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수 칼럼] "돈만 풀면 성공할 정책이라면 나도 하겠네"

입력 2019.09.09 06:00

IT조선 취재본부장

문제 생기면 자판기처럼 튀어나오는 말 ‘예산 증액’
껍데기 정책 보면 또다시 ‘밑 빠진 독 물 붓기’ 걱정
경제 비상사태, 기업인 활력 되찾아야 불씨도 살아
조국 후보자 관심의 1%라도 기업과 산업 친화 정책에 쏟아야


또 시작이다. 올해도 어김없다. 정부 예산 증액이다.

정부가 2020년 예산안을 513조5000억원으로 확정했다. 국회 예산 심의 과정에서 깎이더라도 500조원이 넘을 전망이다. ‘초슈퍼울트라 예산’이다.

국가 채무가 걱정이다. 정부가 예상한 내년 세수 전망은 482조원이다. 올해보다 고작 1.2% 는다. 세출 증가율은 2년 연속 9%대다. 버는 것보다 쓰는 게 많다. 부채가 늘 수 밖에 없다.

올해 국가채무가 740조원이다. 내년 805조원으로 늘어난다. 증가폭은 갈수록 가팔라진다. 2023년 1061조원에 이를 전망이다. 엄청난 국방비를 쓸 정도로 경제력이 강한 미국을 젊은이들이 흔히 ‘천조국’(千兆國)라고 부른다. 우리나라도 전혀 다른 의미로 ‘천조국'이 될 판이다.


각종 지표 하락은 우리가 경제 비상사태에 도달했음을 가리킨다. /IT조선DB
경기 침체가 더 걱정이다. 경제성장률, 투자, 수출, 소비, 고용 등 주요 경제지표 중 좋은 게 없다. 한국은행은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2.5%에서 2.2%로 낮췄다. 글로벌 금융사들은 아예 1%대로 줄줄이 내려잡았다.

투자, 수출, 소비는 마이너스 아니면 0%대다. 실업률은 19년만에 최고치다. 8월 물가상승률은 54년만에 처음 마이너스다. 공장가동률마저 급락한다. 경기 침체를 넘어 불황의 공포까지 드리워졌다.

정부는 일시적인 현상일 뿐 디플레이션이 아니라고 거듭 강조한다. 하지만 "정부가 이제 통계수치까지 부정하나"라는 비난만 산다.

하루빨리 대책을 찾아야 한다. 설령 빚이 늘지라도 확장적 재정 정책을 펴는 것이 물론 답이 될 수 있다. 돈을 푸는 것은 전통적인 경기진작책이다.

하지만 정부가 지금까지 보여준 상황 인식과 폈던 정책을 보면 별 효과를 볼 것 같지 않다. 일본도 방향성 없이 어정쩡한 재정 확대 정책을 폈다가 ‘잃어버린 20년'을 맞았다.

재정 확대는 한마디로 총수요 확대다. ‘소비 증가→투자 증가→경기 회복 →소비와 투자 증가’라는 경기 선순환 전략이다. 그러나 정부가 그간 했던 재정 확대는 소비와 투자를 늘리는 데 실패했다.

최저임금 인상을 포함한 소득주도성장 정책이 대표적이다. 결국 가처분 소득과 소비 증가로 이어지지 않았다. 물가가 내려갈 정도로 최악의 소비 위축이 아닌가.

소비와 투자 증가를 늘리기는커녕 되레 앞장서 위축시켰다는 비판까지 나온다. 주52시간근로제가 그렇다. 근로시간을 줄이는 대신 고용을 더 늘리고 여가 소비를 늘려보겠다는 취지만큼은 백분 공감한다. 현실은 다르게 돌아갔다.

"전 최저임금을 올려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가능하면 더 주고 싶어요. 그런데 주52시간제는 너무합니다. 다 같은 공장 직원이라해도 숙련공이 따로 있어요. 이들에게 수당을 더 챙겨주려 해도 할 수 없어요. 52시간제 때문에 주던 수당도 이제 못 주게 됐어요. 종업원도 불만이 많습니다. 제도 운영이 너무 경직됐습니다."

