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시중의 테크노 철학] 왜 미국은 '기생충'과 '샌더스'에 열광하는가?

  • 남시중 박사
    입력 2020.02.14 06:00

    ① AI 연인과 ‘플라토닉 러브'를? ② 왜 미국은 '기생충'과 '샌더스'에 열광하는가?


    남시중 박사
    개인 컴퓨터는 80년대 후반, 인터넷은 90년대 초반, 휴대폰은 90년대 후반에 대중화했다. 한국의 50대 이상은 대학을 마칠 때까지 컴퓨터와 친해 보지 못한 세대이다. 지금 한국의 40대도 인터넷 없이 성장한 세대이다.

    한국의 중년에게 묻고 싶다. "인터넷과 스마트 폰으로 당신은 더 행복해졌는가?" (30대 이하는 답할 수 없다. 인터넷, 컴퓨터, 스마트 폰이 없는 삶을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으니.)

    컴퓨터와 인터넷이 등장하던 시기에, 즉 정보기술이 세상을 바꾸어놓기 시작하던 초기에, 기술 혁신은 무조건 경제 성장과 생산성 향상 그리고 더 나은 삶으로 이어진다고 믿었다. 이를 의심한 경제학자를 단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실리콘 밸리의 엘리트는 ‘기술 혁신은 향상된 인간의 삶으로 이어진다’는 ‘기술 유토피아’(techno utopia)를 지금도 사이비 종교처럼 믿는다.

    이제 30년 세월이 흘렀다. 컴퓨터 산업과 인터넷으로 경제는 성장했을까? 생산성은 향상되었으며, 그 결과 정말 더 나은 대중의 삶으로 이어졌을까?

    확인된 결과는 배신의 분노만을 부른다. 경제는 성장하지 않았다. 노동 생산성은 되레 하락했다 (경제학자들에겐 이게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다).

    "기술혁신이 경제성장과·생산성 높일 것"
    ‘신기루’로 드러나자 입 닫은 경제학자들
    삶 개선 없이 ‘디지털 스트레스’만 폭증

    인터넷과 스마트 폰으로 인간은 각자의 디지털 공간에 고립되어 스트레스와 정신 질병만 증가했다. 특히 청소년 정신 질환은 지난 10년간 계속 폭증하고 있다. 청소년들은 이제 스마트 폰을 아예 안고 잠을 자는 지경이다.

    우리 모두 24시간 계속되는 ‘디지털 스트레스’ (digital stress)에 시달린다. 20만 년 전이나 지금이나 호모 사피엔스의 DNA는 그대로이다. 현대의 정보 과잉을 감당하도록 현생 인류의 몸과 뇌는 진화하지 못했다. 딱 꼬집어 설명하기 어려운 정신적 피로에 시달린다.

    디지털 시대의 스트레스는 기술 자본주의의 본산, 미국에서 가장 심하다. "50년 전과 비교해 삶이 더 나아졌는가?"라고 물은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의 설문조사에, 미국인 30%만이 긍정적으로 답했다.

    요즘 미국인은 컴퓨터와 인터넷이 없던 60~70년대를 그리워한다. 그 시대를 복고한 드라마가 대유행이다. (소수민족 수가 늘면서 백인들끼리 잘 먹고 잘 살던 지난 시대가 그리운 탓이기도 하다.)

    기술 혁신은 당연히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진다고 믿었다. 경제학적 상식이었다. 그런데 미국의 생산성은 지난 16년간 계속 하락하는 추세다. 경제학자들은 말문이 막힌다. GDP 증가율 역시 지지부진한 답보 상태다. 기술 혁신으로 도대체 뭐가 더 좋아졌는지 내세울 객관적 지표가 하나도 없다.

    미국의 실업률은 지난 1월 3.6%로 매우 낮은 상태로 떨어졌다. 트럼프의 가장 큰 자랑거리다. 하지만 노동참가율은 2000년을 정점으로 계속 떨어진다. 이제 60% 이하로 접근하려는 추세이다. 실업률이 낮은 이면에 아예 취업하려는 노력 그 자체를 포기한 사람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미국 실업률은 구직자만을 상대로 집계된다.)

    서민들에게는 삶의 질이나 먹고 사는 일이 모두 최악이다. 하지만 거시 경제 지표는 나쁘지 않다. 주식 시장은 10년째 활황이다. 미국 주식 시장은 5년을 기점으로 불황과 호황을 반복하는데 이번 호황기는 이상하리만큼 오래 간다. 금권정치의 새로운 면모라고 지적하는 이는 없다.

