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포커스] 2억 달러 풍운아 '라이트'가 광학 시장에 남긴 교훈

입력 2020.06.19 06:00

광학 기업 ‘라이트(Light)’를 아시나요? 한국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기업이지만, 한때 한국 이외의 다른 나라에서는 ‘광학 업계 역사를 다시 쓸 주역’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기업입니다. 멀티(여러 개) 카메라 부문에서 눈부시게 활약한 덕분입니다.

손바닥 크기 본체에 카메라 유닛을 16개나 장착한 콤팩트 카메라 ‘L16’, 뒷면 펜타(5)카메라를 장착한 스마트폰 ‘노키아9퓨어뷰’ 등 멀티 카메라 대표 제품 모두 라이트의 기술을 씁니다. 기술 중 일부는 최신 스마트폰의 카메라 유닛에 적용됐습니다.

라이트 L16 / 라이트
최근 라이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디지털 카메라와 스마트폰 대신 자율주행차 기술 개발에 주력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멀티 카메라는 삼성전자와 화웨이, 애플 등 내로라하는 스마트폰 기업이 소유하고 싶어 군침을 흘리는 유망 분야가 아니던가요? 그런데, 이 부문 혁신 기업으로 꼽히는 라이트는 왜 발을 빼는 걸까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멀티 카메라의 흥망성쇠를 온몸으로 겪은 라이트

라이트는 2015년 L16 카메라를 앞세워 혜성처럼 등장한 기업입니다. 초점 거리가 모두 다른 카메라 유닛 16개를 활용해 사진을 찍고, 촬영한 사진은 소프트웨어를 활용해 다양한 효과까지 주는 제품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 카메라는 셔터 릴리즈 버튼을 한번만 눌러 28~150㎜ 사이 초점 거리 사진을 모두 담을 수 있습니다. 이 사진들을 합성해 5200만화소 고해상도 사진이나 HDR 혹은 다이나믹 레인지(묘사력) 확장 사진을 만들 수 있습니다.

특히 주목 받은 것이 3D 깊이 측정 기능입니다. 사진을 여러 장 찍을 때 초점 거리, 즉 시야의 차이를 토대로 피사체·카메라·배경 사이의 거리를 추론하는 기능입니다. 이를 통해 사진 초점이나 배경흐림을 찍은 다음 임의로 조절할 수도 있었습니다.

라이트는 L16을 ‘DSLR 카메라 수준의 고화질 사진을 찍는 콤팩트 카메라’라고 소개했습니다. 카메라 유닛 여러개를 활용해 다양한 촬영 효과를 내는 만큼, 라이트의 멀티 카메라 기술은 거의 모든 광학 기기의 부피는 줄이고 성능은 높일 기술로 주목 받았습니다.

라이트 L16 분해도 / 라이트
라이트 L16을 눈여겨본 알파벳 투자부문(옛 구글 벤처스)은 개발 자금을 모아주겠다고 자청하고 나섰습니다. 알파벳은 모금 활동 이틀만에 목표 금액을 달성했고, 반년 남짓한 시간 동안 총 3000만달러(364억원)를 끌어 모았습니다.

하지만, 라이트 L16은 발표 후 숱한 구설수에 휘말립니다. 먼저 판매 일정이 계속 미뤄집니다. 투자자는 애가 탈 대로 탄 끝에 투자 후 2년이나 지난 2018년에야 제품을 받습니다. 하지만 라이트 L16 카메라의 완성도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자동 초점, 사진 촬영과 처리 등 모든 동작 속도가 느려도 너무 느렸습니다. 터치 조작계와의 궁합도 어색했고, 셔터 우선 등 촬영 기능 일부도 빠졌습니다.

느리디 느린 동작 속도를 참고 쓰겠다던 사용자들은 또 다른 결과에 실망하게 됩니다. 사진 여러장을 합치겠다는 아이디어는 좋았으나, 기술 완성도가 낮은 탓에 사진이 흔들리기 일쑤였습니다. 피사체 경계가 어색하게 처리되는 일도 잦았습니다.

라이트 L16은 애증의 카메라였습니다. 단점이 컸지만, 충분히 밝은 곳에서 쓰면 고가의 중형 디지털 카메라 수준의 고화질을 내기도 했습니다.

혁신·기술 있어도 기본기·완성도 없으면 성공도 없다

결국, 라이트 L16은 용두사미 디지털 카메라가 되고 맙니다. 라이트는 멀티 카메라 기술을 스마트폰 카메라에 이식하기 위해 2019년 소니·샤오미·노키아와 손을 잡습니다. 2019년에는 ‘노키아9퓨어뷰’라는 결과물도 내놓습니다.

휴대전화 업계 맹주 노키아와 명품 렌즈의 대명사 자이스, 멀티 카메라 혁신 기업 라이트가 함께 만든 스마트폰 ‘노키아9퓨어뷰’는 안타깝게도 시장에서 외면을 받습니다. 기계 성능이 동급 스마트폰보다 낮았고, 라이트 멀티 카메라 기술의 단점인 느림, 불편함, 호환성 등 문제가 여전히 개선되지 않아서입니다.

라이트의 광학 기술을 품은 스마트폰 노키아9퓨어뷰 / 노키아
라이트가 실패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동안, 애플·구글·삼성전자·화웨이 등 경쟁사는 멀티 카메라 기술을 눈부시게 발전시킵니다. 인공지능(AI) 기술 덕분입니다. AI 멀티 카메라 기술은 효과, 속도 면에서 라이트의 소프트웨어 멀티 카메라 기술을 압도했습니다. 결국 라이트는 멀티 카메라가 아닌, 3D 깊이 측정을 활용한 자율주행차 기술 개발에 주력하기로 결정합니다.

실패했다고 하지만, 라이트가 광학 업계에 남긴 발자국은 깊고 큽니다. 2015년 이후 라이트가 모은 투자금은 1억8570만달러(2247억원)나 됩니다. 벤처 투자 업계 큰손 소프트뱅크벤처스, 광학 업계 대부 라이카가 라이트에 투자했습니다. 성장 가능성은 충분했다는 증거입니다.

라이트는 혁신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정보통신업계의 격언을 증명하는 사례입니다. 앞서 먼저 문을 닫은 라이트필드 카메라 기업 ‘라이트로(Lytro)’와 마찬가지입니다. 혁신에 완성도를 더해야 비로소 소비자와 업계의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멀티 카메라 시대, 산전수전에 온갖 영욕을 겪은 라이트. 이 교훈을 토대로 자율주행차 기술 부문에서는 두각을 나타낼 수 있을까요? 눈여겨볼 일입니다.

차주경 기자 racingcar@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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