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입니다. 그런데 예년과 약간 다른 의미의 불사춘입니다. 추워서가 아니라 바이러스 때문에 즐길 수 없는 봄이니 춘래불상춘(春來不賞春)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세계적인 이 난리에 어쩌자고 꽃은 일찍 피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벚꽃 등이 코로나에 빼앗긴 들녘에 서둘러 봄을 몰고 와버렸습니다. 평년보다 1주일 정도 빠른 개화라고 합니다. 올해 벚꽃의 공식 개화가 3월 27일로, 관측 이래 가장 빨랐습니다. 아파트 화단의 라일락과 조팝나무도 벌써 피어 3월 개화식물 목록에 넣어달라고 아양 떱니다.
지난 겨울 강수량 부족에 시달린 초본류가 저조한 개화율을 보이는 것과 달리 목본류는 탐스럽게 피어나 슬기로운 방콕 생활을 이어가는 국민의 맘을 싱숭생숭하게 만듭니다.
​저에게도 코로나19가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습니다. 출장 자제령이 떨어진 것입니다. 외국에서는 이동 금지령을 내린다고 하니 그보다는 낫다고 위안삼습니다. 어쨌든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대놓고 자유를 억압하는데도 순순히 따라야 합니다. 따르긴 하겠는데 왜 하필 그게 봄이란 말입니까? 꽃들은 피어 아우성치는데 질병의 계엄령 때문에 맘껏 돌아다니지 못하니 근무지인 국립수목원의 꽃이라도 들여다보는 수밖에요.​

국립수목원 신축 건물 연구동
국립수목원 신축 건물 연구동
사실 작년에 연구동을 수목원 바깥으로 옮긴 이후로 수목원 안으로 들어가 보는 일이 뜸해졌습니다. 수목원에 근무한다지만 지금쯤 어디서 무엇이 피는지 알 길이 없기에 개화 소식을 물어오는 지인께 답해드리기도 어렵습니다. 이번에 근무처에 갇힌(?) 덕에 아침 일찍 들어가 보니 일교차에 얼굴 시린 봄꽃들이 반가이 맞아줍니다.
국립수목원은 북쪽 내륙에 있는 탓에 봄이 좀 늦습니다. 이제야 매실나무가 피어 미선나무와 향기로운 대결을 벌이는 것도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승자는 미선나무입니다. 제가 외갓집 미선이 누나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매실나무와 미선나무는 둘 다 향기롭고 예쁜 꽃을 피우지만, 열매의 이름으로 불린다는 공통점을 가졌습니다. 매실나무는 열매인 매실을 이용하는 데서, 미선나무는 열매가 미선(尾扇)이라는 부채처럼 생겨서 이름 붙여졌습니다.

봄이 늦는 국립수목원에서는 매실나무가 이제야 피기 시작한다.
봄이 늦는 국립수목원에서는 매실나무가 이제야 피기 시작한다.
향기로 따지면 미선나무가 매실나무보다 한 단계 위다.
향기로 따지면 미선나무가 매실나무보다 한 단계 위다.
산수유와 히어리는 노란색 꽃 대결을 벌이는 중입니다. 승자는 산수유입니다. 남자한테 참 좋기 때문입니다. 우리 수목원에 이토록 산수유가 아름답게 피는지 처음 알았다고 말하려니 그동안의 무관심이 들통 나는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어쨌든 아름다운 건 아름다운 겁니다. 샛노란 산수유 꽃그늘 아래로 걸어가는 직장 상사(上司)마저 아름다워 보이니 말입니다. 히어리도 아름답기는 하나 싱싱함이 덜해 보여 매력이 덜합니다.

산수유는 개화기가 긴 편이다.
산수유는 개화기가 긴 편이다.
히어리는 추위에 약간씩 상한 꽃이 보인다.
히어리는 추위에 약간씩 상한 꽃이 보인다.

국립수목원의 산수유가 만들어낸 아름다운 꽃길 풍경
국립수목원의 산수유가 만들어낸 아름다운 꽃길 풍경
바닥에서는 꿩의바람꽃, 얼레지, 현호색, 왜제비꽃, 깽깽이풀 등의 초본류가 서둘러 봄 마중을 나왔습니다. 꿩의바람꽃은 봄을 서빙하겠다는 듯 하얀 쟁반을 펼쳐 듭니다. 얼레지는 고개 숙인 채 수줍게 피어 괜스레 말 걸고 싶어지게 만듭니다.