    미국 중앙은행은 주식시장에 ‘몰빵'한 경제 귀족을 위한 금융 정책을 펼친다. 주가가 내려갈 듯하면 무조건 금리를 내린다. 금리를 내려도 인플레가 발생하지 않는다. 돈을 아무리 풀어도 돈은 귀족들 사이에서만 돌기 때문이다. 미국 주식 시장은 돈 있는 귀족의 잔치일 뿐이다.

    어느 순간 사람들이 스마트기기에 사로잡혀 옴짝달싹하지 못한다./사진 제공: Artyom
    기술 혁신이 더 나은 대중의 삶으로 이어진다고 모두 믿었다. 현실은 그 반대다.

    과학기술의 보급으로 생산성과 경제 성장이 획기적으로 높아질 것이라는 경제학자들의 ‘상식적 전망'은 경제 지수와 통계로 확인되지 않는다. 오히려 금융 거래의 컴퓨터 자동화로 금융위기가 왔다는 지적이 옳다 (대형 투자기관의 주식 채권 선물 거래는 이제 대부분 인공지능(AI)이 집행한다).

    노동생산성에 관한 세계적 전문가인 로버트 고든 노스웨스턴 대학 경제학 교수는 정보통신 기술이 실제 생산성 향상에 미치는 영향은 지극히 제한적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정보통신 이외의 타 업종에는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쉽게 말해, 실리콘밸리 사람들만 돈 벌고 나머지는 다 망한다는 얘기다).

    경제지수와 여론조사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난감한 현실을 보여준다. 그러면 기술 혁신으로 인간의 삶은 되레 악화했는가?

    삶의 질은 객관화된 지수와 통계로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느낀다. 왠지 피곤하다는 걸. 인터넷으로 24시간 업무와 사생활의 구분이 없다. 인간의 뇌와 시력은 1억 년 이상 진화해 온 포유류의 생물학적 기관이다. 컴퓨터와 스마트 폰 스크린을 보고 연산 처리하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디지털 스크린 광채는 시 신경을 공격해 우리 뇌를 극도로 피곤하게 만든다.

    디지털 정보 과다는 각종 심리적 부작용으로 나타난다. 인간 뇌에 가중되는 디지털 스트레스는 이미 한계 수준에 달했다. 그 피해는 어려서부터 디지털 시대를 살아온 청소년층에서 가장 심하게 드러난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우울증, 자폐, 관계 부적응, 자살 충동 등 각종 정신 질환을 앓지 않는 청소년이 드물다. 한국을 포함한 선진국의 증가하는 이혼율과 추락하는 출산도 현대 사회의 디지털 스트레스를 반영한다.

    스트레스 탈출을 위해 도파민을 촉발하는 물질적, 순간적 향락에 더욱 집착한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보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막대한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정치·사회적으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악화일로인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다. 미국의 소득 상위 0.1%가 전체 인구 90%와 맞먹는 부를 독점한다.

    금융과 기술 겉모습만 바꾼 경제귀족들
    금권정치 넘어 아예 직접 정치까지 넘봐
    꼭두각시 정치권은 데이터 조작과 선동 일삼아

    인류 역사는 힘 있는 소수가 다수를 착취해온 야생 동물의 역사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가진 자’와 ‘없는 자’의 차이가 이렇게 공개적으로 노출된 적이 없다. 과거 유럽의 귀족은 평민 앞에서 사치를 드러내지 않았다. 최소한 공적인 도덕률을 지키는 척을 했다. 지금의 경제 귀족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조차 아예 없다.

    당대에 일약 귀족이 되다보니 귀족의 사회적 책임을 배우지 못했다. 부를 드러내놓고 과시한다. 부를 과시하면서 착취를 계속하면 반란이 일어났다는 역사를 알 리가 없다.

    빈부격차는 컴퓨터와 인터넷이 대중적으로 보급된 선진국에서는 예외 없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확대되는 소득 격차의 ‘진짜 주범은 급속한 정보 기술의 발달에 있다’라고 용감하게 지적했다. 하지만, 적극적이고 현실적인 대책을 내놓는 국가나 정부는 없다.

