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시장에서 정보통신 서비스를 하다보면 꽤 두꺼운 계약서를 작성해야 한다. 정상적인 조건뿐 아니라 모든 예외적인 상황을 상정해 사전에 일일이 규정하기 때문이다.
우리네와는 문화적인 차이를 느끼게 한다. 이렇게 너무 상세한 계약서를 보고 어떤 한국의 경영자는 상대를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계약서를 복잡하게 꾸몄다며 불평했다는 '일화도 있다. 마치 외국의 부호들이 결혼계약서를 작성하며 이혼을 상정해 조건을 명시하는 것과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예외 상황을 두루뭉술하게 작성하고 그런 일이 안 일어나면 다행이고 문제가 생기면 그때 가서 다툰다.
컴퓨터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벌어질 수 있는 모든 상황을 상정하고 일일이 처리하는 ‘루틴’(routine)을 넣어야 에러가 발생하지 않는 좋은 프로그램이다.
요즈음 부동산 정책을 보고 있노라면 한국 사회에서 흔히 작성하는 의향서(MOU)를 보는 것 같다. 아무런 구속력도 없고 의지만 담겨 있다. 내가 잠시 몸 담았던 영국 회사에는 이런 구속력 없는 협약서를 아예 체결하지 못하게 했다.
현 부동산 정책은 그 목표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 작동을 안 하거나 반작용이 일어날 때는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성이 없다. 의도만 갖고 남발되고 있는 것이다. 내 비록 부동산 전문가는 아니나 주택을 끼고 일어나는 소용돌이를 한번 짚어보고자 한다.
부동산 문제의 근원은 우리 사회가 자본의 가치나 힘을 얕잡아 보거나 공정이라는 틀 속에 가두려 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부동산으로 돈을 버는 것을 악한 일로 생각하고 벌을 주듯 접근하니 부동산 유통 경색이 일어난다. 대학총장을 지낸 경제학자는 이를 두고 "정부가 시장을 이기려 한다"고 비판했다.
주택 공급은 정부나 건설업자만 하는 것이 아니다. 자산가들이 주택에 투자해야 주택 공급을 늘릴 수 있다. 다주택 소유자를 무조건 비난할 일이 아니라 이들이 주택 공급을 늘리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주택으로 돈 버는 것이 비난을 받을 일이라면 다주택 소유자 뿐만 아니라 주택 건설업자도 비난을 받아야 한다. 몇 채 가진 임대사업자가 비난의 대상이라면. 수백, 수천 채 가진 임대 사업자는 더 많은 비난을 받아야 마땅하다. 마치 자영업자형 임대사업은 안되고 대기업형 임대사업자는 괜찮다고 하는 꼴이다. 노영민 비서실장처럼 소형 두 채는 안되고 백 평이나 되는 똑똑한 한 채로 수십억 버는 건 괜찮다는 말인가. 주택으로 돈을 벌면 안 된다는 생각은 이렇게 여러 모순을 일으킨다.
실수요자의 대출을 틀어막은 것도 넌센스다. 공급도 늘리고 수요도 늘려야 하는데 경색을 일으키는 정책만 쓰고 있다. 아울러 주택 공급을 늘리려면 취득세와 양도세를 낮춰 유통을 늘려야 한다. 다주택을 해소하거나 평수를 줄이고 다른 지역으로 옮기려 해도 양도세에 막혀 움직일 수가 없는 현실이다. 오히려 증여만 늘고 있다.
차라리 보유세를 높여야 한다. 이것도 징벌적으로 단순히 다주택자에게 중과하는 것이 아니라 총 주택자산에 보유기간과 실거주기간을 세밀하게 구간으로 나누어 공제하는 방식을 택해야 한다.
정작 정부가 할 일은 주거 환경이 좋은 지역을 늘리는 것이다. 아파트라고 하는 물건은 그 자체 상품만으로 가치를 발현하는 게 아니다. 교육, 의료, 문화, 교통, 쇼핑, 이웃 등의 환경에 의해 가치가 매겨진다. 주택 소비자는 강남과 유사한 지역과 환경을 요구하는 데 도시 외곽에 신도시 계획만 발표하니 시장에서 먹히지 않는다.
강남 대체지역은 목동 같은 지역이지 일산이나 용인이 아닌 것이다. 이 정부 들어 특목고, 자사고를 없앤다고 하니 강남으로의 집중 현상은 오히려 심화한다. 그 지역 전세가만 올린다.
서울 도심을 마천루로 재개발해 주거와 업무가 일어나는 공간으로 바꿔야 한다. 국토부는 도로나 철도를 열심히 건설할 것이 아니라 교통 유발을 줄이는 정책을 써야 한다.
고가 주택이 두려워 도심 재개발을 막을 것이 아니라 정부는 소형, 임대 주택 확보 방안에 집중해야 한다. 결국 주택으로 돈 버는 것을 죄악시 하는 한 주택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개발을 통해 발생하는 이익을 흡수하는 방식을 구상해야 한다. 그야말로 프로그램 작성하듯이 종합적인 세세함이 필요한 일이다.
※ 외부필자의 원고는 IT조선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김홍진 워크이노베이션랩 대표는 KT 사장을 지냈으며 40년간 IT분야에서 일한 전문가다. '김홍진의 IT 확대경’ 칼럼으로 그의 독특한 시각과 IT 전문지식을 통해 세상읽기를 한다. ho123j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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