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원의 오덕이야기] (130)슈퍼로봇에 드라마 융합 시도한 '그로이저X'

입력 2020.07.04 12:35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오덕'(Otaku)은 해당 분야를 잘 아는 '마니아'를 뜻함과 동시에 팬덤 등 열정을 상징하는 말로도 통합니다. IT조선은 애니메이션・만화・영화・게임 등 오덕 문화로 상징되는 '팝컬처(Pop Culture)' 콘텐츠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합니다. 어린시절 열광했던 인기 콘텐츠부터 최신 팝컬처 분야 핫이슈까지 폭넓게 다루머 오덕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 줄 예정입니다. [편집자주]

한국에서 태권브이가 공개되던 1976년, 일본에서 마징가Z의 파생작인 ‘그로이저 엑스(X)’가 등장한다. 그로이저X는 당시 슈퍼로봇의 기본 전투방법이던 ‘육탄전'에서 벗어나 전투기에 가까운 ‘공중전'에 초점을 맞춘 것이 특징이다. 등장인물보다 로봇 액션에 초점을 맞췄던 1970년대 슈퍼로봇 애니메이션과 달리, 등장 캐릭터의 이야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 작품으로도 평가받는다.

그로이저X는 한국 40대이상 성인남성 사이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작품이다. 한국에서는 1979~1980년 MBC방송국을 통해 방영됐다. 그로이저X 한국판 주제가는 당시 어린이 콘텐츠 주제가에서 두각을 보였던 남성 트리오 가수 ‘별셋'이 담당했다.

그로이저X / 야후재팬
애니메이션 그로이저X는 사고로 지구에 불시착한 ‘가이라 행성' 탐험대가 지구침략에 나서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들 외계인은 자신들의 행성의 보스인 ‘게르돈 제왕'의 이름을 앞세워 지구정복을 개시한다.
그로이저X 오프닝 영상 / 유튜브
침략 성향의 게르돈 제왕의 신하 중에서는 우주의 평화를 주장하는 과학자 ‘얀 박사'가 있다. 얀 박사는 로봇으로 변신되는 폭격기 ‘그로이저X’에 자신의 딸 리타를 태워 지구로 탈출시킨다. 리타는 지구의 파일럿인 주인공 ‘카이사카 죠'와 합류하고, 그로이저X로 가이라 제국의 로봇에 맞서싸우게 된다.

그로이저X DVD 패키지 일러스트 / 아마존재팬
1970년대까지 슈퍼로봇 애니메이션은 ‘정의가 악을 무찌른다'는 권선징악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한 작품이 대부분이다. 그로이저X 스토리 역시 큰 틀에서 보면 권선징악이 기본 골격이다. 하지만 그로이저X에는 여주인공 리타가 자신의 친구들과 싸워야만 하는 슬픔과 주인공들의 주변 인물들이 전쟁 속에서 목숨을 잃는 등 앞서 등장한 슈퍼로봇 애니메이션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드라마적 요소가 녹아있다.

◇ 만화 마징가Z의 장렬한 스토리 구조를 이어받은 ‘그로이저X’

그로이저X의 원작자는 ‘마징가Z’ 만화책을 그렸던 만화가 ‘오우타 고사쿠(桜多吾作)’다. 그는 마징가 아버지로 평가받는 만화가 ‘나가이 고(永井豪)’의 원작을 바탕으로 ‘마징가Z’, ‘그레이트 마징가', ‘그렌다이저' 등 애니메이션 작품을 만화책으로 옮긴 인물이다.

마징가Z 만화 버전에서 보여줬던 가혹하고 장렬한 스토리는 오우타 작가의 손에서 탄생된 것이다. 마징가Z 원작자 나가이는 1984년 5월 출간된 애니메쥬 잡지 인터뷰를 통해 만화 마징가Z 스토리는 오우타가 만든 것이라고 인정한 바 있다. 자신은 감수만 했을뿐 작품의 스토리와 방향성에 손을 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로이저X 만화책 / 야후재팬
일본 현지 애니메이션 팬들은 그로이저X가 로봇보다 인간 드라마를 중시한 ‘콤바트라 브이(V)’, ‘볼테스 파이브(V)’ 등 나가하마 감독의 ‘로망로보 3부작'을 등장하게 만든 발판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나가하마 타다오(長浜忠夫)’ 감독은 ‘어린이의 전유물'로 자리잡은 로봇 애니메이션 속 권선징악 프레임을 깨뜨린 기념비적 인물이다. 그는 기존 로봇 애니메이션 이야기의 근본인 권선징악 대신 적과 아군 캐릭터의 사랑, 갈등, 혈연, 숙명 등을 가미했다. 어른들이 애니메이션을 보더라도 괜찮다는 평가가 나올 수 있는 인간사를 슈퍼로봇 애니메이션에 녹여냈다.