    미국의 경우, 컴퓨터 생명공학 같은 첨단 기술의 진보는 고학력 지식 노동자의 임금 급상승을 초래했다. 반면 제조업 자동화는 블루칼라 노동자들을 하층 빈민으로 전락시켰다. 신기술로 인한 엄청난 수익은 기술시대의 신 귀족에게만 돌아갔다. 미국 민중이 아마존과 페이스북에 분노하는 이유이다 (그러면서도 사용을 멈추지 못한다).

    정보기술을 구현하거나 따라잡을 수 없는 후진국은 더욱 낙후한다. 인터넷으로 선진국의 삶에 노출된 후진국의 가난한 노동자는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는다. 기존 질서를 지키려는 제국주의 전쟁으로 난민은 양산되고 선진국 사회가 모두 골머리를 앓는다.

    미국의 새로운 부는 이제 실리콘밸리에서 창출된다. 하루가 멀다 하고 백만장자가 양산된다. 너무 많은 부를 한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배출하다보니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백만장자라 해도 전세살이도 어려운 지경이다. 반면 산업단지인 미국 중서부와 남부에서는 제조업 공동화로 실업자가 양산된다. 거리에는 마약 중독자만 늘어난다.

    모든 부가 강남에 집중하고 지방의 산업 단지는 공동화하는 한국의 부익부 빈익빈이 미국에서는 30년째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계급 간 이해관계가 얽히는 소득분배 구조와 복지 정책은 쉽게 조정되지 않는다. 19세기 자본주의 부작용에 대한 반발로 나온 사회주의 분배 방식이 정보기술 시대의 부작용을 해결할 수도 없다.

    소득 격차가 벌어지는 원인 중에는 기술 진보와 궤를 같이하는 노동 정책과 교육 개혁, 그리고 저소득층 보호를 위한 복지 정책의 실패가 빠질 수 없다. 금권정치로 몰락한 미국 민주주의 체제는 이를 체제 내에서 개혁하지 못한다. 미국은 의회나 대통령 선거로 조정이 불가능할 정도로 타락했다. 지난 2010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여러 형태로 물밑에서 진행해온 금권정치를 아예 합법화해버렸다. (자세한 설명은 위키피디아 참조.)

    미국 지배 계급의 과한 욕심이었다. 민중은 체제 내에서 일단 반란을 시도한다.

    예상치 못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이다. 미국 언론은 ‘저열한 사기꾼’이 어떻게 쟁쟁한 공화당 내 경쟁자를 모두 물리쳤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대통령 남편을 뒤에서 조정했으며 상원의원과 국무장관을 역임한 여장부 클린턴을 어떻게 꺾었는지 지금도 납득하지 못한다. 기존 체제는 모두 부정하고 뒤집어엎자는 민중의 심리를 읽지 못한다.


    금권정치 혁파를 내세운 ‘샌더스 돌풍'은 체제 내에서 이루어지는 민중 반란이다. / 사진 제공 Sasan Rashtipour
    어느 시대나 미국 대통령 개인은 지배 계급의 꼭두각시일 뿐이다. 의회를 통과해야 하는 모든 정책 중에 미국 대통령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귀족의 성과 재산을 공격하지 않는 한 트럼프 개인의 성추행이나 ‘미친놈 짓’도 눈감아 준다.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CNN> 같은 미국 주류 언론이 아무리 트럼프 개인의 저속한 행동과 막말을 비판해도 여론이 꿈적도 하지 않는다. 광고 감소로 언론은 생존하기도 힘든 처지이다. 트럼프의 돌출 행위를 연예인 뉴스처럼 다룬다. 그나마 이게 장사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정작 중요한 민중의 삶과 정책에 대한 논의는 좌파 언론이든 우파 언론이든 다 실종됐다. 언론 엘리트 역시 민중의 삶과 거리가 먼 물질적 풍요에 젖어 있다.

    엘리트 언론이 주도하던 여론 형성이나 정부 비판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얘기다. 권력자도 이제 언론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가 1면으로 아무리 때려도 여론을 형성하지 못한다. 신문이나 방송이 아닌 유튜브를 보는 시대이다. 기성 언론은 신문이든 텔레비전이든 모두 힘이 빠져 있다.

    정치인은 여론을 직접 조작할 수 있다. 언론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트럼프식 막말과 정치적 돌출 행동이 미국의 주 정부와 지방 자치단체까지 퍼져나간다. 유럽도 감염된다. 한국 정부도 야당을 막 대하고 실정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트럼프가 모든 언론을 ‘가짜 뉴스'라고 폄하하고 막말 트위터 정치를 해도 지지도는 오히려 올라가는 기현상이 벌어진다.

