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시중 시론] '윤리적 채식'은 윤리적인가?

  • 남시중 박사
    입력 2020.06.17 06:00

    얼마 전 서울 방문 중에 고급 한식당에서 출판 관계자와 식사를 같이 한 적이 있다. 메뉴판을 보더니 비싸다고 기겁을 했다. "제가 편한 곳으로 찾아와주셨으니 제가 삽니다"라고 공손히 말했지만, 저렴한 된장찌개 백반을 골랐다. 나도 일부러 같은 걸 선택했다. 미국에서 먹을 기회가 드문 한식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그런데 먹다 보니 그분은 찌개에는 일절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불쾌한 표정이 역력했다. "찌개가 맛이 없어요?"라고 물었다. "고기가 들어가 있어서요"라면서 음식을 잘못 내어왔다는 투였다. 당연히 고기를 넣지 않았으리라 생각해 주문했다는 것이다. 자신은 "‘윤리적 채식주의자’라 어떤 경우에도 고기를 절대 먹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혼자 먹기가 불편해졌다. ‘주문 전에 확인하든지, 고기를 빼달라고 왜 미리 부탁하지 않았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밖에 나와 먹으면 채식하기가 참 어려워요"라는 말투에서 육식 위주의 세상에 대한 적대감이 느껴졌다. 그 적대감이 맛있게 먹고 있던 나를 향하는 것 같아 마음이 더 불편해졌다. 그날의 만남은 지난 2005년 한국에서 출간했던 졸저 <개를 위한 변명 - 보신탕과 동물 권리론에 관한 철학적 성찰>의 재출간 모색 때문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반려동물인 개를 화두로 물고 들어간 그 책에서 나는 동물과 관련한 도덕적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를 촉구했다. 서구 철학자가 개발한 ‘윤리적 채식주의'(ethical vegetarianism)란 개념도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책의 내용을 알고 나온 그분은 아마 나도 철저한 윤리적 채식주의자라고 믿었을 가능성이 있다. 돼지고기가 들어간 찌개를 맛있게 먹던 내 모습에서 실망했는지도 모른다. 그분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난 거의 평생을 채식으로 살았다. 어려서부터 동물 학대와 폭력에 민감했다. ‘동물에 가하는 학대와 폭력을 중단해야 한다’는 나의 ‘호소'는 타고난 감수성에서 비롯되었다. <동물 해방>(Animal Liberation)에서 ‘윤리적 채식주의'란 개념을 서구의 대중 운동으로 촉발시킨 도덕 철학자 피터 싱어(Peter Singer)는 ‘채식만을 해야 한다는 도덕적 판단은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사고한 논리적 귀결이었다’고 밝혔다. 반려동물을 키워본 적도 없고 오히려 싫어한다고 싱어는 굳이 강조했다. 오로지 논리적으로만 사고할 수 있는 싱어와 달리 내게 채식은 어린아이의 감성적 반응이었다.

    돼지가 들어간 찌개를 맛있게 먹는 내 모습을 보고 그 윤리적 채식주의자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난 알 수 없다. 다만, ‘저는 윤리적 채식주의자예요'라고 내게 강조할 때, 도덕적 신념을 실천하고 있다는 약간의 자기도취와 자만감이 느껴졌다.

    난 일곱살 즈음 동물이나 생선이 산 채로 처리되는 걸 목격한 이후 고기나 물고기가 비위에 맞지 않았다. 동물이나 생선도 다 사람 같은 정서를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벗어나지 못했다. 슈바이처 박사 전기를 보고 ‘아 나 같은 사람이 위인 중에도 있구나’ 하고 위안으로 삼았다. 길을 가다 길에 지렁이를 보면 안전한 길옆으로 옮겨주었다는 슈바이처 박사는 아이도 공감할 수 있다. ‘이성'이니 ‘논리'니 하는 서양의 도덕 이론이 필요 없다.

