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이 좁은 땅의 식물도 다 못 보는 판에 어찌 다른 나라 식물을 보러 갈 수 있겠습니까?
전에는 이런 애국심 어린 핑계로 해외여행 갈 수 없는 경제적 사정을 교묘히 감춰 말하곤 했습니다. 그러다 작년 여름에 가정형편이 꽃피어 유럽 여행 갈 기회를 겨우 만들었습니다. 식물 탐사한답시고 백두산 주변이나 드나들던 우물 안 개구리가 드디어 우물 밖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으니 그게 다 혹사의 혹사를 거듭한 알바 덕분입니다.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이곳에서 보는 에펠탑이 가장 멋지다고 한다)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이곳에서 보는 에펠탑이 가장 멋지다고 한다)
첫 여행지는 프랑스였습니다. 프랑스는 유럽에서도 비교적 큰 면적을 가진 나라입니다. 국경과 몇몇 지역을 제외하면 고저 차가 많지 않고 광활한 편이라 테제베(TGV) 같은 고속전철이 다니기 좋습니다. 수도인 파리만 해도 산이라고 할 만한 곳이 없는 구릉지에 있기에 에펠탑이 파리 어디에서건 잘 보이는 랜드 마크가 될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 지형이 그렇다 보니 사람들의 지역적 왕래가 어렵지 않아 방언이 그리 발달하지 않았다는 가이드의 말이 신선하게 들렸습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면적은 작지만 복잡한 지형을 가졌기에 방언이 발달했다고 합니다. 높은 산을 비롯해 넓은 강과 바다는 지역적 단절과 고립을 만들고, 그것은 곧 사람의 왕래를 차단하는 역할을 하며, 그 폐쇄성이 결국 언어적 교류의 단절을 가져오면서 그 지역만의 은어나 방언을 심화시킨다는 사실이 당연하면서도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사실 그것은 언어뿐 아니라 동식물에도 적용되는 일입니다. 왕래가 빈번한 지형적 여건에서는 지속적인 교류가 일어나 먼 거리의 생물이더라도 서로 비슷한 형태를 보입니다. 하지만 지리적으로 동떨어지고 생식적으로 격리된 지역에서 끼리끼리 고립된 생활을 오래도록 이어가는 종일수록 결국 ‘엔더믹’(endemic)이라고 하는 고유종으로 진화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고립되고 특이한 지형을 많이 가진 나라일수록 고유종이 많은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언어가 동식물처럼 이동이 제한적인 지역에서 오래 존재하다 보면 그 지역 특유의 것으로 발달한다는 점이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따라서 프랑스에는 다양한 식물이 살 것 같지 않지만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프랑스는 유럽에서 볼 수 있는 해양성·대륙성·지중해성 기후가 모두 나타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지형적 특성보다는 기후적 특성이 다양한 식물이 자라게 하는 요소로 작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식물 탐사가 아닌 여행으로 간 프랑스지만 눈에 보이는 식물을 외면할 순 없었습니다. 숙소에 다 와 가는 버스 안에서도 눈에 들어오는 가로수에 눈이 돌아갔습니다. 가로수로 심어진 양버즘나무 사이에 잎의 모양이 다른 나무가 간간이 섞여 자라는 모습이었습니다. 국내에서는 보기 어려운 버즘나무일 거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다음 날 아침 일찍 나가서 확인해 보았습니다. 잎이 깊게 갈라진 게 역시 양버즘나무는 아니고 버즘나무 품종으로 보였습니다.

파리 시내의 가로수 중에는 버즘나무 품종이 간간이 심어져 있다
파리 시내의 가로수 중에는 버즘나무 품종이 간간이 심어져 있다
우리나라의 오래된 길거리에 가로수로 심어진 건 대개 양버즘나무입니다. 잎이 넓고 방울처럼 생긴 열매가 1~2개, 많게는 3개까지 달리는 점이 특징입니다. 그에 비해 버즘나무는 열매가 3~7개씩 주렁주렁 달리고 잎의 가운데 조각이 깊게 갈라진다고 하는데 국내에서는 보기가 어렵습니다. 춘천의 강원도립화목원에 버즘나무로 표시된 나무가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나무를 버즘나무가 아니라 양버즘나무로 봅니다. 열매가 3개 정도까지 주렁주렁 달리기는 하나 그 이상 달리는 걸 보기 어려운 데다 잎의 모양이 양버즘나무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강원도립화목원에 버즘나무라고 되어 있는 나무는 양버즘나무로 보인다
강원도립화목원에 버즘나무라고 되어 있는 나무는 양버즘나무로 보인다
강원도립화목원의 양버즘나무에 달리는 꽃과 열매
강원도립화목원의 양버즘나무에 달리는 꽃과 열매
열매가 세 개 정도 연이어 달리는 것은 홍릉수목원 주변 거리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 나무도 일반적인 양버즘나무의 잎을 하고 있어서 버즘나무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 걸 보면 열매의 개수도 중요하지만, 잎의 모습이 좀 더 중요한 식별 포인트로 보입니다.