    19세기 계몽주의 철학에 기초한 미국 민주주의는 무너지고 있다. 현 자본주의 체제를 대체할 정치 철학이나 이념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 시대의 존 로크 (John Locke)를 찾을 수 없다.

    우선 지배 계급 내부에서 아직 위기에 대한 인식이 없다. 대중의 삶을 걱정하는 양심적 공론에 귀를 기울이는 시대도 아니다. 한국의 <창작과 비평> 같은 지식인 잡지는 미국에서도 이미 다 도산한 지 오래다. 스마트폰을 안고 자란 신세대는 트위터 제한자수를 넘는 글은 답답해서 쳐다보려 하지도 않는다.

    막말과 거짓말을 서슴지 않는 부동산 업자가 백악관을 장악한 데 충격받은 미국 지식인과 좌파는 엄청 다급하다. 탄핵에서 살아난 트럼프의 인기는 올라간다. 저 ‘개망나니’가 다시 집권하는 것을 도저히 견딜 수 없다. 하지만, 도대체 누가 나서서 막을 수 있을지 대안도 없다. 오죽하면 철 지난 ‘사회주의 혁명'을 50년간 외친 78세 고집불통 유태계 노인에 매달릴까.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선전하는 버니 샌더스/조선DB
    트럼프를 당선시킨 미국 민중의 분노는 이번 대선에서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을 통해 표출된다. 우로 간 시계 추는 좌로 갈 수밖에 없다. 트럼프나 샌더스를 믿어서가 아니다. 지배계급과 현실에 대한 반란일 뿐이다.

    미국 귀족은 좌우 가릴 것 없이 샌더스 저지에 총력을 기울일 것이다. 샌더스가 민주당 후보가 된다면 좌파 귀족은 차라리 트럼프를 찍을 것이다. 사회주의의 부패와 탄압을 기억하지 못하는 미국 젊은이는 그래서 더더욱 샌더스에 열광한다.

    미국 지배 계급은 샌더스를 가장 두려워한다. 진짜 미친놈은 트럼프가 아니라 샌더스라고 생각한다. 스스로가 밝힌 ‘민주적 사회주의자’(democratic socialist)가 아니라 ‘원조 공산주의자’라고 믿는다. 대통령이 되면 자신들을 공격하기 위해 정말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팽배하다.

    대항마로 바이드 전 부통령을 밀었다. 그런데 가벼운 치매 증세가 있는지 연설이 오락가락한다. 아들은 아버지 이름을 팔아 로비스트로 호위 호식했다. 미국 귀족은 바이든 카드를 버렸다. 지난해 말부터 돈줄이 마른다. 아이오와 뉴 햄프셔 경선에서 모두 참패한 바이든의 탈락은 시간문제다.

    바이든을 대신해 구원투수 블룸버그가 등판했다. 미국 귀족의 대안이다. 샌더스를 저지하고 기득권 세력을 지켜줄 희망이다. 당내 경선에서 샌더스 돌풍이 일자 민주당 귀족이 가장 당황한다.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다는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마스 프리드만은 "샌더스는 트럼프 재선을 의미한다. 우리는 블룸버그를 밀어야 한다"며 민주당원을 향한 호소문을 내놓기까지 했다.

    트럼프의 저속함과 정신병 수준의 나르시시즘에 공화당 귀족도 속으로는 다들 지쳤다. 영국계나 유태계 경제 귀족은 사기꾼 출신의 독일 이민자 손자인 트럼프를 그 전에도 이류 부동산 업자로 경멸했다. 같은 클럽의 일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 귀족은 대부분 블룸버그를 밀 것이다.

    여기서 미국인 모두가 놓치는 사실이 있다. 미국은 더이상 금권정치도 아니다. 여야 모두 경제 귀족이 직접 나서 정치하는 시대로 넘어왔다.

    오만으로 위기의식조차 없는 지배계급
    일거수일투족 대중 노출 현실 인지 못해
    커진 민중의 분노와 반란 조짐 못 읽어


    미국식 민주주의도 기술 자본주의 형태의 권위주의로 변질되고 있다. 금권정치 혁파를 내세운 ‘샌더스 돌풍'은 체제 내에서 이루어지는 민중 반란이다. 그러나 그 역시 좌파식 국가 권위주의 체제로 회귀하고자 하는 시도다.