    내가 어릴 땐 지금처럼 슈퍼마켓이란 게 없었다. 냉장 시설이 보편화하지 않은 시절이다. 닭 요리를 하려면 시장에 가서 살아있는 닭을 사 와야 했다. 고기도 동네 정육점이 막 해체해 천장에 주정주렁 매달아 놓고 팔았다. 어머니를 따라 시장에 간 적이 있다. 닭장에 있는 닭을 꺼내 주인이 펄펄 끓는 드럼통 물에 산채로 던져버렸다. 그렇게 잔인하게 죽인 후 눈앞에서 털을 뽑아 처리해주었다. 등교 길 주변에는 보신탕집이 있었다. 아침 등교 시간부터 대로변에서 개를 잔인하게 그것도 천천히 죽이고 있었다. 당시 우리 주변에 지천으로 널려 있었던, 동물에 대한 잔인한 폭력과 학대에 익숙해지지 못했다. 어린 내게는 일종의 ‘트라우마'였는지 모른다.

    시장에서 작은 쇠 철장에 갇힌 병든 개들을 보면 지금도 내 눈에는 한없이 순진무구한 어린아이들이 학대받는 것처럼 보인다. 50대 후반인 지금도 나는 동물에 가하는 인간의 잔혹함을 잘 견디지 못한다. 어린아이에 대한 부모의 학대보다 더 끔찍한 패악은 없다. 내게 동물과 인간의 관계는 마치 부모와 아이의 인연처럼 느껴진다. 서양 철학자가 신줏단지 모시듯이 하는 무슨 ‘논리적 이유’가 없다. 그래서 그냥 고기나 생선을 먹지 못했다.



    Simon Berger/Unsplash
    어려서나 지금이나 채식을 하지만 난 채식‘주의자'는 아니다. 모든 사람이 다 채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채식만을 고집하는 채식 교조주의자는 더더욱 아니다. 육식을 규탄받아야 할 식습관이라 주장해 본 적도 없다. 일방통행의 느낌이 오는 어떤 ‘주의'(이즘 ism)에도 난 거부감을 느낀다. 오히려 <개를 위한 변명>에서 운동권 구호에 가까운 싱어의 논리를 혹독하게 비판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채식이 동물의 고통을 종식하는 ‘가장 효과적인’ 개인의 도덕적 의무이자 행동 양식이다’라는 싱어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육식하는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몰아붙이는 강경한 윤리적 채식주의가 현실에서는 실질적인 동물 복지 향상에 오히려 해악이 될 수 있다. ‘모두가 채식하면 공장형 축산업은 자동으로 사라질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은 ‘화폐를 다 불태우면 세상의 부가 다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초딩' 수준의 사고이다.

    서양의 도덕 철학자는 생명의 가치를 얼마나 인간과 유사한가에 기준을 둔다. 인간과 유사한 자의식이 있는가? 인간처럼 고통을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는가? ‘의식'과 ‘고통'은 인간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구제해야 할 도덕적 기준이 된다. 신경조직이 있는 동물에 고통을 주는 것은 그래서 부도덕하다. 하지만 의식이 없으므로 고통 없이 도살할 수 있다면 도덕적으로 아무 문제가 안된다. 식물과 조개는 마음대로 해도 된다. 어류는 애매모호하다. 곤충이나 벌레는 아예 거론 대상도 되지 않는다.

    ‘의식'이란 무엇인가? ‘고통'이란 과연 어떻게 정의하는가? 인간의 눈과 느낌으로? 아니면 과학으로? 주관성을 설명할 수 없는 경험 과학은 이런 의문에 확정적인 답을 영원히 내놓지 못한다. 개가 실제 치통을 느끼는지 안 느끼는지 수의사도 장담하지 못한다. 막연히 짐작할 뿐이다. 식물과 조류는 그들 나름의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고 장담할 수 있나? 최근의 연구는 기존 상식을 오히려 뒤집고 있다. 동물과 식물에 차이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인간 중심적으로 설정된 모든 기준은 한계를 갖는다는 뜻이다.

    서양의 유일신 종교는 신 앞에 인간을 겸허하게 낮춘 듯 하지만, 사실은 지극히 인간(백인) 중심적인 세계관이다. 모든 생명체 중에서 인간만이 신에게 선택된 특수한 지위를 갖는다. 이른바 ‘영혼을 가진 유일한 존재'이다. 인간 중심적 사고는 모든 서양인의 살과 뼈에 뿌리 깊게 박혀있다. (싱어처럼) 스스로 무신론자라고 자칭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한국인이 ‘난 기독교인이라 유교적 가치관과 아무 상관이 없어요’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유일신 미신에 근거한 유럽 백인의 인간 중심적인 사고는 타인종에게는 철저한 백인우월주의로 발현된다. 신학 밖에서 ‘신(진리)을 추구하는' 서양 철학 역시 그 한계를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다. ‘모든 생명이 다 소중하다'는 불교나 자이나교 세계관은 왜 그런 생각이 나오는지 그 이유를 감히 상상도 못 한다.