1976년 4월 일본에서 방영된 ‘초전자로보 콤바트라V’는 ‘우정'을 테마로 적군인 캠벨 행성의 등장인물이 자신들끼리 내부 갈등과 고뇌를 겪는 드라마다. 1977년 6월 공개된 ‘초전자머신 볼테스V’는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을 테마로 혈연간 다툼과 캐릭터의 운명, 숙명을 드라마틱하게 담아냈다.

그로이저X 여주인공 리타 / 야후재팬
그로이저X에는 망명자인 여주인공 리타의 고뇌가 담겼다. 리타는 극중에서 어린시절 친구부터 연인, 자신을 도왔던 은인들과 싸우게 되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들을 쓰러뜨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친구·동포와 총구를 겨누며 싸우고, 마지막에는 연인인 죠와 헤어지는 등 비극적인 운명의 여인으로 그려진 리타 / 야후재팬
애니메이션 그로이저X는 만화가 나가이와 마징가Z 애니 제작사인 토에이(東映) 간의 소송 과정에서 탄생된 작품이다. 애니메이션 업계에 따르면 당시 나가이와 토에이는 마징가Z 관련 상품 매출의 수익배분 문제로 다퉜다.

그로이저X를 만든 애니 제작사 낙크의 니시노 세이이치(西野聖市) 대표는 서적 ‘배틀호크 대도감'을 통해 그로이저X는 만화가 나가이가 가져온 기획서를 기반으로 만든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니시노의 주장과 달리 2003년 출간된 ‘나가이고TV애니메대전(永井豪TVアニメ大全)’에 따르면 그로이저X는 낙크가 독자적으로 기획한 것을 나가이를 필두로 만화사 다이나믹프로가 정리한 것으로 기록됐다. 기획 경위에 대한 주장은 서로 달라도 그로이저X가 마징가Z 원작자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공통점이다.

그로이저X 사운트트랙 일러스트 / 야후재팬
◇ 폭격기에서 로봇으로 변신 ‘그로이저X’

작품의 설정에 따르면 그로이저X는 폭격기 모양을 지칭하는 이름이다. 주인공의 ‘파이트 업!’이라는 외침과 함께 슈퍼로봇으로 변한 상태에서는 그로이저X가 아닌 ‘그로이저 로보'가 정식 명칭이다.

그로이저 로보 액션 피규어 / 에볼루션토이
그로이저X는 ‘미라클 실리코니움'이라는 특수합금으로 만들어졌다. 합금은 자가수리 기능을 갖춰 전투중에도 파손된 부분을 재생시킬 수 있다. 미라클 실리코니움의 자가수리 기능은 어디까지나 응급조치에 불과하다. 큰 규모로 파손되면 기지에서 부품 교체 등 수리를 해야 한다.

설정 자료집에 따르면 그로이저X의 크기는 길이 기준 100미터이며, 무게는 1200톤에 달한다. 슈퍼로봇 대명사 마징가Z의 18미터와 비교하면 상당히 큰 편이다.

그로이저X 액션 피규어 / 에볼루션토이
그로이저X는 ‘타키온'이라 불리는 에너지를 바탕으로 움직인다. 원작자 오우타는 타키온에 대해 정확하게 기술하지 않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에너지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그로이저X는 정통파 슈퍼로봇이라 할 수 있다.

1970년대 그로이저X 관련 서적 일부 / 만다라케
그로이저X에는 전투기 ‘G제트', 지상지중용 전차 ‘G탱크', 잠수함 ‘G샤크' 등 소형 전투 메카닉이 수납된다. 소형 메카닉 탑승은 그로이저X 조종석에서 메카닉으로 조종석과 함께 이동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로이저X의 약점은 공격무기가 앞쪽에 집중된 탓에 옆이나 뒤에서 오는 적의 공격을 막아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김형원 기자 otakukim@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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