    샌더스가 간판으로 내세운 "모두에게 메디케어를"(Medicare for All)이란 한마디로 사 보험을 모두 폐지하자는 발상이다. 미국에서는 매우 과격한 주장이다. 현 60세 이상 노인에게만 적용하는 (‘메디케어’란 이름의) 연방정부가 직접 운용하는 국가 의료보험 체계로 단일화 하자는 제안이다.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선진국이 그런 원칙 하에서 의료 보험을 운용한다. 사보험으로 일관해온 미국에서 국가 주도의 단일화된 보험으로 가자는 주장은 정치 혁명으로만 가능하다. (만약 그게 이루어지면 ‘혁명'이라 불러주어야 한다.)

    샌더스의 정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연 1조 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6300개가 넘는 미국 의료 보험 업체가 모두 도산해야 한다. 보험업체 주주들의 재산을 누가 그렇게 침해할 수 있는가?

    샌더스가 설혹 대통령에 당선되어도 의료보험 업계 로비를 받는 의회가 저지한다. 민주당이 양원을 모두 장악한다는 가정하에 설혹 의회를 통과한다 해도 공화당 출신이 장악한 연방대법원이 위헌 판결을 내릴 게 확실하다.

    샌더스 좌파는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 한다. AI 시대에 철 지난 사회주의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걸 미국 아이들은 모른다. 소련이나 사회주의 몰락은 역사책에서도 읽은 적이 없다. 안타깝게도 대안이 없다.

    이도 저도 아니면, 더는 밀릴 곳이 없는 다수 민중에 의한 ‘피의 혁명'이 불가피하다. 연방이 해체되거나 남북전쟁과 유사한 분열이 일어날 수 있다. (미국의 정치와 역사를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는 사람만이 이런 가능성을 일축한다.)

    지금 미국 민중이 반란하는 이유는, 그들이 (세계적 기준이나 과거에 비해) 정말 가난해서가 아니다. 인간에게 늘 문제가 되는 건 상대적, 심리적 빈곤이다. 다 같이 가난하면 다 같이 행복할 수 있다. 문제는 누구는 잘 살고 누구는 못 사는 게 아니다. 누구는 너무나, 너무나, 너무나 잘 살고 누구는 못 사는 게 문제다.

    호모 사피엔스는 질투와 시기를 자제하지 못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포유류 동물이다. 모든 포유류 동물은 집단 내에서의 자기 지위를 가장 중요시한다. 목숨을 걸고 싸우도록 DNA 알고리즘이 만들어져 있다. 그렇게 싸워 이긴 놈들만 후손을 남겼다. 시기와 질투는 인간 유전인자에 박힌 생물학적 생존과 번식의 원동력이자 알고리즘이다.

    세계 최대 갑부인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와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가 미국 타블로이드를 장식한다. 미국 민중은 이제 연예인보다 귀족의 ‘가십'을 알고 싶어 한다. 왕족과 귀족의 가십은 대개 반란 폭동 직전의 징조다.

    아내와 이혼하면서 천문학적인 위자료를 준 제프 베조스/아마존 제공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코미디언이 베조스를 비꼰다. 다들 아마존을 이용하면서 왜 그를 욕할까? 그가 조강지처를 버리고 연예인과 놀아났기에?

    실제로는 갑부들의 삶이 대중 매체와 인터넷에 지금은 다 노출됐기 때문이다. 그들이 얼마나 물질적인 사치를 부리는지 인터넷을 통해 다 본다. 인터넷 시대에 시기와 질투는 하늘을 찌른다.

    빌 클린턴이 백악관을 떠날 때 빚만 1600만 달러였다 (대부분 르윈스키 사건 변호사 비용이다). 지난 2017년 힐러리 클린턴이 대선 출마 전 공개한 세금 보고서를 보면 부부의 자산이 2억 4000만 달러로 불어났다.

    도대체 어떻게 저런 부를 짧은 시기에 축적했을까? 대부분 강연료와 인세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시간 당 백만 달러 강연은 그 자체가 귀족 로비의 한 형태이다. 공직에 있었던 사람이 자가용 비행기와 요트를 타고 다니고 연예인과 파티를 하면서 사치를 부린다. 누가 힐러리를 찍겠는가?

    오바마 전 대통령도 퇴임하자마자 일약 4000만 달러 수준의 부를 축적했다. 그의 마누라도 책과 강연으로 돈벌이에 바쁘다. 불법은 아니다. 하지만 미국 민중은 이런 전직 대통령들의 ‘누워 떡 먹기’식 부의 축적을 정서적으로 용납하지 못한다.