수천억원대 매출을 올리는 한 중견 제조업체 대표의 말이다. 1000명에 육박하던 이 회사 공장 직원은 2년 새 절반 이상이 줄었다. 그 대신 베트남 공장 직원만 더 늘었다. 차라리 현지 숙련공을 더 키우는 게 장기적으로 낫겠다는 판단이다. 주52시간제 운영이 조금 더 유연했다면 이 회사도 국내 공장 인력 감축 속도를 늦추거나 다른 대안을 찾았을 것이다.

주52시간제 뿐인가. 뭔가 새로운 일을 하려 해도 각종 규제로 인해 움직일 공간이 좁다. ‘규제 샌드박스’니 뭐니 하며 정부가 규제를 없앤다고 하는데 전혀 달라진 게 없다.

노동 경직성 문제는 또 어떤가. 도대체 해결 기미가 없다. 강성 노조는 여전히 디지털로, 글로벌화로 바뀐 세상의 변화를 읽지 못한다.

‘경영자=자본가’라는 20세기 낡은 이분법까지 여전히 통용된다. 물론 몇몇 몰지각한 오너 경영자들이 있다. 지탄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이들의 그릇된 행태를 모든 경영자로 일반화하는 게 문제다. 대다수 기업 경영자들은 이를 너무 속상해 한다.

기업을 할 의욕마저 잃는다. 미련없이 지분을 팔고 기업 경영에서 손을 떼고싶다는 오너 경영자가 늘어났다고 한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5일 ‘1000조원’을 언급할 정도로 시중 부동자금은 적지 않다. 하지만 정부와 여권은 이를 실물경제로 끌어낼 정책을 제대로 내놓지 못한다. / IT조선 DB
"새로 하고싶은 사업이 없는 게 아니에요. 자금 부담은 좀 있죠. 몇년 전이라면 아마 은행 대출을 받아 질러봤을 겁니다. 이제 안 그러려고요. 실패할까 겁이 나고요. 무엇보다 ‘신규사업 없어도 그냥저냥 회사는 굴러갈텐데 누구 좋으라고 모험을 하나’ 하는 회의감이 요즘 부쩍 많이 듭니다."

또다른 중소 기술제조업체 사장의 얘기다. 몇년 전에 봤던 그는 달랐다. 회사를 더 키워 그동안 함께 고생한 직원들을 분사 대표로 만들겠다는 의욕에 불타 있었다. 50대임에도 그는 이미 은퇴한 노인처럼 늙어 있었다.

왜 갑자기 기업인들 얘기를 꺼냈는가 하면 이들이야말로 당면한 한국 경제 위기를 극복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고용과 투자라는 경기 선순환의 첫 단추를 쥔 이들이다. 이 중견중소기업인들이 활력을 되찾아야 꺼져가는 한국 경제의 불씨를 살릴 수 있다.

정권과 정부가 이들 기업인을 다시 뛰게 만들 정책을 내놓으면서 예산을 늘린다면 찬성이다. 더욱이 새 시장을 만들고, 규제 푸는 것에 예산이 크게 들지도 않는다. 현실은 거꾸로 간다.

민간 기업이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새 시장을 만들었다. 이를 중앙이나 지방 정부가 가로챈다. 정부가 납세자에게 제공할 좋은 제품이나 서비스가 생겼으면 이 아이디어를 낸 기업 것을 가져다 쓰면 될 일을 직접 하다가 사단을 낸다. 정작 아이디어를 낸 기업만 죽인다. 그것도 이 기업이 낸 세금으로 만든 예산을 갖고서 말이다.

일자리 정책도 그렇다.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시대에 필요한 게 공공 데이터다. 공공 데이터를 누구나 쉽게 가져다 쓸 수 있도록 인프라를 구축하고 규제도 풀면 이를 기반으로 많은 기업이 생겨난다. 기존 기업도 신규 사업을 적극 펼친다. 이 과정에서 신규 고용도 창출한다. 이러한 공공 데이터 개방과 인프라 투자에 정부는 여전히 인색하다.

중앙과 지방 정부 할 것없이 청년들에게 정작 별 도움이 안 될 취업 보조금을 푸는 것만 골몰한다. 이 보조금을 차라리 기업에게 풀라. 신규 고용 창출을 전제로 신규사업 추진 자금으로 쓰게 하라. 고용을 많이 창출하면 법인세도 확 깎아주라.

