이를 일본 국외 시장에 배급할 길이 없었다. 게다가 영업력도 약해 이제까지 콘텐츠를 국외에 제대로 판매하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명작 애니메이션이 전 세계에 알려진 것은 ‘세계 애니메이션 팬들의 힘'이라고 평가했다. 본래 업계와 제작사가 해야 할 일을 팬들이 대신해 준 셈이라는 것이다.

시오타 대표는 "넷플릭스 등 인터넷 영화 서비스가 서구권에 애니메이션 시청률을 높이고, 제작 환경을 바꾸는데도 큰 공을 세웠다"고 말한다.

넷플릭스를 통해 성인향 애니메이션을 접한 서구권 시청자는 만화와 애니메이션 문화 커뮤니티에 참가하게 됐고, 제작자는 일본 애니메이션 스타일을 모방한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 공개하게 됐다는 것이다.

시오타 대표는 이런 제작 흐름을 ‘초밥(스시)'에 비유했다. 미국에도 유럽에도 스시를 만들어 팔지만 지역별로 독특한 맛과 먹거리로 변화한 것과 비슷하다고 평가했다.

시오타 대표에 따르면 넷플릭스의 공격적인 투자는 애니메이션 콘텐츠 제작비를 끌어올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빠듯한 예산으로 여유가 없던 콘텐츠 제작 현장에 숨통이 트게 했다는 것이다.

시오타 대표는 "2013년 당시 23분 분량의 애니메이션을 만드는데 필요한 제작비는 최대 2000만엔(2억1800만원) 수준이었지만, 넷플릭스 투자 이후 같은 품질과 분량의 콘텐츠를 기준으로 3000만엔(3억2700만원)은 보통이고 최대 4000만엔(4억3600만원) 수준까지 제작비 상한선이 올라갔다"고 말했다.

시오타 대표는 "앞서 말한 애니메이션 제작비는 글로벌 시장 수준으로 볼 때 결코 높은 편은 아니지만, 일본 시장만 놓고 본다면 꽤 높은 금액이다"라고 설명했다.

시오타 대표는 애니메이션 콘텐츠 라이선스 수익 역시 기존 대비 몇십 배 증가했다고 전했다. 제작 환경이 전반적으로 개선됐다는 것이다.

넷플릭스의 애니메이션 시장 참여는 기존 ‘제작위원회'에 참가하지 못했던, 이른바 ‘아웃사이더 스튜디오'에게도 기회가 됐다. 다채로운 산업 분야에서 다수의 기업이 참여하는 제작위원회라는 낡은 체제에서 벗어나 소규모 콘텐츠 제작 스튜디오도 넷플릭스와 계약을 통해 자신들의 작품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이다.

넷플릭스가 잘 만들어진 애니메이션 콘텐츠가 탄생할 수 있는 길을 연 반면, 부정적인 면도 없지 않다.

시오타 대표에 따르면 넷플릭스는 양질의 애니메이션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근간을 만들었지만, 콘텐츠의 증가로 시청자가 하나의 작품에 투자하는 시간이 크게 줄었다. 콘텐츠 제공 찬스는 늘었지만, 팬층을 형성해 글로벌 메가히트 작품으로 키워내기가 정말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정해진 시간에 연재 방식으로 애니메이션을 방영하면, 이를 본 시청자가 다음 편을 기대하면서 팬들 간 커뮤니티를 형성시킬 시간이 충분했다. 하지만 자금은 애니메이션뿐만 아니라 영화·게임·드라마·유튜브 등 사람들이 보고 즐길 것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게다가 넷플릭스는 콘텐츠를 시즌 별로 한꺼번에 공개한다. 시청자는 ‘정주행'이라 불리는 시청 법으로 단번에 시작부터 결말까지 본다.

시오타 대표는 "바뀐 콘텐츠 시청 패러다임에서 콘텐츠를 크게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비즈니스 방법을 창조해야 한다"고 말한다.

"콘텐츠 배포 이후 극장판 콘텐츠를 제작하거나, 라이브와 캐릭터 상품 제작 등 수익을 낼 방법을 찾아야되고, 이는 애니메이션 콘텐츠 제작자의 향후 과제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 ‘디즈니 플러스’, 일본 애니 제작자에게도 기회될 것

북미 기준 11월부터 시작될 월트디즈니의 인터넷 영화 서비스 ‘디즈니 플러스(+)’에 대한 애니메이션 업계의 관심이 크다.

애니메이션 업계는 디즈니와 애플 등이 콘텐츠 플랫폼 경쟁에 뛰어들면서 자연스레 콘텐츠 배포 채널과 제작 기회가 증가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시오타 슈조 폴리곤픽처즈 대표는 "우리는 디즈니의 참가를 흥미롭게 바라보지만,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은 디즈니에 대해 크게 흥미를 느끼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이유는 ‘디즈니 에코(순환) 시스템'에 있다. 디즈니는 ‘겨울왕국', ‘알라딘' 등 자신들이 탄생시킨 지식재산권(IP)을 극장판으로, TV판으로, 뮤지컬로, 캐릭터 상품으로 다채로운 분야에 활용한다.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은 디즈니는 넷플릭스처럼 스트리밍 플랫폼을 가지더라도 결국 자신들이 가진 ‘마블', ‘스타워즈' 등의 프렌차이즈를 이용해 애니메이션 콘텐츠를 제작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 애니 제작자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구상한 애니메이션이 아닌, 디즈니가 기획한 애니메이션을 하청받아 만드는 것 이상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시오타 대표는 "디즈니+의 등장으로 채널이 늘어나는 것은 애니 업계에 있어 긍정적이다"며 "일본 애니 업계에 있어 찬스가 생길 가능성은 있어 보인다"라고 평가했다.

◇ 일본엔 있지만 한국 애니메이션에는 없는 것

시오타 슈조 대표에게 한국 애니메이션 콘텐츠에 있어 부족한 점은 무엇인가에 대해 물었다.

시오타 대표는 한참을 고민 후에 한국 애니메이션 콘텐츠에 필요한 것은 ‘아이덴티티(Identity)’, 즉 ‘정체성' 혹은 한국만의 고유의 무엇인가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시오타 대표는 "한국은 시장이 좁기 때문에 자연스레 북미나 유럽 시장을 타겟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밖에 없고, 글로벌 기준에 맞춰 만들다 보니 그림의 질과 연출 면에서는 부족함이 없다"고 말했다.

"다만, 디즈니와 픽사 등 미국 애니메이션을 모방해 만들다 보니 한국만의 색깔이 없고, 천문학적인 금액을 들여 만드는 디즈니와 픽사 애니메이션을, 한국 스튜디오가 적은 돈으로 같은 품질을 내기는 매우 힘든 일이다"라고 평가했다.

시오타 대표에 따르면 일본 애니메이션의 경우 독창성을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만화와 판타지 소설 등에 의해 구축했다. 폴리곤픽처즈는 3D 그래픽이지만 일본 만화 그림 같은 화면과 연출 기법으로 미국 픽사 애니메이션과 차별화를 이뤄냈다.

시오타 대표는 "방탄소년단(BTS)가 전 세계에 흥행한 것처럼 한국 애니메이션 업계도 언젠가 미국 및 일본과 다른 한국만의 아이덴티티를 발견할 것이다"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