    부시는 이라크 전쟁으로 미국을 망가뜨리고 백악관을 떠난 실패한 대통령이다. 임기 마지막에 지지율이 24%에 불과했다. 하지만 클린턴과 오바마의 돈벌이에 눈살을 찌푸리는 민중은 오히려 부시 대통령에게 지금은 존경을 표한다. 집에서 조용히 그림만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땅덩어리가 대륙인 나라다. 가난한 이들은 잘 사는 이들이 얼마나 잘 사는지 알지 못했다. 사는 동네가 다른 게 아니고 거주하는 도시 자체가 다르다. 직접 보거나 접근 자체가 불가능하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끼리, 부자는 부자끼리 어울리며 살아온 나라가 미국이다. 아이들이 같은 학교를 다니지도 않는다. 서로 부닥칠 일이 없다. 빈부갈등도 없었다.

    노동으로 번 부를 존경하는 청교도 정신을 이어받은 미국에서는 돈 번 이들을 누구보다 존경한다. 한국식 사농공상이 아니다. 미국은 상공농사이다. 성공한 기업인이 최고의 영웅이다. 모두가 맨손으로 미국에 와서 열심히 일해 돈을 번 이민자이거나 그 후손이다. 노동과 부를 신으로 모시는 나라다.

    인터넷 시대에 들어 돈과 노동에 관한 청교도적 신념이 무너진다. 결정적인 계기는 2007년도에 터져 나온 미국의 ‘서브프라임 금융 위기’다. 미국 민중은 그때 처음 깨달았다. 미국에서 돈을 가장 잘 버는 월가의 귀족들이 ‘사기’로 돈을 벌고 있었다는 사실을.

    정부가 마구 찍어낸 달러를 무이자로 받아 고리의 신용카드나 주택 융자로 돈놀이를 하고 있었다. 돈을 벌면 자기들이 다 먹고, 돈을 잃으면 국민 세금으로 막는 정부 금융정책도 그때 알아버렸다.

    경제 귀족의 손에 놀아나는 정치인은 우파고 좌파고 구분이 없다. 미국에서, 공화당이냐 민주당이냐 혹은 좌냐 우냐 하는 건 그냥 스타일의 차이일 뿐이다. 다 철저한 귀족 자본주의다. 같은 포도주에 라벨만 다르다.

    민중 편을 들어주리라 믿었던 민주당 오바마 대통령이 이를 배반했다. 흑인을 무시하고 오히려 백인 귀족 편을 들었다. 성공하면 더욱 백인 눈치를 보는 미국 엘리트 흑인의 전형이다. 민중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드디어 2011년 8월 17일 미국 민중의 대규모 시위가 촉발했다.

    월가 시위대/블룸버그·조선DB
    이른바 "월가를 점거하라"는 구호 아래 시작된 시위는 미국 951개 도시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진행됐다. 공원이나 광장 같은 공공장소를 점거한 시위가 무려 4개월 이상 지속되었다. 미국 역사상 이런 규모의 시위는 없었다. 하지만 평화적 시위로 기존 질서를 변혁시킬 수 없다.

    미국 공화당 대통령이 만약 경찰력을 동원해 강제 해산을 시도했다면 사태는 미국판 4.19로 번져나갔을지 모른다. 하지만 오바마는 현명하게 시위대 스스로 힘이 빠지도록 끝까지 기다렸다.

    미국 민중의 의식은 변했다. 더이상 돈 번 이들을 존경하지 않는다. 실리콘 밸리에서 일약 거부가 된 페이스북의 저커버그 같은 ‘컴퓨터 너드’를 이제 경멸한다. 알고 보니 그냥 운이 좋아 돈을 벌었다고 본다.

    실리콘밸리 엘리트는 학창 시절 문학 책 한 권 읽은 적이 없다. 연애 한 번 해본 적이 없는 사회 부적응자들이 대부분이다. 컴퓨터 수학 하나 잘한 걸로 그냥 다 먹는다.

    미국 민중도 한국 서민이 강남 부자를 바라보는 시각을 닮아간다.

    한국 영화 ‘기생충'이 왜 미국에서 그토록 환영을 받았을까? 한 영화평론가는 소득격차를 한국적 맥락에서 흥미롭게 그려낸 블랙 코미디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가한 답일 뿐이다.