    서양 도덕론자 싱어의 40년 해묵은 주장이 한국에서 비판 없이 수용되고 유행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신세대 철학 교수마저 (싱어 자신도 더는 믿지 않는) 싱어의 초기 논리를 그대로 답습해 전파하는 현실에 기가 막힌다. 학문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서양 학자들이 대학 연구실에서 ‘조작'해 내는 화려한 ‘직업적 논술’을 진정한 ‘양심의 고뇌’와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내가 학부에서 서양 철학을 공부했던 시절에는 가르치는 교수도 서양 철학자의 요지와 숨은 맥락을 잘 이해하지 못 해 보였다. 언어 장벽은 이제 많이 극복되었겠지만, 그들의 철학적 사변에 숨어있는 역사 종교적 배경과 편견은 그때나 지금이나 잘 보지 못하는 것 같다. 드러난 말과 형식 논리 그대로 ‘순진'하게 받아들이는 실수를 계속한다. 서양 논리를 더 냉혹하게 비판적으로 보고 해석하지 못하는 게 아쉽다.


    한 젊은이가 지난 2019 6월 18일 서울 신촌의 한 고깃집에 들어가 “음식이 아니라 폭력”이라며 시위를 하고 있다. / 트위터 캡처
    시장경제 논리로 돌아가는 지구촌 현실을 단순 도덕 논리로 재단할 수 없다. 고대나 중세 시대와 달리, 우리가 사는 현실에 이제 도덕 철학자가 사변적 직관이나 논리로 잣대를 들이대는 게 불가능하다. 동물에 가해지는 학대와 폭력의 일차적 원인이 인간의 육식에 있다는 ‘상식적 직관'은 틀리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일차방정식 논리로 육식 그 자체가 부도덕한 것이 되지 않는다. 초등학생이 이해 못하는 이 고등 수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거리에 나가 남을 함부로 욕하고 자신의 신념만이 옳다는 독선을 행하게 된다.

    육식은 개벽 이래 인류와 함께 해온 ‘호모 사피엔스’라는 잡식 동물의 생존 양식이다. 채식하고 싶어도 채식으로만 생존을 연명할 수 없는 다양한 환경 조건이 있다. ‘육식 자체가 부도덕하다’고 단정하는 것은 인간이 잡식 동물이라는 엄연한 생물학적 사실과 그 역사를 외면하는 자기모순이다. 현대의 인간은 채식만을 할 수도 있고 육식만을 할 수도 있다. 본인의 선택과 의지에 따라, 영양제가 널리 보급된 오늘날, 양극단이 다 가능하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와 현실은 항상 그 양 극단의 중간 어디에서 전개되었다. 채식이 이상이라 해도 변화는 점진적일 수밖에 없다. 인간도 변화에 적응해서 살아남는 하나의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정작 문제가 되는 건 육식이라기보다 ‘과다한’ 육식이다. 폭발적으로 점증하는 고기 수요, 그 수요를 맞추기 위해 생겨난 공장형 축산업이 사육과정에서 동물에게 가하는 학대와 고통이 우리 양심을 괴롭힌다. 고기를 먹지 말라고 일방적으로 요구하기보다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소비자 행동을 유도해 농장 동물의 고통을 줄여나가야 한다. 시장경제 논리에 맞는 해결책을 추구해야 한다. 고깃집에 뛰어 들어가 ‘육식은 폭력이다'라고 자기만족을 위한 소란을 벌리면, 정작 중요한 문제 해결은 그 소란의 와중에 묻혀 버린다. 설혹 자신의 이상에 비추어 볼 때 차선책으로 보인다고 하더라도, 실질적인 문제 해결을 추구해야 한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이상을 고집하면 그 이상의 추구에 오히려 방해될 뿐이다.

