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 유명하지만, 글 쓰는데 재미를 붙인 사람은 오히려 자신만의 필기구를 찾는 데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쓴다. 고급 필기구 중 하나인 ‘만년필'은 이 말이 꼭 들어맞는 도구다. 유명 만년필 제조사가 밀집한 일본 필기구 업계에서는 주문생산(오더메이드) 수요가 늘어나는 추세다.

만년필박사 주문생산품. / 만년필박사 갈무리
만년필박사 주문생산품. / 만년필박사 갈무리
일본 돗토리시에 위치한 ‘만년필박사'는 소비자의 요구에 따라 길이 1밀리미터, 무게 1그램의 오차없이 만년필을 만들어낸다. 세계 필기구 애호가의 주목을 받는다.

야마모토 타츠 만년필박사 대표는 최근 일본 매체 닛케이와의 인터뷰에서 "세계 각지에서 주문이 늘고 있다. 연간 140개쯤 생산해 그 중 절반은 해외로 내보낸다. 처음 만년필 제조를 시작했을 때는 2주 기다리는 것도 어렵다는 사람이 많았지만 지금은 주문 후 1년을 기다리는 손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오더메이드 만년필의 장점에 대해 ‘처음 집어드는 순간부터 손에 꼭 맞는 만년필’이라고 설명했다.

만년필 애호가들은 잉크에도 관심이 많다. 1923년 창업한 일본 기후현에 위치한 카와사키문구점은 만년필 애호가들의 취향에 맞춰 시판 잉크를 조합해 오리지널 잉크 만들어내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 카와사키 히로쯔구 대표는 "글을 읽는 사람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기 위해 자신만의 문자와 색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일반 필기구 시장은 정체됐다는 평가를 받지만, 만년필 출하량은 오히려 증가 추세를 보인다. 일본필기구공업회(JWIMA)에 따르면, 일본 만년필 수출량은 2000년 ‘706만개’에서 2018년 ‘1331만개'로 크게 늘었다. 매출 기준으로 따지면 2000년 8억6000만엔(96억원)에서 2018년 35억3600만엔(395억원)으로 증가했다. 만년필 출하와 관련한 매출 자료의 근거를 일본 시장으로 한 것은 만년필 전문 제조사가 일본에 많고, 몽블랑 등 글로벌 기업은 만년필 매출보다 시계 등 브랜드를 이용한 다른 상품의 매출 비중이 더 높기 때문이다.

1919년 창업해 올해로 설립 101년을 맞이한 ‘플레티넘 만년필'은 일본에서 오랫동안 만년필 사업을 이어온 회사다. 플레티넘은 세계 최초로 잉크 카트리지 방식의 만년필을 개발한 업체다. 1952년 잉크가 쏟아져 내리는 현상을 막는 펜촉을 개발했으며, 1957년 ‘오네스트60’이라는 잉크 카트리지 내장 만년필을 선보였다.

플레티넘의 고급 만년필 라인업 ‘이즈모'. / 플레티넘 갈무리
플레티넘의 고급 만년필 라인업 ‘이즈모'. / 플레티넘 갈무리
한국에서도 유명한 ‘파일럿'은 플레티넘보다 1년 앞선 1918년 창업했다. 일본 만년필 제조사 중 규모가 가장 크다. 2018년 기준 매출 1040억엔(1조1639억원)을 기록했다. 정밀하고도 높은 품질로 세계 시장에서 호평가를 받았다. 2014년 에르메스 브랜드로 출시된 만년필 ‘노틸러스'도 파일럿이 생산한 제품이다.

일본 ‘세일러(Sailor)’는 파일럿, 플레티넘을 잇는 일본 3대 만년필 제조사 중 하나다. 1911년 히로시마에서 문을 연 플래티넘은 3사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일본에서 오리지널 만년필과 주문생산형 잉크 등 맞춤 서비스로 판로를 개척했다.