    미국인에게 ‘기생충'은 새로운 도덕관에 확신을 던져준 영화다. 부를 존경하는 청교도 사고에 정면으로 반하는 한국 서민의 말세적 도덕관을 보여줬다.‘부자는 나쁜 사람이다'라는 한국식 사고가 진실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한국도 그렇지만 미국에서도 민중은 영화에 나오는 건 다 진실이라고 착각한다.)

    기우가 담벼락을 높이 쌓은 부자 동네에 있는 박사장 집을 언덕길을 오른다. / 영화 ‘기생충’ 스틸컷
    ‘기생충’에서 나온 가난한 집 사람들은 가난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부자가 오히려 없는 사람의 눈치를 본다. 자신이 확보한 부가 늘 불안하다. 가난한 이들이 ‘선'을 넘어올까 늘 걱정한다.

    가난한 이는 똑똑하고 영민하다. 부자는 어리벙벙하다. 부자로부터 훔치는 것에 조금도 죄책감이 없다. 그들의 부를 훔치고 빼앗아야 한다고 은연중에 설득한다. 극단적으로는 부자를 살인하는 것마저 정당화된다. (봉준호 감독이 이런 도덕적 메시지를 의도했는가 안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미국인들이 그렇게 읽었다는 얘기다.)

    부자들 눈속임과 위선 알아챈 대중들
    존경은커녕 ‘악인’ 규정하고 조롱
    무너진 도덕관 보여준 영화 ‘기생충’

    인터넷과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월가는 손가락 하나 안 움직이고 그냥 돈 놓고 돈 버는 장소로 변했다. 실리콘밸리에서는 ‘너드’(nerd) 신흥 귀족이 등장했다. 다들 하루아침에 백만장자가 되고 억만장자가 된다. 그래도 자기 재주이겠거니 하고 있었다.

    그런데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돈 번 사람들은 다 ‘사기꾼’이란 걸 알아 버렸다. 육체노동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월가나 실리콘밸리의 두뇌 작업은 진정한 노동으로 보이지 않는다.

    돈으로 돈을 버는 게 현대 금융 경제라는 걸 미국 민중은 이미 알아챘다. 부를 정당한 노력의 대가로 인정하지 않는 한국 사람의 시각도 체득했다. 영화 ‘기생충'의 타이밍은 절묘했다.

    불행히도, 우리 모두의 삶을 피폐화 하는 정보통신 기술의 진보는 멈추지 않는다. 민중의 고난과 빈부격차는 AI 자동화로 더욱 가속화할 전망이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나온 2013년 보고서에 의하면, 2023-33년 사이에 미국 전체 노동인구의 절반이 컴퓨터 자동화로 대체된다. 보고서가 나온 지 7년 세월이 흘렀다. 지금의 AI 기술과 보급률을 고려한다면 아마 보고서 저자들은 6-70%로 높여 잡았을지 모른다.

    캘리포니아 최저 임금은 시급 12 달러. 미국 평균 노동자 시급은 27.16 달러. AI 자동화는 시급 5 달러 짜리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과 유사하다. AI 임금은 조만간 1 달러 이하로 떨어진다. 최저 임금을 받는 단순 서비스 노동직부터 자동화의 물결은 시작된다. 이미 맥도널드 버거킹에서 불이 붙었다.

    전문 직종까지 AI 자동화가 밀어닥친다. 과학 기술 분야의 엘리트가 아니면 의사나 변호사 같은 고임금 노동자도 앞으로 살아남기 힘들다. 전문직도 대부분의 업무가 사실상 단순 반복 노동이다. 미국 병원과 법조계에 AI 자동화가 이미 진행됐다.

    중산층은 존재하지 않는다. 귀족과 노예 계급이 있을 뿐이다.

    인류 역사상 전례를 찾을 수 없는 혁명적 변화가 밀어닥친다. 이를 ‘4차 산업혁명’이라는 부르는 이들은 우리 앞에 밀어닥친 혁명이 단순한 산업구조의 변화가 아니라는 걸 놓쳤다. 3차가 있었고, 4차가 지나면 다시 5차가 온다는 시간적 연속성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암시하는 판에 박힌 표현이다.

    이번 산업 혁명은 AI 혁명이다. 영국의 천재 물리학자 호킹이 경고한 대로 인류에게 마지막 산업 혁명이다. AI로 인류는 멸종할 수 있다.