    싱어가 지난 70년대에 내세운 ‘윤리적 채식주의’는 당시의 끔찍한 동물 사육방식에 충격을 주자는 ‘급진적’ 사회 운동이었다. 그 주장의 배경은 미국과 선진 유럽이었다. 월남전이 촉발한 미국 젊은 세대의 반전 운동인 ‘히피 물결’의 연장선에 있다. 동물을 영혼이 없는 도구로만 보는 기독교 가치관이 상징하는 구세대 질서에 대한 젊은 세대의 ‘판 갈아 엎기'이기도 했다. 그때와 지금은 동물 사육 환경도 변했고 동물권 핵심 쟁점도 달라졌다. 이제 70대에 들어선 싱어는 30대 젊은 시절 자신이 주창한 강경한 윤리적 채식주의를 오히려 비난하고 있는 판이다. 지난 40년간 ‘윤리적 채식주의'가 아무런 실질적 변화를 유도하지 못했다는 걸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반백 년이 다 되어가는 철지난 서양 사람의 주장이 왜 한국에 뒤늦게 수입되어 유행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일본 지배를 거쳐 미국 영향권에 있으면서 우리는 정작 우리 선조가 수천 년 해온 명상인 참선이나 단전 호흡 등에는 관심이 없었다. 최근 서구에 명상 붐이 불면서 그들의 저술과 강연을 통해 역수입한다. 수입이든 역수입이든 그 원산지가 어디든 도움이 된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모든 ‘생각'의 배경에는 역사적 문화적 배경이 있다. ‘생각'의 적용은 현실에서도 공동체마다 각기 그 구체적 맥락이 다를 수밖에 없다. 혹 우리는 이런 사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게 아닌가? 우리 자신의 반성과 사고가 없어서 그런 건 아닐까?

    얼마 전 아내가 미국인 친구를 초대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스테이크 요리를 선보이겠다며 직접 재료를 준비해서 우리 집으로 들고왔다. 아내가 날 소개하면서 동물복지에 열정을 갖고 있다고 하자 겸연쩍어 했다. 당연히 윤리적 채식주의자라고 생각했던지, "고기 먹는 게 도덕적이지 않다는 건 알지만 너무 맛이 좋아 끊지 못한다"라고 미안해했다. 나는 "육식에 아무런 도덕적 문제가 없다. 좋아하는 스테이크를 먹는 게 뭐가 문제냐"라고 격려를 해주었다. 나의 왠지 모순되어 보이는 논리에 오히려 아내 친구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보였다.

    난 사람들이 즐겁게 같이 먹고 어울리는, 너무나 동물적이고 인간적인 행위 그 이상의 가치는 유한한 삶에서 찾기 어렵다고 본다. 굳이 윤리학 용어를 써야 한다면, 가장 ‘도덕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모든 동물에게 먹는 것 이상 더 중요하고 그래서 더 고귀한 가치가 있는가?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다’라는 우리 말은 속어로 들리지만, 사실은 삶의 진실이다. 우리는 다 한시적으로 살다가 죽는 생물학적 존재이다. 살아있는 동안 같이 어울려 즐겁게 먹는 그 이상의 가치는 없다. ‘육식하는 사람이 죄책감을 느끼도록 하라’고 선동했던 30대의 싱어는 이제 노인이 되어 그 철없던 젊은 시절을 회고하며 "다소 순진했다"고 뒤늦게 고백하고 있다.

    미국 사람들도 언듯 ‘자기모순'으로 보이는 내 입장을 잘 이해 못 한다. 영국 도덕 철학자 리차드 머빈 헤어 (Richard Mervyn Hare)가 친환경 농장에서 고통없이 사육된 고기만을 소비하는 ‘유연한 채식'(demi vegetarianism)이 오히려 동물의 고통을 덜어주는데 실질적으로 가장 큰 도움이 된다는 주장을 내놓은 바 있다. 시장경제 논리를 무시한 도덕적 강요란 헛발질에 불과하다. 일부 동물권 강경론자는 ‘어떠한 사육 방식도 고통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고집한다. 조금도 고통이 없는 삶이란 최소 지구 환경에서는 없다. 유아적 이상론은 동물 복지를 위한게 아니라 자신의 심리적 문제를 반영할 뿐이다.

    ‘도덕적 가치’란 현실에서는 복합 다중적인 현상으로 나타난다. 이 현실을 모르면 단순하고 추상적인 원리를 고집하게 된다. ‘생각'으로 형성된 하나의 이념적 가치만을 내세우면 현실에 잠재된 인본주의적 가치가 훼손된다. 다 같이 잘살자며 ‘전체'를 강조한 공산주의가 정작은 민중을 개돼지로 취급한 전체주의 독재로 흘러간 이치이다. 조화와 균형을 잃지 않아야 한다. 공자와 석가모니가 조화와 균형을 의미하는 ‘중도’(中道)를 최고 가치로 내세운 데는 다 깊은 이유가 있다.