1906년 창업해 고급 만년필 대명사로 평가받는 독일 ‘몽블랑(MONT BLANC)’은 1980년대 던힐에 인수된 후 1993년 리치몬트그룹에 편입됐다. 몽블랑은 리치몬트 편입 후 고급시계, 쥬얼리 사업이 크게 성장했다. 2011년에는 아시아 시장 성장으로 3억3400만유로(4426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하지만 몽블랑이 필기구 회사인가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는 사람이 많다. 몽블랑 만년필 중 인기 제품은 ‘마이스터 슈팅', ‘스타워커', ‘포엠' 시리즈다.

펠리컨 토레도 골드 M900. / 펠리컨 갈무리
펠리컨 토레도 골드 M900. / 펠리컨 갈무리
독일에는 ‘펠리컨(Pelikan)’과 ‘파버카스텔(Faber Castell)’ 등 만년필 제조사가 있다. 펠리컨 만년필은 애호가들 사이에서 ‘균형(밸런스)을 갖춘 만년필'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펜의 굵기와 중심이 정밀하게 설계됐다. 인기 모델은 10만원대에 판매되는 ‘트레디셔널' 시리즈다. 스페인의 금 세공 디자인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토레도(Toredo)’ 시리즈도 고급스러운 외형으로 인기가 있다.

파버카스텔 엠비션 시리즈. / 파버카스텔 갈무리
파버카스텔 엠비션 시리즈. / 파버카스텔 갈무리
독일 ‘파버카스텔'은 1761년 창업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필기구 제조사다.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제품을 만들기 보다 현대적 디자인과 혁신적인 기술을 앞세우는 회사라는 평가를 받는다. 인기 만년필로는 나무와 스테인리스 소재로 만든 10만원대 ‘엠비션(Ambition)’ 시리즈가 있다.

까렌다시 에크리도르 만년필. / 까렌다쉬 갈무리
까렌다시 에크리도르 만년필. / 까렌다쉬 갈무리
고급 정밀시계 회사가 많은 스위스에는 ‘까렌다시(Caran d'Ache)’라는 제조사가 있다. 까렌다시 만년필은 정밀한 시계 가공 기술로 제작된다. 까렌다시는 기능성과 이용 편리한 사용감에 초점을 맞춰 만년필을 만든다. 까렌다시 대표 만년필은 ‘에크리도르(Ecridor)’ 시리즈다. 에크리도르 만년필은 쉽게 필기할 수 있도록 볼펜처럼 만들어졌으며, 연필과 같은 육각형 몸체를 지녔다.

패션 브랜드가 많은 이탈리아의 유명 만년필 제조사로는 ‘오로라(Aurora)’와 ‘델타(Delta)’가 있다. 오로라는 1919년 토리노에서 창업한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만년필 회사다. 모든 부품을 일괄적으로 생산하는 등 ‘메이드 인 이탈리아'를 고집한다. 인기 모델은 1930년에 선보인 ‘옵티마' 시리즈로, 펜과 몸체에 화려한 문양이 들어간 것이 돋보인다.

‘델타'는 1982년 나폴리 인근에서 창업한 만년필 제조사다. 델타 만년필은 장인의 손을 거쳐 수제 생산된다. 이탈리아 제품 답게 패션과 디자인을 강조한 외형이 특징이다. 대표 모델은 ‘돌체비타', ‘올드 나폴리'가 있다.

프랑스의 ‘파커(Parker)’, 영국의 ‘던힐'과 ‘콘웨이 스튜어트(Conway Stewart)’ 등도 유명 만년필 제조사다.

콘웨이 스튜어트 만년필. / 콘웨이스튜어트 갈무리
콘웨이 스튜어트 만년필. / 콘웨이스튜어트 갈무리
일반 소비자에게 다소 생소한 브랜드인 ‘콘웨이 스튜어트’는 1905년 런던에서 창업했으며, 엘리자베스 여왕 등 유명인사가 사용하는 만년필을 생산한다. 대표 제품으로는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의 이름을 딴 ‘처칠’ 시리즈가 있다. 처칠은 콘웨이 만년필을 애용한 인물이다.

김형원 기자 otakukim@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