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상고 국내 첫 ‘야구산업과’ 신설...“스포츠 산업계, 진로 길잡이 나선다”

입력 2020.06.29 06:00

서울시교육청 ‘직업계고 재구조화 사업’ 선정
2022년 ‘야구산업과·생활스포츠과’ 각 1학급 신설
"스포츠 산업계로 진로 교육에 눈 뜨는 계기 되길"

89명. 2019년 치러진 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에 지명된 110명(신청자 1078명) 중 고졸 지명자의 숫자다.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에 등록된 2020년 6월 현재 고교 야구부는 전국에 81개, 고3 선수만 915명이다. 대학 진학 후 다시 기회를 노리는 이들도 있겠지만 대학 진학도 좁은 문이긴 마찬가지다. 경력을 살리지 못하고 접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교야구 선수들이 겪는 가혹한 현실이 이렇다.

청소년기를 운동에 열정을 쏟은 학생 선수들, 혹은 스포츠를 좋아하는 학생들이 고교 졸업 후 스포츠 산업계에서 전문인으로 나설 수 있도록 또 다른 성공의 길을 제시한 학교가 있다. 지난해 26년만에 야구부를 재창단한 경기상업고등학교(이하 경기상고) 얘기다.

이 학교는 프로 입단이나 대학 진학이 아니더라도 스포츠 산업계에서 전문인으로 일할 수 있는 야구산업과와 생활스포츠과를 만든다. 야구산업과는 국내 고등학교 중 최초 개설이다.

경기상고 야구부 코칭 스태프와 선수단이 학교 야구장에 모여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경기상고
28일 학교에 따르면 경기상고는 서울시교육청의 직업계고 재구조화 지원 사업 일환으로 ‘야구산업과’와 ‘생활스포츠과’ 승인을 통보받았다. 신입생은 올해 중학교 2학년을 대상으로 모집해 2022년 각 학과당 한 학급을 신설한다.

이번 사업은 4차산업혁명 시대의 미래 성장 동력에 맞는 특성화고 학과 재구조화를 통해 직업교육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마련했다. 학과 개편, 학급 증설 등으로 직업교육과 산업 수요 간 인력 수급 불일치 해소를 기대할 수 있다. 고졸 인재에 대한 인식 개선과 취업문화 확산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

스포츠 선수로 인생의 길을 정한 고교생들은 정작 자신이 좋아하는 스포츠와 관련한 학문을 배울 길이 마땅찮았다. 교육부는 ‘공부하는 운동선수’ 육성을 강조하지만, 현실은 이들이 진로와 관련 없는 수업을 이수해야 하는 상황이다. 산업수요에 따른 특성화고의 변화도 다를 바 없다. 특성화고의 변화는 대부분 기계·전자 등 공업계열, 세무·금융 등 상업계열, 조리·미용 등 가사계열에 그쳤다. 스포츠 산업의 성장과 달리 학과재구조 및 개편은 미흡했다.

이화영 경기상고 교감은 학과 신설과 관련해 "경직되어 있는 직업계고의 교육환경을 혁신하는 좋은 사례가 될 것"이라며 한편으로는 "동물을 좋아하는 학생들이 수의사를 목표로 하듯이, 야구 선수로서 열정을 쏟은 학생들이 프로 입단이나 대학 진학이 아니어도 야구 산업계 전문가로 종사할 수 있도록 진로 길잡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경기상고는 직업계고 재구조화 지원 사업 신청에 앞서 2019년 고려대 교육문제연구소에 학교 중장기 발전계획 수립 및 시행을 위한 연구를 의뢰했다. 연구소는 회생방안으로 글로벌 무역과, 글로벌 금융과, 공공행정과 등 기존 상고 전문계과를 넘어 스포츠를 융합한 학과 개설을 제안했다. 학교는 학부모들과 교육계 전문가 의견을 적극 반영해 야구산업과 및 생활스포츠과를 개설하기로 했다.

이 교감은 "야구산업과 개설로 야구부 학생들도 관련 분야에서 배움의 즐거움을 느끼고 진로를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게 됐다"며 "선수가 아니면 나아갈 길이 없어 진로를 걱정했던 야구부 학부형들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어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최덕현 경기상고 야구부 감독은 이 학교 63회 졸업생이자 야구부 출신이다. OB 베어스(현 두산 베어스)와 한화 이글스에서 프로 생활을 했다. 최 감독은 프로 은퇴 후에도 야구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 트레이너 등 각종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 결과 두산베어스에서 전력분석원과 고교 코칭스태프로도 활약할 수 있었다.

그는 "모든 야구부 학생들이 프로에 가면 좋겠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며 "스스로도 야구 산업 관련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고, 이번 야구산업과 개설로 후배들이 운동에 전념하면서 다양한 스포츠 산업으로 진로를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고 말했다.

한정된 선수 수급과 달리 선수 전문 트레이너, 분석관, 프런트 등 야구 산업에서 필요로 하는 전문 인력 수요는 점차 늘어날 전망이다. 경기상고는 야구산업과 운영을 통해 구단·협회 등에 필요 인력을 적재적소에 공급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김재익 경기상고 야구부장은 "프로야구 구단 운영을 위해 필요한 인력이 지금의 10배가 될 것이라는 구단 관계자의 얘기를 많이 듣는다"며 "향후에는 한국야구위원회와 프로구단은 물론 관련 산업계와 지속 협력 관계를 만들어 학생들이 전문 인력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생활스포츠과는 스포츠·레크리에이션 및 스포츠 관련 경영·행정·사무직 종사자를 육성한다. 스포츠지도사 관련 자격증 취득은 물론 인력양성 유형에 맞는 다양한 자격증 관련 학교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다. 스포츠 유관기관(대한체육회·선수트레이너협회·대한필라테스협회·대한요가협회 등)과 정기 산학협력 워크숍을 열어 학생들의 취업 연계도 돕는다.

경기상고는 교육부 예산지원으로 전문가의 교육과정 컨설팅, 야구전문데이터 분석실, 트레이닝실 등 인프라 구축으로 교육시스템을 체계화 해 스포츠 산업 분야 인력을 양성하겠다는 목표다.


6월 13일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경기상고는 전통의 강호 경남고를 상대로 한 점도 내주지 않은 투수진의 호투와 잘 짜여진 수비력으로 2대0 승리했다. /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유튜브 갈무리
1923년 개교한 경기상고는 2019년 야구부를 재창단했다. 6월 열린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겸 주말리그 왕중왕전에서 인천고, 경남고, 경주고 등 전통의 강호를 차례로 꺾고 8강에 올라 가장 주목받는 팀으로 꼽혔다. 이준기, 구민수, 전영준, 황태인 등 고교 우수 선수로 성장한 투수진과 잘 짜여진 조직력을 보여준 안진(포수), 김서진(중견수), 박성재(1루수), 염호준(3루수), 유준서(유격수), 장우창(2루수), 최진성(좌익수), 황준서(우익수) 등 많은 선수들이 두각을 드러냈다.

이화영 교감은 "특성화고 재구조화 사업은 진로직업교육의 영역 확대, 야구산업 및 스포츠 산업의 일자리 창출의 새로운 교육모델이 될 것"이라며 "교육부와 서울시교육청의 올바른 결정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광영 기자 gwang0e@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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