    난 채식이 가능한 환경에서는 가급적 채식을 지향하지만 (복잡한 현실의 다양한 가치를 고려해) 때로는 육식도 할 수 있는 ‘중도적 채식'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믿는다. 헤어의 ‘유연한 채식'과 궤를 같이한다. 채식을 주로 하지만 고통 없이 사육된 고기만 가끔 먹거나 상황에 따라 다소 유연하게 대처하는 채식자를 미국에서는 플렉시테리안(flexitarian)이라고 부른다. 싱어 역시 과거의 전투적인 채식을 버리고 이제는 ‘유연한 채식'을 하고 있다.

    돼지고기 몇 점이 들어가 있다고 찌개를 거부하는 것은 음식 낭비이다. 불교 논리로 보면 죽은 동물의 ‘보시’를 가치 없게 만드는 이기적 행위이다. 서양 논리에는 석가모니나 공자가 보여준 ‘중도의 유연함’이 없다. 형식논리의 ‘일관성'에 집착한다. 논리가 삶의 현실로 구현될 수 있다고 착각한다. 서양 직업 철학자의 논변에는, 삶과 죽음을 그 근본에서 바라보는 진짜 철학은 정작 실종되어 있다.

    ‘채식 = 동물보호'라는 논리는 단순 명쾌하다. 동물에 대한 잔인함에 질린 어린 내가 고기와 생선을 본능적으로 거부한 것도 ‘초딩적 사고’의 단순명쾌함을 보여준다. 누군가는 이렇게 반론할 수 있다. 아무리 고통 없이 사육하고 고통 없이 도살한다 해도, 육식은 생명에 대한 폭력 아닌가? 맞는 말이다. 모든 생명체는 어떤 환경이나 조건에서도 무조건 살려고 최후의 순간까지 몸부림친다. 모든 생명체에 내재하는 강인한 생명 의지를 박탈하는 건 폭력이다.

    자연환경과의 조화를 믿었던 미국 원주민은 그래서 반드시 생존에 필요한 만큼만 동물을 사냥했다. 잡아서는 고통을 가하지 않고 찰나에 목숨을 끊어주는 걸 의무라 생각했다. 죽이고 나서는 ‘보시'한 동물의 가죽과 뼈 그 어느 것도 낭비하지 않았다. 때때로 ‘희생'한 동물에게 제사를 지내주면서 그 ‘영’()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가장 이상적인 자연환경을 설계해 보라고 한다면 어떤 생명체도 다른 생명체를 죽일 필요가 없는 환경이다. 하지만 ‘이상'이란 인간의 ‘상상'이지 이미 드러난 자연계의 현실이 아니다.

    서양의 ‘윤리적 채식주의'는 식물이나 어류 기타 하등 생물체의 생명을 빼앗는 건 상관치 않는다. 서양의 공리주의 도덕론자에게는, ‘고통'을 느끼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가장 중요하다. 식물에는 신경조직과 뇌가 없어 동물처럼 고통을 느끼지 않을 거라고 보통 믿는다. 하지만 증명된 과학이 아니다. 인간과 유사한 신경체계에서 발생하는 감각적 고통 여부에만 초점을 두면, 상대적으로 우리 눈에 쉽게 보이지 않는 생명으로 가득찬 환경 파괴를 방조하게 된다.

    <식물이 알고 있는 것>(What a Plant Knows)이라는 책에서, 유전 과학자 대니얼 챠모비츠(Daniel Chamovitz) 박사는 식물도 ‘보고’ ‘느끼고' ‘냄새 맡으며' ‘기억'한다고 새로운 과학적 근거를 제시해 파문을 일으켰다. "식물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가?"라는 인간 중심적인 질문에 챠모비츠 박사는 식물에 대해 연구해 본 결과 "무엇 하나 섣불리 확신하기 어렵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말했다. 그는 앞에 사람이 서 있을 경우 그 사람이 입고있는 셔츠의 색깔을 식물은 구분해 알아본다고 주장했다.

