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은 에너지가 아니란 말이야?"

입력 2020.01.22 06:00

‘원자력만 없다!’

원자력 업계가 부글부글 끓는다. 원자력 관련 행사에 대통령과 국무총리는커녕 주무 장관조차 보기 힘들어졌다. ‘탈원전’이 아닌 ‘에너지 전환’ 정책이라는 청와대가 탈원전을 주창한 인사를 중용했다. 월성 원전 1호기 영구정지 결정을 둘러싼 잡음도 지속됐다. 한동안 정부 비판을 자제했던 원자력업계에 다시 비판의 목소리가 커졌다. 집단 행동 움직임도 나왔다. 올해 또한번 큰 갈등을 예고했다.

문재인정부가 에너지 정책에서 원자력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신년인사회로 가늠할 수 있다.

성윤모 산업부 장관(왼쪽에서 세번째) 등 참석자들이 떡 커팅을 하고 있다./사진 김동진 기자
21일 에너지업계 신년인사회가 열렸다. 원자력 업계 인사도 여럿 왔다. 지난 10일 따로 신년인사회를 했지만 에너지업계 일원이기에 이날 행사에도 참석했다.

축사를 한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태양광을 비롯한 재생에너지 설비 보급목표(2.4GW)의 초과 달성 등 성과를 나열하고 올해에도 집중 육성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원자력을 언급하지 않았다. 같은날 산업부 보도자료도 마찬가지다.

2020년은 원자력업계에 의미 있는 해다. 원전 수출 10주년이다. 그간 쌓은 기술력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원자력 2.0’을 준비하는 해다. 원자력 업계도 이를 10일 신년인사회 주제로 삼았다.

지난해와 달리 장관이 참석하지 않았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1차관이 참석했다. 주최측은 산업부와 과기정통부 장관을 모두 초청했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2019년 4월 600여명이 참석한 원자력연구원 60주년 기념식에 국무총리나 장관급이 없었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과기정통부는 장관이 반드시 참석해야 할 행사는 아니며, 장관이 신년 업무보고 준비로 바빠 올해 원자력업계 신년행사에 참석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산업부는 원자력 연구개발(R&S) 정책이 과기정통부 소관이라며 떠넘겼다.

원자력 업계는 섭섭함을 감출 수 없다. 가뜩이나 현 정부 들어 원전 홀대론으로 마음이 상한 업계다. 정부가 신재생에너지 만큼 원자력에 관심을 갖지 않더라도 최소한 원자력을 에너지산업으로 봐주길 바라는데 정부가 이조차 하지 않는다는 게 업계의 솔직한 반응이다.

더욱이 청와대는 지난 20일 기후환경비서관에 녹색연합 사무처장 출신 김제남(57) 전 정의당 의원을 선임했다. 그는 '탈원전'에 주장해왔다. 원자력 업계는 올해 탈원전 기조 완화는커녕 되레 심해질 수 있다고 걱정했다. 수십년간 에너지 자립을 위해 원자력 기술 개발에 매진했는데 자칫 그간의 성과마저 허물어지지나 않을까 우려했다.

전문가들은 현 정부 기조대로 원자력발전소를 더 짓지 않을지라도 여전히 이 분야 연구개발만큼 지속하고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는 한 투자업체 대표는 "정부 정책이 오로지 신에너지에만 쏠렸는데 앞으로 어떤 대안이 있는지 모르겠다"며 "지금 있는 원자력 에너지의 안정화라든지 투자할 분야가 많다. 절대 투자를 중단해선 안된다"고 주장했다.

에너지업계 신년인사회에 참석한 한 에너지정책 전문가도 현 상황에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이 전문가는 "원전 폐쇄까지 앞으로 60년이나 걸린다"며 "여전히 원자력이 에너지 발전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를 넘는 만큼 지속적인 투자와 관심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탈원전 정책 자체도 그렇지만 이에 반대하는 전문가들이 숨을 죽이는 분위기도 큰 문제다. 한때 정부에 몸 담았던 한 원자력 전문가는 정부 에너지정책에 대한 의견 질문에 "탈원전 반대 입장을 내놓은 후 말 한마디 하는 것도 부담스럽다"며 답변을 고사했다.

집권할 때부터 ‘소통’을 강조한 문재인정부가 원자력은 ‘불통’으로 일관한다. 그간 쌓인 업계 불만이 최근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이병령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은 지난 17일 '바른사회시민회의' 주최 토론회에 나와 ‘탈원전’정책을 ‘국정문란’으로 규정하고 조속한 폐기를 주장했다. 이 위원은 "지난 60년간 진보와 보수 정권 가리지 않고 원자력 기술을 키워왔다"며 "탈원전을 계속하면 원전기술이 완전히 소멸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장윤일 한국과학기술원(KAIST) 원자력 및 양자공학과 초빙교수는 21일 카이스트 세미나 강연에서 "원자력 선도국가 한국이 ‘탈원전’으로 위기를 겪는다"며 "지금은 더욱 과감한 투자로 한국 원자력 백년대계를 세워야 할 때"라고 말했다.

장 교수는 1993년 한국인으로는 처음 미국 원자력계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로렌스 상’을 받은 석학이다. 미국 아르곤 국립연구소 부소장과 소장 대행을 지낸 후 지난해 KAIST에 합류했다. 그는 "10년 동안 1조원 정도를 투자하면 원자력 선도국의 역할뿐 아니라 에너지 안보 확보 및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 될 것"이라며 "이 기회를 놓치면 인도, 중국 등에 따라잡힐 것"이라고 말했다.

업계의 우려와 비판은 점차 집단 행동으로 옮겨갈 전망이다. 월성 원전 1호기 영구정지 결정이 기폭제가 됐다.

‘에너지정책 합리화 추구 교수협의회’는 지난 14일 성명을 통해 "멀쩡한 월성원전 1호기를 졸속으로 영구정지해 한수원 경영과 국가 경제, 국민 안전에 피해를 줬다"며 즉시 철회와 재가동 추진을 주장했다. 원자력정책연대, 원자력국민연대 등 시민 2300여 명도 월성원전 1호기 영구정지 경제성 평가가 부당하다며 한수원 사장, 산업부 공무원, 회계사 등등 11명을 배임 등의 혐의로 20일 고발했다.

집단행동은 야당의 탈원전 정책 폐기 총선 공약과도 맞물려 앞으로 더욱 많아질 전망이다. 자칫 탈원전론자들과 결사적인 대결 국면으로 치달을 수 있다. 문재인정부 초기 탈원전 공론화 공방 때와 같은 갈등과 혼란을 올해 또한번 되풀이할 가능성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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