이런 방법이 꼭 맞다는 얘기가 아니다. 정부가 가장 큰 경제주체인 기업들을 위한 정책 개발을 정말 고민해봤냐고 묻는 것이다. 도대체 산업과 기업정책에 관심은 있냐고 묻는 것이다.

일본 수출 규제로 우리 부품소재산업의 취약성이 드러났다. 정부가 가장 먼저 꺼낸 말은 관련 연구개발(R&D) 예산 확대다. 인공지능 인재가 부족하다는 문제가 지적됐다. 정부는 관련 대학원 지원 예산 증액부터 검토한다.

예산 증액이라는 말이 마치 자판기처럼 누르면 튀어나온다. 이렇게 예산만 늘리면 저절로 우리나라가 일본과 미국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부품소재 역량을 키우려면 먼저 관련 기업부터 키워야 한다. 인공지능 인재 양성도 첫걸음은 관련 벤처 기업을 키우는 일이다. 이들 기업이 대박을 내면 돈도, 사람도 몰린다. 관련 산업도 활성화한다. 그러면 대학도 알아서 부품소재나 AI 전문과정을 만든다. 정부 예산은 기업과 대학이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에 투입하면 된다.

이래야 한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정책 당국자가 잘 안다. 하지만 안 한다. 정책소비자, 즉 국민 이해관계를 잘 살펴야 한다. 다른 부처나 지자체랑 지난한 협의를 거쳐야 한다. 법이 늘 말썽이니 국회도 설득해야 한다. 피곤한 일이다.

무엇보다 생색이 나지 않는다. 당장의 성과만 요구하니 칭찬받기는커녕 질책을 받을 가능성만 높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예산 늘리는 일만 한다. 그래야 일이라도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산으로 관료 힘도 보여줄 수 있다. 제발 이 고리 좀 끊자.

경제 비상사태다. 정책 또한 비상해야 한다. 기업이 원하는대로 지원하자. 예산이 결국 기업에게로 갈, 신규 대형 사업 프로젝트부터 만들자. 특별법을 동원해서라도 각종 규제를 빨리 풀자. 국회 도움이 필요하면 무릎꿇고 빌어서라도 설득하자.

중국 정부처럼 노골적으로 기업을 지원할 수 없다는 사람이 있다. 미안하지만 한가한 얘기다. 정책을 펴지 말라는 얘기다. 지금 이런 것 따질 겨를이 없을만큼 상황이 절박하다. 방법은 찾으면 있다. 우리나라 관료를 무시하지 말라. 이런 것엔 도가 통한 이들이다.

우리나라 수출과 산업을 떠받쳐 왔고 미래까지 책임질 기술 제조기업과 벤처기업이다. 기술 기업에 초점을 맞춰 도와야 한다. 산업과 경제를 살리고 일자리를 만드는 일이다. 이런 정책이 지금 없다.

기술 산업계가 절실하게 뭘 필요로 하는지 모르는가. 그걸 아는 것이 어렵지 않다. 대표기업 CEO 몇 사람만 만나도 금방 안다.


김성수 과학기술혁신본부장(사진)은 8월 7일 일본 소재 수출규제 관련 긴급 토론회에서 참석자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경청했다는 이유다. 정부가 그간 산업계 목소리를 얼마나 흘려들었는지 역설적으로 보여준 장면이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제공
청와대와 여권이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게 쏟은 관심의 1%만이라도 여기에 할애를 했다면 상황이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다. 중견중소기업 CEO를 만나 진솔한 얘기를 들었다면 기업과 산업 친화 정책도 진작에 나왔다. 위부터 비상한 관심과 의지가 없으니 맨날 장밋빛만 가득한 R&D 예산 증액이나 핵심을 비껴간 잔가지 규제나 푸는 껍데기 정책만 가득하다.

예산만 늘려 성공할 정책이라면 누가 와도 할 수 있다. 대학생이라도 할 수 있겠다.

아니다. 그래도 명색이 산업과 기업 정책이다. 기초 상식은 있어야 한다. 파일을 클라우드나 USB로 옮기면 무거운 컴퓨터를 집에 가져갈 필요가 없다는 정도는 아는 사람이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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