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주경의 테크&영화] 사람·로봇을 중재하는 심장, 메트로폴리스 (Metropolis, 2001)

입력 2020.06.14 06:00

주제로, 소품으로, 때로는 양념으로. 최신 및 흥행 영화에 등장한 ICT와 배경 지식, 녹아 있는 메시지를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편집자주]

메트로폴리스 (Metropolis, 2001) : ★★★☆(7/10)

줄거리 : 로봇을 혹사시켜 부흥을 이룬 도시 메트로폴리스. 도시의 실권자 레드 공작은 세계를 지배할 힘을 가진 건물 ‘지구라트’를 세우고, 죽은 딸과 닮은 로봇 소녀 ‘티마’를 만들어 이들에게 지구라트 제어 권한을 주려 한다. 하지만, 레드 공작의 양아들 로크는 로봇 대신 레드 공작이 왕이 돼야 한다며 티마를 제거하려 한다.

사설 탐정 반과 그의 조카 켄이치는 우연히 티마와 만난다. 켄이치는 티마와 함께 로크의 추격을 피하면서도, 그녀에게 사람의 말과 감정을 알려준다. 티마는 로봇과 사람 사이의 갈등, 사랑을 포함한 인간의 감정을 배우지만, 자신이 누구인지는 끝내 배우지 못한다.

결국 로크에게 발각된 티마와 켄이치. 위급한 순간 레드 공작이 나타나 티마를 만든 이유와 정체성을 알려준다. 그제서야 프로그래밍된 로봇의 감정과 본능에 눈 뜬 티마. 그녀의 시선과 손끝이 가리킨 곳은……

"넌 초월자야! 사랑이나 도덕같은 감정의 지배를 받는 열등한 존재가 아니라고!"

겸손과 이해, 포용과 사랑. 긍정적인 감정은 사람의 삶을 풍족하게 하고 관계와 사회와 생명을 만듭니다. 반대편에 선 오만과 독선, 집착과 증오 등 부정적인 감정은 삶을 궁핍하게, 관계와 사회와 생명을 쇠퇴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람은 로봇을 만들어 이용합니다. 사람보다 능력은 강하지만, 감정이 없으니 로봇은 그저 묵묵히 시키는 대로 일만 합니다. 사람처럼 감정에 휩쓸려 실수할 일도 없고, 사람처럼 실수를 뉘우칠 일도 없습니다. 사람에게 정말 부리기 쉽고 유용한, 그래서 푸대접하기 쉬운 존재가 로봇입니다.

메트로폴리스 포스터 / 지오엔터테인먼트
로봇은 모든 것을 사람에게 배웁니다. 어떤 면에선 아기보다 순수한 존재로도 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로봇은 전지전능한, 신에 가까운 존재이기도 합니다. 강하고 튼튼한 팔다리와 사람을 압도하는 사고 능력을 가진 덕분입니다.

만일 로봇이 감정을 배운다면 어떨까요? 긍정적인 감정을 배운 로봇은 신이, 부정적인 감정을 배운 로봇은 악마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애니메이션 ‘메트로폴리스(Metropolis, 2001)’가 그린 주제입니다.

"역사는 돌고 돌지. 레드 공작도 바벨 탑처럼 무너질거야. 신이 아닌 우리의 분노로."

사람은 감정의 동물입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 대부분은 부정적인 감정의 부작용을 온몸으로 나타냅니다. 증오와 집착, 차별과 폭력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감정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라고, ‘감정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다’라고 말하지만, 거리낌없이 서로를 해치는 모순도 보입니다. 그 결과는 자멸입니다.

정작, 긍정적인 감정의 순작용을 보여주는 것은 이 작품에 등장하는 로봇입니다. 강한 능력을 가졌지만, 사람에게 복종하고 이해하려 합니다. 사람은 물론 로봇끼리도 돕습니다. 등에 날개가 돋은 것처럼, 흰 눈 가운데 선 것처럼 티마는 갓 태어난 아이처럼 순수한 로봇입니다.

감정에 눈 먼 사람들은 늘 제 손으로 제 목을 조릅니다. 감정을 가진 채 서로를 파괴하는 사람. 감정은 없지만, 서로를 아끼는 로봇. 로봇이지만, 사람의 감정을 배운 티마는 사람이 바라던 대로 가장 강하고 고귀한, 세계를 다시 건설할 기계의 신이 됩니다.

자기 자신처럼 부정적 감정에 휩싸인 기계의 신을 마주친 사람은, 옛 신화에서처럼 무너지는 지구라트(바벨탑)에 깔려 찌부러집니다.

그럼에도 긍정적인 감정으로 충만한 이들은 서로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로봇과 사람의 경계는 무의미합니다. 극의 절정을 장식하는 재즈 음악 ‘I Can’t Stop Loving You’가 시사하는 것입니다.

과연 사랑의 감정은 유·무기물을 가리지 않고 통하는 것이었습니다. 허물어진 지구라트의 잔해가 살이 돼, 나지막히 울리는 라디오 선율이 혈액이 돼, 어깨를 서로 기댄 켄이치와 로봇이 함께 딛는 발걸음이 고동이 돼 티마의 심장은 다시 부풀고 뛸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누구지?"

영화 ‘메트로폴리스’라고 하면, 이 작품보다 프리츠 랑 감독의 1927년작 무성 SF 영화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될 정도로 SF 명작인 이 영화를 인상깊게 본 테츠카 오사무 감독은 1949년, 같은 이름의 만화를 그립니다. 이 만화가 애니메이션 ‘메트로폴리스’의 원작입니다.

테츠카 오사무 감독이 누구냐고요? 일본 SF계 거장이자 우리에게 익숙한 ‘우주소년 아톰’의 아버지입니다. 여담으로, 이 작품에도 테츠카 오사무 감독 작품의 단골 캐릭터 ‘반’과 ‘붐’이 등장합니다.

이 작품은 발표 당시 많은 기대를 모았습니다. 테츠카 오사무 원작, 린 타로(아톰, 은하철도999 애니메이션 제작)감독, 오토모 카츠히로(아키라, 스팀보이, 메모리즈 제작)각본. 일본 애니메이션 대표 주자가 한데 모였고, 제작 기간 5년에 예산만 10억엔(118억원)이 들었습니다. 무거운 주제를 진중히, 유려한 화면으로 그린 비결이 이것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기대에 못 미치는 흥행을 거뒀고 평가도 중간 정도에 머물고 맙니다. 원작 주제인 ‘인간 계급 사회의 부조리’에 오늘날 정보통신 시대의 화두 ‘로봇과 사람의 윤리’를 잘 녹여낸 점은 아주 훌륭합니다. 하지만, 인물과 갈등, 주제를 표현하는 방식이 너무 진부하고 평면적이어서 밋밋한 느낌마저 듭니다.

그런데, 이 밋밋한 느낌과 진부해 보이는 상징성이 차곡차곡 쌓이다 결말에 다다르면 한번에 폭발합니다. 어쩌면 모든 단점이 결말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복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1927년 무성 SF 영화의 그것과도 닮은, 사뭇 의미‘심장’한 결말이 더욱 아련한 느낌을 주는 것도 이러한 까닭입니다.

차주경 기자 racingcar@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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