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흔히 말하는 '오덕'(Otaku)은 해당 분야를 잘 아는 '마니아'를 뜻함과 동시에 팬덤 등 열정을 상징하는 말로도 통합니다. IT조선은 애니메이션・만화・영화・게임 등 오덕 문화로 상징되는 '팝컬처(Pop Culture)' 콘텐츠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합니다. 어린시절 열광했던 인기 콘텐츠부터 최신 팝컬처 분야 핫이슈까지 폭넓게 다루머 오덕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 줄 예정입니다. [편집자주]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ベルサイユのばら)’는 1789년 발발해 왕정(王政)체제를 무너뜨린 ‘프랑스혁명'기의 베르사이유를 무대로 한 작품으로, 여자로 태어났지만 남자로 살아가야 했던 ‘오스칼'과 비운의 운명을 맞이하는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야기를 그렸다.

베르사이유의 장미 만화 일러스트. / 야후재팬 갈무리
베르사이유의 장미 만화 일러스트. / 야후재팬 갈무리
베르사이유의 장미는 1972년11월 30일, 출판사 슈에이샤의 만화잡지 마가레트를 통해 세상에 소개됐다. 만화는 원작자 ‘이케다 리요코(池田理代子)’의 대표작이다. 만화업계에 따르면 베르사이유의 장미 만화책은 일본에서 1500만부쯤 판매됐다. 한국에서는 1980년대 정식 수입본이 아닌 해적판으로 소개됐으며, 1993년 정식 라이선스 버전이 서점을 통해 판매됐다.

이케다는 2012년 NHK 방송을 통해 "베르사이유의 장미는 고등학생시절 읽은 소설가 슈테판 쯔바이크(Stefan Zweig)작 ‘마리 앙투아네트'의 매력에 눈 떠 그리게 된 작품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이케다가 1972년부터 1973년까지 2년간 그린 베르사이유의 장미는 그를 부동의 인기 작가 대열에 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오스칼 일러스트. / 야후재팬 갈무리
오스칼 일러스트. / 야후재팬 갈무리
참고로, 이케다가 1987년 책머리글에 쓴 내용에 따르면 만화에서 주인공 오스칼이 입은 근위대 및 위병(衛兵)군복은 프랑스 혁명기의 것이 아닌 나폴레옹이 황제로 집권했을 당시의 것을 바탕으로 제작된 것이다.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는 총 10권분량의 본편 외에도 ‘외전 검은 옷의 백작부인(外伝 黒衣の伯爵夫人)’과 1984년부터 1985년까지 연재된 ‘베르사이유의 장미 외전 명탐정 를루'가 존재한다. 검은 옷의 백작부인은 ‘흡혈귀’를 소재로 삼고 있으며, 1984년판 외전은 오스칼의 언니 오르탄스의 딸 ‘를루 드 라 로랑쉐'를 주인공으로 앞세워 ‘검은기사' 사건에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간다. 외전은 만화책으로 1권 분량이며, 애장판 및 완전판에 수록돼 있다.

원작자 이케다는 ‘앙드레 그랑디에'의 이야기를 담은 본편 11권과 당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관계 등의 이야기를 담아낸 12권 등 14권까지 베르사이유의 장미 이야기를 추가했다. 이케다가 2014년 마가레트 잡지를 통해 밝힌 이야기에 따르면 11권 앙드레편은 ‘타카라츠카'의 베르사이유의 장미 연극을 위해 만들어졌다.

타카라츠카의 베르사이유의 장미 연극 한장면. / 야후재팬 갈무리
타카라츠카의 베르사이유의 장미 연극 한장면. / 야후재팬 갈무리
이케다가 그린 만화는 일본유명 여성가극단 ‘타카라츠카(宝塚)’에 의해 1974년 연극 작품으로 공개돼 큰 성공을 거둔 것이 애니메이션 제작으로 이어졌다고 평가받는다.

