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산업진흥법을 피해 게임 전문 플랫폼 ‘스팀'에서 불법으로 유통되던 게임의 국내 서비스가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한국에서 게임을 유통하려면 게임물관리위원회(이하 게임위)의 심사를 통과한 후 등급을 받아야 하는데, 일부 게임사는 이를 무시한 채 스팀을 통해 게임을 유통했다. 불법 게임을 그대로 놔두면 법 집행의 형평성이 훼손되지만, 법을 엄격히 적용할 경우 페이스북 사례처럼 스팀의 한국 시장 철수도 예상할 수 있다.

게임위는 최근 스팀을 운영하는 ‘밸브 코퍼레이션'과 미등급 게임을 출시한 ‘게임사’에 법을 지키라고 안내·권고했다. 게임산업진흥에 관한 법률 제32조를 보면, 등급 분류를 받지 않거나 등급 취소·거부한 게임물을 유통·제공하는 것은 불법이다. 게임사가 등급 분류를 거부하면 스팀이나 게임 유통 관련 다른 플랫폼에서 퇴출될 수 있다.

게임 업계에서는 게임위가 법을 형평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해외 소규모 게임사가 한국 시장에 진입하는데 또 하나의 장벽이 생긴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게임물관리위원회 입구 모습 / 게임물관리위원회
게임물관리위원회 입구 모습 / 게임물관리위원회
한국서 인기 많은 게임은 등급 분류 심사 대상

4일 게임위 한 관계자는 "이용자가 많은 ‘인기가 좋은’ 게임을 제작하거나 유통하는 곳에 등급 분류에 대한 안내를 했다"며 "예전부터 한국에서 스팀을 이용하는 사람이 많은데, 게임사가 등급 분류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민원을 고려해 조치를 취한 것이다"고 밝혔다.

게임위는 한국 시장을 공략을 위한 게임사의 노력 여부를 판단해 심사 대상 여부를 가린다. 예를 들어, 게임 내 콘텐츠의 한글화와 한국 이용자 수, 유통 상황 등을 평가한다. 게임위의 꾸준한 권고에도 등급 분류 심사를 계속 거부할 경우 불법게임물로 규정되며 제재도 받는다.

게임위 관계자는 "처음부터 한국 시장에 게임을 선보일 계획이 없었다 하더라도, 출시 후 한국에서 충분히 유통되는 상황으로 보일 경우 등급 분류를 권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게임위 "법에 따라 심사 받으라는 것"
현행법 상 게임사의 심사 거부에 따른 서비스 중단의 책임은 법을 어긴 게임사에 있다. 하지만 게이머 사이에서는 게임위의 강경 조치가 잘못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올 수 있다. 상당 수 게이머를 보유한 인기 게임이 게임위의 등급 심사 대상이 되는 만큼, 게이머를 볼모로 게임사가 책임을 게임위 쪽으로 돌릴 수도 있다.

게임위 측은 "인기 있는 게임이 갑자기 불법게임물로 규정될 경우, 게이머가 느낄 당혹감이 상당할 수 있다"며 "하지만 법에 따라 등급 심사를 받지 않는 게임의 유통을 이대로 둘 수는 없다"고 말했다.

중국에서 게임을 유통하려면 국가신문출판광전총국으로부터 별도의 ‘판호'(게임 서비스 허가권)를 받아야 한다. 게임위의 등급 심사와 유사한 경우다. 한국 게임은 사드 배치에 따른 여파로 중국에서 판호를 못받은 탓에 신규 게임 출시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며, 그렇다고 해서 법을 어긴채 게임사 마음대로 신작을 출시할 수 없다.

게임위 측은 "스팀을 운영하는 밸브 측과 꾸준히 메일·전화통화 등으로 소통 중이다"라며 "스팀에서 갑자기 게임이 내려가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위정현 한국게임학회장(중앙대 교수)은 한국에서 심의를 받지 않은 게임의 스팀 기반 유통이 관행처럼 이어져왔지만, 앞으로는 어려운 일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위 교수는 "구글 등 플랫폼이 한국 정부의 규제에서 벗어나 탈법적인 행위를 하는 이슈는 자주 있었는데, 게임위는 이를 바로잡기 위해 스팀 관련 문제를 짚고 나선 것으로 보인다"며 "이용자는 게임 구입 시 심의를 받아 유통되는 게임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페이스북처럼 스팀의 한국 철수 가능성도 있어

게임 업계에서는 게임위가 한국 게임사를 역차별하는 문제 발생 가능성을 해소했다는 점에서는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일각에서는 군소 게임사의 게임 출시를 돕는 방안으로 기존 게임위의 심사 절차를 간소화하는 등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낸다.

게임사 한 관계자는 "한국에서 서비스 되는 일부 해외 게임의 경우 심의를 받지 않는 경우가 있어 역차별 논란이 있었는데, 게임위의 이번 조치로 공평해진 면이 있다"며 "다만, 까다로운 심의 기준을 완화하는 등 조치를 통해 한국 게이머의 게임에 대한 선택권이 줄어드는 부작용을 최소화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스팀 입장에서는 한국 시장을 그냥 버리기 어려울 것으로 보며, 모든 것은 게임사의 의지에 달린 것으로 판단한다"며 "페이스북의 경우 한국에서 게임 심의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한 후 시장에서 자발적으로 퇴출했는데, 스팀 역시 최악의 경우 페이스북의 수순을 밟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오시영 기자 highssam@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