홍릉수목원 길가의 양버즘나무에도 이 정도 열매는 달린다
홍릉수목원 길가의 양버즘나무에도 이 정도 열매는 달린다
어쨌든 그래서 국내에는 버즘나무가 없다고 단정 지었는데 천리포수목원에 버즘나무 ‘오텀 글로리’(Platanus orientalis ‘Autumn Glory’)라는 품종이 심겨 있다고 합니다. 오텀 글로리 품종은 잎이 깊게 갈라지는 점이 특징입니다.
단풍버즘나무라는 것도 있습니다. 그건 잎의 가로 길이와 세로 길이가 비슷하고 열매가 여러 개 달리는데 열매마다 자루가 있는 점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국내에는 아직 심어지지 않은 종으로 보입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파리의 숙소 주변에서 제가 본 건 ‘버즘나무 Minaret’이라는 품종으로 보입니다. 가이드의 쇼핑 안내로 간 파리 시내의 어느 공원에서 잎이 조금 다른 종류를 봤는데, 그건 ‘버즘나무 Digitata’라는 품종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외에도 버즘나무에는 여러 품종이 있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아마 그런 품종에 일일이 신경 쓰지 않은 채 모두 플라타너스겠거니 하고 심었을 것입니다.

파리 시내에서 본 ‘버즘나무 Minaret’ 품종
파리 시내에서 본 ‘버즘나무 Minaret’ 품종
파리 시내 공원에서 본 ‘버즘나무 Digitata’ 품종
파리 시내 공원에서 본 ‘버즘나무 Digitata’ 품종
그런 버즘나무 품종 빼고 대개는 다 양버즘나무였습니다. 개선문이 있는 샹젤리제 거리에서 수시로 풍겨오는 길거리 흡연을 간접 흡연하며 버티고 선 나무도 모두 양버즘나무였습니다.

샹젤리제 거리의 양버즘나무는 간접 흡연을 피할 수 없다
샹젤리제 거리의 양버즘나무는 간접 흡연을 피할 수 없다
양버즘나무는 원래 그런 악조건 속에서 잘 자라는 나무이기에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많이 심었습니다. 1970년대에 조성된 석촌호수에 플라타너스 길이 생겨난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사실 그들은 은행나무와 함께 서울의 거리를 책임지는 가로수로 심어졌습니다. 하지만 몇십 년이 지나면서 너무 크게 자라난 탓에 지금은 봄마다 무자비한 전정에 처참히 잘려 나가는 신세가 됐습니다.

석촌호수 플라타너스 길
석촌호수 플라타너스 길
마로니에의 나라답게 프랑스 곳곳에서 마로니에(가시칠엽수)가 보였습니다. 에펠탑 주변은 물론이고, 우리가 흔히 세느강이라고 부르는 센강에서도 시민들의 쉼터가 되어주는 엄청난 키의 나무가 뭔가 싶어 살펴보면 마로니에였습니다. 마로니에는 세계적인 공원수로, 칠엽수와 비슷하지만 열매 표면이 매끄럽지 않고 철퇴처럼 생겼습니다. 우리나라에 마로니에공원이라는 이름을 안겨준 나무지만 정작 혜화역의 그 장소에 있는 노구의 그 나무는 마로니에가 아닙니다. 그건 경성제국대학 시절에 일본인 교수가 심은 칠엽수(일본칠엽수)입니다. 물론 그 주변에 진짜 마로니에가 몇 그루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건 마로니에공원에 마로니에가 없다는 사실을 안 누군가가 훗날 심은 것으로 보입니다.

센강변의 거대한 마로니에
센강변의 거대한 마로니에
양버즘나무나 마로니에처럼 우리나라에서 이제는 대접받지 못하는 신세가 된 나무들이 왜 프랑스 파리에서는 잘 자라고 있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 정서에는 역시 우리 정서적에 맞는 우리 나무가 좋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남의 나라 따라가기에 바빴던 시대를 지나 이제 우리 것이 세계적인 것이 되어가는 시대입니다. 가로수나 공원수도 우리 나무가 세계적인 나무로 선택될 날이 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 외부필자의 원고는 IT조선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동혁 칼럼니스트는 식물분야 재야 최고수로 꼽힌다. 국립수목원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혁이삼촌’이라는 필명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