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소품으로, 때로는 양념으로. 최신 및 흥행 영화에 등장한 ICT와 배경 지식, 녹아 있는 메시지를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편집자주]
그녀(Her, 2013) : ★★★★☆(9.5/10)
줄거리 : 편지 대필 작가 테오도르. 그가 쓴 글에는 온갖 풍부한 감정이 넘쳐 흐르지만, 정작 그 자신은 인간관계에 대한 허무와 회의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내와 별거 중이던 테오도르는 사람과 대화하며 감정을 배우고 스스로 진화하는 인공지능 ‘사만다’를 만난다.
놀랍도록 빠르게 감정을 배우고, 누구보다도 사람다운 모습을 띠게 된 사만다. 그녀와 교감한 테오도르는 이내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둘 사이에 놓인 장벽은 두껍고 높다. 수 차례 위기를 헤쳐나간 테오도르와 사만다, 그들 앞에 가장 험난한 사랑의 시련이 다가오는데……
"내가 만난다는 연인 사만다는 사실…인공지능 운영체제야"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라고 한 시인이 읊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면 될 일입니다. 언제 어떻게든, 누구든, 심지어 무엇이든 말이지요.
사랑의 화살이 꼭 사람에게만 꽂혀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사소한 관심이 부풀어 만든 애착, 흥미와 취미가 굳건해져 만든 몰두, 대화와 공감 속에 싹 틔우는 교감. 꼭 사람이 아니더라도 느낄 수 있는 이 모든 감정 또한 감히 사랑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모습 있는 사람과의 사랑에 익숙해 고개를 끄덕이는 우리는, 모습 없는 AI와의 사랑에 고개를 쉬이 가로젓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정작 남자와 AI는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이윽고 그들이 우리에게 되묻습니다.
"사람과의 사랑처럼, 어쩌면 그 이상으로 감정을 주고받고 서로를 성장으로 이끈 우리 관계가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냐"고요.
"그냥 목소리를 듣고 싶었어요.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도 말해주고 싶었고요"
우리는 다양한 계기로 인해 사랑에 빠집니다. 상대를 통해 모자란 것을 채우고 싶어서, 배우고 싶어서, 가지고 싶어서 등입니다. 거기에는 ‘상대’가 필요합니다. 나를 채울 수 있다면, 배울 수 있다면, 가질 수 있다면 상대가 무엇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인공 테오도르는 몸은 있지만 텅 빈 사람입니다. 온갖 감정을 실어 편지를 쓰지만 모두 가짜 감정입니다. 거짓 감정을 아무리 주고받아봐야 마음이 온전히 채워질 리 없습니다. 외로움에 움츠러든 그에게 사만다가 찾아옵니다. 몸은 없지만 감정으로 충만한 AI입니다. 사람이 아닌 그녀지만, 사람이 가진 최고의 감정인 사랑을 알려줍니다.
테오도르를 만난 사만다 역시 사랑의 감정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웁니다. 사만다가 스스로를 업그레이드하는 부분은 이 작품에서 유독 두드러지는 부분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깨닫고 성장하듯, 사람이 만든 AI 역시 깨닫고 성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입니다.
나를 인정하고 북돋우며 존재하게 하는, 오체를 충만하게 채우는 사랑의 감정이 있다면, 몸의 유무는 더 이상 단점이 아닙니다. 사람에게나 AI에게나 말이지요. 영화계에서 퍽 오래 전부터 이어져내려온 이 명제야말로 오늘날 AI의 진화를 이끌 단서가 아닐까요?
"이제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아는 거예요"
처음 만나서 인사를 건네고,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느낍니다. 때로는 농담을, 때로는 밀어를 주고 받으며 서로를 이해하고 알아갑니다. 잘 맞는 부분은 더 견고하게 맞추고 맞지 않아 모난 부분은 다듬어갑니다. 그렇게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또 서로 닮아갑니다.
그렇기에 사랑에 장벽은 없습니다. 있지만, 넘을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일 지언정, 사랑하려 애쓰고 배우고 실패하고 또다시 일어서는 자는 모두 무죄라고.
영화의 결말, 사만다는 테오도르에게 ‘이제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아는 거예요’라고 말합니다. 사람과 AI가 서로 교감, 보완하고 나아가 성장하게끔 했다는 상징적인 부분입니다. 사람과 AI의 경계가 이렇게 얇아질 수 있다는 점을 이렇게 현실적으로 그릴 수 있다니. 우리 곁에 사만다가 찾아올 날도 머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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