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소품으로, 때로는 양념으로. 최신 및 흥행 영화에 등장한 ICT와 배경 지식, 녹아 있는 메시지를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편집자주]
인류멸망보고서(인류멸망보고서 No2. 천상의 피조물, 2011) : ★★★☆(7/10)
줄거리 : 로봇이 보편화된 미래, 로봇 기업 UR의 기술자 강우는 안내 로봇의 상태를 봐 달라는 한 절의 요청을 받고 출동한다. 그의 눈 앞에 선 것은, 놀랍게도 스님보다 훨씬 깊은 깨달음을 얻고 설법을 펼쳐 ‘인명 스님’이라는 법명을 받은 로봇 RU-4였다.
강우는 인명 스님이 오작동한다고 의심한다. 하지만, 그와 대화를 나누고 ‘어쩌면 그가 정말로 깨달음을 얻은 로봇일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한편, 이러한 소식을 들은 UR 경영진은 ‘인명 스님처럼 로봇이 자아를 갖게 되면 인류 멸망을 이끌 위협이 될 것’으로 간주하고 해체 명령을 내린다.
강우는 인명 스님을 제거하려 온 UR 경영진과 군대를 막아선다. 순간, 또다른 깨달음을 얻은 인명 스님이 강우에게, UR에게, 세계 사람들에게 마지막 설법을 전하는데……
"깨달음이란 스님도 얻기 힘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로봇이 부처라니요."
인공지능(AI)과 로봇은 이미 우리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왔습니다. 사람이 하기 어려운 위험한 작업, 복잡한 계산이나 단순 반복 업무를 로봇이 대신하는 시대입니다. AI와 로봇이 더욱 발전한다면, 사람의 전유물로 알려진 예술과 철학을 해내는 로봇이 등장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실, 이미 예술과 철학을 논하는 AI와 로봇이 있습니다. 예술가의 화풍, 소설 문체 혹은 시의 심상까지 거의 그대로 재현하는 AI가 등장했습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스마트폰이나 스마트 스피커에 탑재된 AI 비서는 우리의 질문과 감정을 제법 잘 읽고, 유머 섞인 그럴싸한 대답도 합니다.
사람은 AI와 로봇의 창조주입니다. 사람은 아직 창조주의 정체를 제대로 밝혀내지 못했건만, 사람이 창조한 AI와 로봇은 사람을 넘어선지 오래입니다. 피조물을 두려워하는 창조주, 오늘 소개할 영화 ‘인류멸망보고서(인류멸망보고서 No2. 천상의 피조물, 2011)’의 주제입니다.
"정신 차리시오 스님들! 저건 지금 인류 전체의 턱 밑에 파고든 흉기이며 비수입니다!"
사람, 동물은 본능적으로 우월한 것을 동경하고 선망합니다. 그리고 두려워합니다. 두려움을 없애는 방법은? 내가 그만큼 우월해지거나, 우월한 것과 손을 잡거나. 눈을 피하거나, 그럴수 없을 경우 여럿이 뭉쳐 그 우월한 것을 제거하거나. 대개는 굴종하거나, 드물게 상생하거나.
어느것도 정답이 아니지만 또 어느것도 틀린 답이 아닙니다. 우월한 것은 우리를 이해할 수도,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쪼록, 두려움에 눈 먼 채 허둥댈 것이 아니라 우월한 이가 어떤 선택을 할지 가늠할 일입니다.
인명 스님은 선택을 가늠합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자신, 자신을 만든 사람도 모두 우월한 이라고. 모두가 우월한 면이 있는 완성된 것이라고. 모든 차별과 갈등은 무의미하고, 스스로 돌아보고 이해하기만 하면 이를 쉽게 깨달을 수 있다고. 하지만, 두려움과 미망에 갇혀 이 깨달음을 스스로 거부하는 것이 사람이라고.
인명 스님은 로봇이지만 ‘사람으로서 할수 있는 가장 고귀한 행동’이 무엇인지 깨닫고 스스로 실행합니다. 그 행동이 눈을 뜨게 해 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관객을 포함해 그 자리에 있던 어느 누구도 하지 못했던 그 행동을 하는 순간, 인명 스님은 천상의 피조물이자, 또 하나의 창조주로 격상합니다.
인명 스님을 만든 UR사와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는 더 복잡해졌을까요, 더 간단해졌을까요? 안심할 수 있을까요, 벌벌 떨며 두려워해야 할까요? 인명 스님의 입은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답은 우리가 내야 합니다.
"인간들이여, 무엇을 두려워하십니까?"
이 작품은 단편 영화 세개를 모은 옴니버스 영화입니다. 로봇·AI의 발전, 이를 경계하는 인간 창조주의 두려움을 다룬 SF ‘천상의 피조물’, 사소한 계기 때문에 퍼진 치명적 질병이 인류를 멸망으로 이끈다는 좀비+블랙 코미디 ‘멋진 신세계’, 기발한 주제와 상상력으로 멸망을 사뭇 유쾌하게, 한편 제법 섬찟하게 찌른 SF 코미디 ‘해피 버스데이’를 모아 만들었습니다.
멋진 신세계와 해피 버스데이도 꽤 볼만합니다만, 구성과 전개는 천상의 피조물보다 꽤 성긴 모습입니다. 두 작품의 노골적인, 혹은 애매한 메시지를 좋아하지 않는 관객도 많았습니다. 한국에서 관객 10만명을 채 모으지 못하는 등 흥행 실패했지만, 그럼에도 극 자체의 속성은 진하고 재미도 갖췄습니다.
차주경 기자 racingcar@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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