타카라츠카 가극단 발표에 따르면 연극 ‘베르사이유의 장미'는 1974년부터 2006년 1월까지 모두 1500회 공연이 이루어졌으며, 2014년까지 500만명 이상이 이 공연을 감상했다. 타카라츠카 가극단은 자신들의 연극 작품 중 ‘베르사이유의 장미'가 사상최대 히트작이라 평가한다.

애니메이션 베르사이유의 장미 한장면. / 야후재팬 갈무리
애니메이션 베르사이유의 장미 한장면. / 야후재팬 갈무리
베르사이유의 장미 애니메이션은 일본TV 등 현지 방송국을 통해 총 40편 분량이 방영됐다. 제작은 도쿄무비신사(東京ムービー新社·현재 톰스엔터테인먼트(TMS))가 맡았다.

감독은 ‘나가하마 타다오(長浜忠夫)’다. 나가하마 감독은 애니메이션 마니아 사이서 ‘콤바트라 브이(V)’, 볼테스 파이브(V)’, ‘투장 다이모스', ‘미래로보 달타니아스’ 등 나가하마 로망 로봇 시리즈 제작자로 유명하다.

나가하마 로망 로봇 시리즈는 1970년대 중반까지 슈퍼로봇 애니메이션의 권선징악 스토리 라인을 깨부수고, 사랑과 갈등, 혈연과 숙명 등 어른이 봐도 괜찮을 만큼의 깊이 있는 인간 드라마를 로봇 애니메이션에 녹여내 당시는 물론 지금도 높은 평가를 얻고 있다.

애니메이션 베르사이유의 장미는 원작 만화에 녹아있던 ‘개그’ 코드를 뽑아 없애고, 전체적으로 무거우면서 진한 인간 드라마를 그려냈다. 또, 만화책에서 처참하게 표현된 디안느의 시체는 애니메이션에서 소프트하게 그려졌다.

애니메이션 베르사이유의 장미 한장면. / 야후재팬 갈무리
애니메이션 베르사이유의 장미 한장면. / 야후재팬 갈무리
오스칼이 단 한번 여자로서 드레스 복장으로 등장하는 페르젠과의 댄스 장면의 경우, 원작에서는 오스칼의 가슴과 등 부분이 천으로 가려진 드레스로 그려졌지만, 애니메이션에서는 가슴과 등이 과감하게 드러낸 디자인이 채용됐다.

이케다는 오스칼과 페르젠의 댄스 장면에 대해 "오스칼에게 웨딩드레스를 입힌 것이다"라고 현지 매체 인터뷰를 통해 밝힌 바 있다.

서로 부부의 연을 맺은 오스칼과 앙드레의 관계에 대해 원작은 서로 사랑을 확인하고 밤을 함께 보내기까지 시간이 걸리지만, 애니메이션의 경우 오스칼과 앙드에의 몸과 마음이 이어지는 장면이 37화를 통해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다.

애니메이션 잡지 아니메쥬 취재에 따르면 당시 애니메이션 제작진은 오스칼과 앙드레의 러브신을 최대한 아름답게 그려내기 위해, 통상 1주일이면 끝낼 작업을 3배가 더 긴 3주간에 걸쳐 그려냈으며, 그 결과, 원작에 없던 러브신을 반딧불이가 비추는 수준 높은 연출을 시청자에게 선사했다.

베르사이유의 장미 한장면. / 야후재팬 갈무리
베르사이유의 장미 한장면. / 야후재팬 갈무리
애니메이션 베르사이유의 장미에는 사라져 버린 24화 ‘불타버린 장미의 초상(燃えつきたバラの肖像)’편이 존재한다. 이는 본래 24화로 알려진 ‘아듀 내 청춘(アデュウわたしの青春)’과 다른 내용으로, 현지 방송국 편성 문제로 제작되지 않은 시즌3 분량 내용을 압축하고 새로운 그림을 담은 것으로 알려졌다.

불타버린 장미의 초상은 이후 일본 현지에서도 재방송되지 않았으며, DVD 등 비디오 콘텐츠에도 수록되지 않았다.