    미국 전체 인구의 5% 정도가 채식인이다. 한국에서는 3-4%인 150-2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지난 2008년 한국 채식인구는 15만에 불과했는데 성장 추세가 가팔라 보인다. 전체 채식 인구 중 윤리적 채식주의가 어느 정도 되는지는 확실치 않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젊은 인구가 늘면서 윤리적 채식주의가 2-30대에 확산하는 경향은 분명해 보인다. 지난 2019년 설문조사에서 ‘육식이 비윤리적이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 응답자는 20대(26.0%), 30대(25.4%), 40대(20.5%), 60대(20.3%), 50대(18.5%) 순으로 나타났다.

    싱어가 <동물 해방>에서 ‘위험한' 단순 논리를 내놓은 지 벌써 45년이 흘렀다. 그 기간 공장형 축산업은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동물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학대는 중단되지 않았다. 윤리적 채식주의자 인구는 많이 잡아도 2-3%를 넘지 않는다. 운동권식 윤리적 채식으로 공장형 축산업은 조금도 축소되지 않았다. 육식자를 모두 적으로 몰아붙이는 강경한 윤리적 채식주의는 동물복지 운동권 전체를 사회의 적으로 오해하게 할 뿐이다.

    생활 수준이 올라가면서 육식은 전 세계적으로 계속 늘어만 간다. 인류의 모든 개인이 채식으로 돌아서지 않는 한 윤리적 채식주의는 동물복지 개선에 조금도 도움을 주지 못하는 공허한 외침이다. 현실성 없는 ‘주의'에 매달리는 모습은 자기만족이나 도덕적 우월감으로 비칠 뿐이다. 이미 도살된 돼지 살 몇 점이 있다고 음식을 낭비하는 건 도덕적인가? 음식을 만드는데 들어간 식물과 사람의 정성은 시궁창으로 들어가도 문제가 없는가? 비위가 맞지 않거나 건강을 위해서 스스로 못 먹고, 안 먹는 건 자구책이다. 사실은 엄청나게 먹고 싶은데 허황한 서양의 도덕 논리에 속아 억지로 채식을 하는 건 자기 몸에 대한 학대에 불과하다. ‘생각'에 얽매여 억지로 하는 채식은 오래가지도 못한다.


    李奕良/Unsplash
    현실에서 동물 복지에 가장 효율적인 접근은 친환경적으로 생산된 우유나 계란 고기를 소비하도록 소비자가 직접 유도하는 시장논리의 활용이다. 자유롭게 방사해 키운 닭은 그런 사실을 인증해 주고 더 비싸게 받을 수 있도록 유도한다. 공장형 축산업체가 무조건 악이 아니다. 단지 이익을 추구할 뿐이다. 자연 친화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사육과 도살 방식으로 더 이익이 남는다면 자발적으로 그런 방식을 추구한다. 이미 시장에서 이런 ‘인증' 방식의 효율성이 점차 확인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급속히 확산하는 추세이다.

    미국의 경우, 슈퍼마켓 계란 제품 절반 가까이가 자연 상태에서 풀어 키운 닭에서 나온 친환경 축산 인증을 받은 계란이다. 인증 수준도 다르다. 가격도 그에 따라 달라진다. 소비자는 건강을 위해서도 인증 제품을 선호한다. 일부에서 인증의 정확성 여부에 대한 논란을 제기하지만 해결할 수 있는 기술적 문제이다. 미국의 한 대형 슈퍼마켓 체인은 공장 사육방식 고기 제품은 아예 유통하지 않는다는 친환경 인증 정책을 선언했다. 싱어를 포함한 합리적 동물 운동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강경한 윤리적 채식주의자들은 여전히 ‘도살을 오히려 합리화한다'며 항의 시위를 벌였다. 젊어서 투쟁을 부추긴 싱어가 이제는 누구보다 혀를 차는 지경이다.

    채식은 채식이 건강에 좋다는 이유가 아니면 확산하기 어렵다. 육식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한 장구한 세월에 걸쳐 형성된 식습관이다. 사실상 필요조건에 가깝다. 인류는 육식과 채식을 같이 하면서 진화해 왔다. 하루아침에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순진하다기보다 무모하다. 현재의 ‘과다한 육식’은 공장 축산으로 생산된 고기가 건강에 해가 된다는 인식이 확산하면서 조정받을 가능성이 더 크다. 대규모 집단 사육은 성장 호르몬과 항생제를 남용해 키울 수밖에 없다. 암과 각종 질병을 유발한다. 정확한 정보를 취득한 소비자는 자신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육식을 줄이거나 채식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정확한 정보 확산에 노력하는 게 동물 복지에 차라리 더 도움이 된다.