    생물학적 멸종이 아니라면, 사이보그 형태의 신 인류로 진화해 나갈 수밖에 없다. 생물학적 진화에 의존해서는 새로운 정보사회에 더이상 적응해 나갈 수 없다. 머스크의 뉴럴링크라는 기업이 인간의 사이보그화를 이미 현실화했다 인간 스스로 사이그보그로 진화해 나가지 않으면 AI 시대에 살아남을 수 없다.

    뉴럴링크 런칭 동영상 /뉴럴링크 제공
    어찌 됐건 과거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앞으로만 나가야 하는데 ‘어떻게 부작용을 줄일 수 있는가’ 하는 과제만 남는다.

    과학과 기술은 진보하는데 역설적이게도 인간 사회의 지배 구조는 봉건 시대로 회귀한다. 소득 상위 0.2%의 귀족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노예로 전락할 수 있다.

    일반 시민은 스마트 폰과 인터넷에 쏟아지는 단순 정보에 빠져 산다. 발밑에서 진행되는 숲의 진화를 보지 못한다. 미국이 상징해온 전통적 의미의 시민 민주주의가 이미 종언되었음을 눈치채지 못한다.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새로운 형태의 ‘권위주의적 기술 정치’ (authoritarian technocracy)로 옮겨가고 있음을 간파하지 못한다.

    미국과 같은 정치 선진국조차 선거는 이미 데이터 분석을 동원한 여론 조작으로 변질했다. 선거는 이제 AI를 동원한 디지털 데이터 조작이다. 더 이상 정치적 설득과 도덕적 호소를 할 필요가 없다.

    트럼프가 승리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페이스북 데이터를 활용한 영국의 여론조작 컨설팅 업체 ‘캠브리지 에널리티카'(Cambridge Analytica)를 고용했기 때문이다. 반면 서버의 개념도 이해 못한 클린턴은 초보적인 수준의 이메일 해킹도 막아내지 못했다.

    여론조작은 여론 선동을 넘어 AI를 활용한 ‘마인드 컨트롤’로 진화했다. 인터넷을 사용하는 모든 민중은 자신들이 이미 마인드 컨트롤을 당하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2020년 미국 대선은 누가 AI를 동원한 여론 조작과 대중 마인트 컨트롤에 성공하느냐에 좌우된다. 한국의 총선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시민은 여전히 인터넷에 흘린 자신의 데이터가 자신을 조종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저마다 스마트폰에 몰두한 사람들/사진 제공:Jens Johnsson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고립된 현대인
    데이터로 취급되고 데이터로 조종돼
    법치까지 무너져 자유민주주의 근본적 위기

    트럼프의 탄핵 부결은 미국식 자유 민주주의 종언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의회의 청문회 소환 명령을 대놓고 거부하는 대통령의 불법 행위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국가 안보를 볼모로 잡는 트럼프의 백주강도식 외교를 미국 역사에서 어떤 대통령도 자행한 적이 없다. 법치의 상징인 미국에서 검찰과 사법부가 대통령 개인에 아부하는 간신배들로 채워지리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한국에서 유사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미국, 한국, 일본, 영국, 프랑스 등 민주적 선거로 당선된 모든 선진국 정권은 다 권위주의적으로 변질하고 있다. 법치가 무너진다. 사법부가 정치화된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떠받치던 계몽주의 정치철학의 기본 도덕률을 무시하는 ‘트럼프 현상’은 세계적으로 확산한다.

    이는 여론 선동이 기술적 데이터 분석과 조작으로 바뀌면서 선거 민주주의 체제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안면인식과 같은 최첨단 AI 기술을 동원해 더욱 철저히 민중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오웰리언 국가’ 형태로 치닫는다.

    자유 시민민주주의 정치 체제는 불과 200년의 짧았던 실험으로 이렇게 끝나는가? 공산주의가 아니라 기술 진보가 전후 자본주의 세계 질서를 허망하게 무너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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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시중 박사는 실리콘밸리에서 변호사 및 엔젤 투자자로 20년 넘게 활동했다. 최첨단 기술 시대의 윤리 철학 문제에 관심을 두고 미국에서 저술 활동을 해온 철학자이기도 하다. 국내 출간 저서로는 동물의 도덕적 문제를 다룬 <개를 위한 변명 - 보신탕과 동물권리론에 관한 철학적 성찰>과 초기 인터넷 혁명을 실리콘 밸리 현장에서 직접 경험하고 미래를 전망한 <벤처@실리콘 밸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