애니메이션 베르사이유의 장미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주제가'다. 가수이자 성우인 스즈키 히로코(鈴木宏子)가 부른 ‘장미는 아름답게 진다(薔薇は美しく散る)’는 화려하면서도 비극적인 운명의 주인공 오스칼을 잘 표현한 곡으로 팬들 사이서 평가받고 있다. 스즈키는 베르사이유의 장미 주제가가 자신의 가수 인생 첫 곡이기도 하다.

베르사이유의 장미 주제가. / 유튜브 제공

1990년 5월에는 극장판 애니메이션 ‘베르사이유의 장미'가 현지 개봉된다. 이 작품은 TV애니메이션을 편집해 재구성한 것으로, 일부 성우가 변경되고 몇몇 장면을 다시 녹음했다. 본래 비디오 콘텐츠로 1987년 출시됐으나, 프랑스혁명 200주년 다음 해인 1990년 극장가에 개봉됐다.

2007년 도쿄국제애니메이션페어에서는 21세기판 베르사이유의 장미 파일럿 필름이 공개됐다. 하지만, 현재까지 작품 완성에 대한 소식은 들려오지 안고 있다.

베르사이유의 장미는 실사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다. 화장품 제조사 시세이도(資生堂)가 투자하고 ‘쉘부르의 우산'을 만든 자크 드미(Jacques Demy) 감독이 제작한 이 영화는 프랑스 정부의 허가를 얻어 실제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촬영이 진행됐다. 오스칼 역은 영국 배우 ‘카트리나 맥콜(Catriona MacColl)’이 연기했다.

베르사이유의 장미 실사영화 한장면. / 유튜브 갈무리
베르사이유의 장미 실사영화 한장면. / 유튜브 갈무리
의욕적으로 제작한 실사 영화지만 흥행은 저조했다. 요미우리신문에 따르면 영화 제작에는 10억엔(108억원)이 투입됐지만 흥행수익은 9억3000만엔(100억원)에 그쳤다. 영화는 마지막 전투장면에서 오스칼이 죽지 않는 등 원작과 다른 내용을 담았다. 연출에 박력이 없다는 혹평도 받았다.

캐릭터 장례식 이끌어낸 ‘오스칼'

베르사이유의 장미 주인공 ‘오스칼 프랑소와 드 자르제(Oscar François de Jarjayes)’는 만화·애니메이션 속 가상의 캐릭터지만 현실세계에서 장례식이 치러진 유명인이기도 하다.

오스칼 일러스트. / 야후재팬 갈무리
오스칼 일러스트. / 야후재팬 갈무리
오스칼은 만화와 애니메이션에서 바스티유 감옥 습격전에서 시민혁명군을 지휘하다가 전사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오스칼의 사망은 당시 많은 만화 팬들을 충격으로 몰았고, 만화 팬들의 주도로 일본 현지에서 캐릭터 장례식이 치러진 바 있다.

1973년 당시 현지 매체 기사와 팬들이 남긴 문건에 따르면 오스칼 장례식에 참가한 팬들 상당수가 울음을 터뜨리는 등 캐릭터 이벤트 측면에서 볼 때 다소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장례식이 진행됐다고 알려졌다.

오스칼 장례식은 만화 ‘내일의 죠' 등장인물 ‘리키이시 토오루' 이후 두 번째다. 현지 만화업계에 따르면 오스칼 장례식 이후로 캐릭터 장례식 이벤트가 증가추세를 보였다.

일본 만화업계는 오스칼을 ‘남성같이 멋진 여성'의 선구자적인 캐릭터로 평가한다. 2005년 NHK방송에 따르면 오스칼 캐릭터에 반해 현실세계 남자친구와 약혼자를 버린 여성도 속출하는 등 사회현상을 일으켰다.

한편, 키 178㎝ 체중 58㎏ 가슴87 허리63 히프90, 금발에 다크블루 컬러 눈동자를 가진 중성적 매력을 지닌 미인 오스칼은 원작자의 남성심리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탄생한 캐릭터다.

원작자 이케다는 일본경제신문 인터뷰에서 "프랑스혁명에서 시민군의 선봉에 선 근위병 대장을 그려야 하는데, 당시 남자의 심리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남장여자라는 캐릭터를 만든 것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