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한중관계가 최근 부쩍 활발해진 양국 반도체·배터리 산업 교류를 계기로 ‘해동(解凍)’ 조짐을 보인다. 하지만 기술 유출과 투자 불확실성 우려는 가시지 않아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지적은 여전하다.

한국 기업들은 최근 대대적인 중국 투자와 합작사 설립을 제안했다. 중국 정부도 한국 기업 배터리 보조금 지급 가능성, 리커창 중국 총리의 한국 기업 공장 방문 등으로 한국 산업계에 호의적인 손짓을 보냈다.

SK이노베이션 BEST 공장 준공식 / SK이노베이션 제공
SK이노베이션 BEST 공장 준공식 / SK이노베이션 제공
삼성전자·SK하이닉스 中 대규모 투자…리커창의 ‘화답’

12일 중국 시안 시정부는 홈페이지에서 "삼성전자가 시안 2공장에 80억달러(9조3000억원)를 추가로 투자한다"며 "10일 강봉용 삼성전자 DS부문 경영지원실장 부사장과 왕하오 시안시 서기 등 관계자가 만나 내용을 공식화했다"고 밝혔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월 시안 공장을 찾아 사업 현황을 점검했다. 리커창 중국 총리는 10월 삼성전자 중국 시안 반도체 공장을 찾아 지원을 약속했다.

삼성전자 시안공장은 1공장과 2공장으로 구분된다. 삼성전자는 2012년 1공장을 착공, 2014년 상반기 가동했다. 70억달러(8조2000억원) 규모 투자를 바탕으로 2공장 1단계 공사가 진행 중이다. 이번 2단계 투자를 포함, 삼성전자 시안 2공장 투자 규모는 150억달러(17조5000억원)에 달한다.

SK하이닉스도 4월 D램 생산라인 확장 차원에서 중국 우시 공장 증설을 마쳤다. 이곳에서 10나노 공정 기반 D램이 생산된다. 기존 생산라인과 합해 월 최대 18만장 규모의 웨이퍼를 생산한다.

SK하이닉스는 우시 제2 D램 공장 증설에 약 9500억원을 투자했다. 중국 충칭 생산 공장에도 약 2700억원을 투자, 낸드플래시 후공정 라인 증설을 결정하고 공사 중이다.

SK하이닉스의 파운드리 자회사 SK하이닉스시스템아이씨도 우시 시와 합작 투자한 파운드리 공장을 2020년 1분기 내 준공할 계획이다.

SK하이닉스는 중국 사회공헌도 확대한다. 3억달러(3500억원)를 투자해 현지에 SK하이닉스 종합병원(가칭)을 설립하고 임직원과 지역 주민 자녀를 위한 명문 사립학교도 설립할 계획이다. 중국과 생산적으로 협력, 함께 성장한다는 ‘차이나 인사이더’에 전념하는 모습이다.

배터리 업계도 반색…중국 정부 보조금 지급 가능성

배터리 업계에 중국 시장이 열릴 전망이다. 중국이 전기차 배터리 시장 빗장을 열고 한국 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할 가능성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배터리 보조금 화이트리스트인 '신재생에너지차 보급응용추천 목록'에 한국 기업의 배터리를 품은 ‘테슬라 모델3 전기차'와 ‘베이징벤츠의 E클래스 플러그인하이브리드차’를 포함했다.

테슬라 모델3 전기차에는 LG화학 배터리가, 베이징벤츠 E클래스 플러그인하이브리드차에는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셀이 들어간다.

양사는 "2016년 이후 3년 만에 보조금이 지급될 가능성이 열려 기쁘다"며 기대감을 전했다.

SK이노베이션은 지난 5일 베이징자동차, 베이징전공과 합작해 중국 창저우에 배터리 공장 ‘BEST’를 열었다. 이 공장에서 SK이노베이션은 삼원계 배터리(NCM 배터리)를 생산한다.

BEST 공장은 시운전, 제품 인증 등을 마친 2020년 초부터 본격적인 양산에 들어간다. 생산한 배터리는 베이징자동차 외 중국에 거점을 두고 있는 전기차 업체 여러 곳에 공급할 예정이다.

LG화학도 올 초 중국 남경에 있는 배터리 공장 증설을 결정하고 1조2000억원 규모의 투자를 단행했다. 남경 신강 경제개발구에 두 개의 배터리 공장을 운영하는 LG화학은 빈강 경제개발구에도 2018년 10월부터 전기차 배터리 2공장을 짓고 있다.

냉철한 시각 필요 ‘신중론’도 나와

한국과 중국 반도체 및 배터리 산업계에서 연일 긍정적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지만, 냉철한 시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분석도 있다. 배터리 부문이 특히 그렇다. 중국이 한국 기업에 배터리 보조금을 지급할지 여부는 아직 미지수라는 것이다.

하나금융투자가 10일 발표한 ‘전기차 판가 하락과 중국의 배터리 빗장 해제’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의 전기차 보조금 지급은 ▲추천 목록 확정 ▲목록 포함 모델 중 최종 승인 두 단계를 거친다.

3월에도 한국 배터리 업체들이 납품하는 전기차가 추천 목록에 올랐지만, 최종 승인 단계에서 거절됐다. 이번에도 목록에 포함된 것뿐, 아직 최종 승인 단계가 남았다.

그간 중국은 한국 배터리 기업을 노골적으로 차별하며 보조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했다. 중국이 쉽게 보조금을 지급하겠냐는 신중론이 나오는 이유다. 배터리 납품사를 언제든 바꿀 수 있는 중국 체제의 특성을 고려한 해석이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과 교수는 "필요하다면 언제든 다시 한국 기업에 차별을 가할 수 있는 중국 체제의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 보조금 지급 대상에 올라 있는 전기차 배터리 납품사도 한국 기업이 아닌 타국 배터리 업체로 언제든 바뀔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 산업계는 2020년 본격화할 5G(5세대) 상용화, 급성장하는 전기차 시장이 낳을 반도체·배터리 수요를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세계 최대 규모 시장 중 하나인 중국을 공략하기 전, 중국 고유의 '불확실성' 변수를 신경 써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국 산업계는 예측 불가능한 위험을 피하고자 합작사 설립, 중국 정부를 통한 투자 등 대비책을 마련한다. 중국과 이익을 공유하며 시장을 넓히는 전략도 펼친다. 이들 전략이 낳은 지금의 긍정적인 분위기가 그간 얼어붙은 한중관계를 녹일 수 있을지 관심이 모인다.

기술 유출 우려도 여전하다. 세계 액정디스플레이(LCD) 산업 주도권이 중국에 넘어가는 과정에 대한 학습 효과 때문이다. 반도체는 LCD와 달라 중국 업체가 쉽게 따라올 만한 분야는 아니다. 초미세공정을 비롯한 기술 격차가 매우 크다. 중국 정부와 업계가 자금만 쏟아붓는다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따라잡을 수 없다.

하지만 한국업체가 중국에 투자를 늘리면서 자연스럽게 관련 장비와 소재업체들의 현지 진출도 늘기 마련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앞선 기술을 벤치마킹하면서 추격해올 수 있다. 후방산업까지 망라해 기술 보안을 단단히 해야 한다. LCD업체 하나가 넘어가면서 전체 LCD산업 패권까지 빼앗긴 전철을 반도체 분야에서는 밟지 않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중국 정부가 시장 개방을 자국 산업 보호와 대외 관계 도구로 쓴다는 점도 문제다. 사드 배치를 이유로 한국 게임의 시장 진입을 계속 막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