    모든 생명체는 진화라는 하나의 고리에 묶여 있다. 진화의 현실에서, 모든 생명체는 생존과 번식을 위해 반드시 주변 환경과 다른 생명체를 이용하고 파괴해야 한다. 이를 뒤집으면 각 생명체는 다른 생명체를 위해 ‘보시'(布施)하도록 숙명지어져 있다. 인간의 분별로 보아 좋든 싫든 엄연한 자연계의 ‘생명 현상'이다.

    특히 인류는 인류 자신을 포함한 지구의 모든 생명을 다 죽이고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지구에 등장한 생명체의 99.9%가 이미 멸종했다. 지금도 매년 약 2천 종이 멸종하고 있다. 인류가 계속 환경을 파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 문명’을 뒤집으면 ‘생명과 환경 파괴’이다. 진정으로 생명에 대한 모든 폭력을 중단하고 싶다면, ‘인류 스스로 당장 번식을 중단하고 지구에서 사라지자'고 주장하는 게 더 논리적이다. 실제 이렇게 주장하는 미국 여성주의 작가가 있다. 형식 논리로 도덕과 철학을 논 할 수 없다.

    이상사회를 점진적으로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이렇게 해야만 가능하다'는 고집은 그 최종 목표가 같다고 해도 현실에서는 하늘과 땅만큼 그 접근 방법과 기본 철학이 다르다. 동물에 가하는 인간의 학대와 고문은 하루빨리 종식되어야 한다. 그들의 고통에 우리 모두 진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인간이 가하는 학대와 폭력이 ‘완전히’ 사라지는 이상사회가 올 것이라고 나는 기대하지 않는다. 인간이 신음하지 않는 사회도 인류는 단 한 번도 이루어 본 적이 없다. 영원히 오지 않는다. 비관론이라 해도 좋다.

    생명의 본질은 ‘살아서 고통받다 죽는다’는 생물학적 사실이다. 죽으면 고통도 없다. 살아있음은 고통받다 가끔 즐겁기도 함을 말한다. 우리는 다만 고통은 조금이라도 더 줄이고 기쁨은 조금이라도 더 늘리려고 노력할 수 있을 뿐이다.

    인류 역사에서 유토피아의 꿈을 거리에서 팔아먹은 ‘주의'(ism) 장사꾼들은 모두 잔인한 독재자나 사기꾼으로 드러났다. 이상이 반드시 현실이 될 수 있다고 고집하며 거리에서 싸우는 도덕적 이념은 실제로는 지극히 자아도취적이고 위험한 아집에 불과하다. 개인의 선택은 그게 무엇이든 존중한다. 양심에 따른 ‘호소’는 언론 자유의 권리이다. 하지만 자신의 양심을 타인의 양심보다 도덕적 우위에 두는 자만은 독선이다.

    상충하는 가치판단과 이해관계가 선거와 법으로 타협 조정되는 법치가 절대지존인 민주국가에서 한 개인의 양심적 선택은 양심의 사적 영역에 머물러야 한다. 채식을 사회 전체의 우상으로 밀어붙이면 ‘컬트’(cult)가 될 뿐이다. 자신의 살을 뜯는 모기도 죽이지 않은 간디처럼, 묵묵한 실천과 자기희생만이 오히려 타인을 감동하게 하고 사회 변화를 유도할 수 있다.

    ※ 외부필자의 원고는 IT조선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남시중 박사는 실리콘밸리에서 변호사 및 엔젤 투자자로 20년 넘게 활동했다. 최첨단 기술 시대의 윤리 철학 문제에 관심을 두고 미국에서 저술 활동을 해온 철학자이기도 하다. 국내 출간 저서로는 동물의 도덕적 문제를 다룬 <개를 위한 변명 - 보신탕과 동물권리론에 관한 철학적 성찰>과 초기 인터넷 혁명을 실리콘 밸리 현장에서 직접 경험하고 미래를 전망한 <벤처@실리콘 밸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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