꿩의바람꽃의 하얀 쟁반 모양의 꽃을 하늘을 향해 핀다.
꿩의바람꽃의 하얀 쟁반 모양의 꽃을 하늘을 향해 핀다.
얼레지는 수줍게 고개 숙인 채 아래를 향해 핀다.
얼레지는 수줍게 고개 숙인 채 아래를 향해 핀다.
현호색은 작지만 꿀도 있고 독도 있는 꽃입니다. 멸치 또는 종달새에 비유되는 꽃이 피는데, 뒤쪽에 ‘거(距)’라고 하는 기다란 꿀주머니가 달립니다. 벌들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현호색의 작은 꽃에 매달립니다. 휘어지는 꽃차례를 보면서 꽃을 너무 못살게 구는 게 아닌가 싶지만 실은 그게 다 현호색의 지혜입니다. 벌의 무게로 꽃이 기울어지면서 꿀주머니가 하늘로 향하면 꿀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꿀을 탐닉하는 사이에 꽃가루가 벌의 몸에 묻는 방식으로 꽃가루받이를 하니까요.

현호색은 꿀도 있고 독도 있는 식물이다.
현호색은 꿀도 있고 독도 있는 식물이다.
현호색의 꽃가루받이 모습
현호색의 꽃가루받이 모습
현호색은 땅속에 구형의 덩이줄기(괴경)를 달고 있습니다. 그 덩이줄기에 독이 있으며 약으로 쓰기도 합니다. 그런데 현호색이 혈액순환을 돕고 어혈을 제거하는 약재라고 하면서 독이 없다고 소개한 자료를 간혹 보게 됩니다. 전에는 독이 없다고 봤을지 몰라도 최근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작년에 식품의약품안전처가 현호색이 함유된 의약품 18개 품목에 임산부 주의 관련 문구를 넣도록 조치한 일도 있습니다.
왜제비꽃은 제가 보는 견해에서는 그리 흔히 볼 수 있는 꽃은 아닌 듯합니다. 왜제비꽃인가 하고 들여다보면 털제비꽃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꽃줄기와 잎에 털이 없어야 왜제비꽃입니다. 국립수목원의 양치식물원 주변은 진짜 왜제비꽃이 많이 피어나는 곳입니다.

국립수목원에는 진짜 왜제비꽃이 많다.
국립수목원에는 진짜 왜제비꽃이 많다.
털제비꽃의 꿀주머니
털제비꽃의 꿀주머니
제비꽃 종류들도 꽃 뒤쪽에 꿀주머니가가 있습니다. 제비꽃을 오랑캐꽃이라고도 하는데, 바로 이 꿀주머니를 달고 있는 모습이 오랑캐의 뒷머리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별명입니다. 꿀주머니가 있으니 꿀이 있을 테고, 꿀이 있으니 향기가 나는 건 당연합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이른 봄에 피는 제비꽃 종류에서는 꿀 향기가 난다고 보면 맞습니다.
깽깽이풀은 오래 피어 있는 꽃이 아닙니다. 요즘처럼 화사하게 피었다가도 비바람이 불거나 더워지면 금세 꽃잎을 떨궈버립니다. 워낙 예뻐서 관상용으로 좋을 수 있겠다 싶지만, 개화기가 짧다는 단점을 해결해야 할 겁니다.

깽깽이풀의 꽃은 오래지 않아 시든다.
깽깽이풀의 꽃은 오래지 않아 시든다.
물가에는 동의나물이 방울방울 꽃망울을 달았습니다. 우리가 흔히 수련이라고 부르는 미국수련이 꽃 핀 것처럼 붉은 잎을 내어 아직 오지도 않은 여름을 단체로 기다리는 중입니다. 수온이 올라야 분주해지는 수생식물원 식구들이건만 부쩍 오른 기온에 덩달아 서두르는 모습입니다.

꽃처럼 붉게 떠오른 미국수련의 잎
꽃처럼 붉게 떠오른 미국수련의 잎
그래도 아직은 이른 봄입니다. 큰 나무가 새잎을 펼쳐내기 전에는 햇빛이 땅바닥까지 잘 도달합니다. 봄꽃들은 이 시기를 놓치지 않고 꽃 피워야 하기에 부지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관심 두지 않으면 피었는지도 모를 그 작은 것들을 향해 몸을 낮추어 본 일이 얼마나 있으신지요? 작다고 무시하면 안 됩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은 작은 바이러스가 우리의 풍속도가 상상 이상으로 바꾸어놓고 있는 현실이니까요.
부모님 얼굴 뵌 지도 오래됐습니다. 언제쯤이면 서로 얼굴 마주한 채 웃으며 식사할 수 있을지 별것 아니었던 소소한 일상들이 지금은 너무나도 그립습니다.
※ 외부필자의 원고는 IT조선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동혁 칼럼니스트는 식물분야 재야 최고수로 꼽힌다. 국립수목원에서 현장전문가로 일한다. ‘혁이삼촌’이라는 필명을 쓴다. 글에 쓴 사진도 그가 직접 찍었다. freebowl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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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수목원 육림호의 봄풍경
국립수목원 육림호의 봄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