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마다 디지털 카메라·캠코더·렌즈·스마트폰 카메라 등 광학 업계 이슈를 집중 분석합니다. [편집자주]

빛을 보충하고 조명 효과를 낼 때 쓰는 카메라 액세서리 ‘플래시’. 플래시를 여러개 쓰려면 꼭 ‘마스터(Master)’와 ‘슬레이브(Slave)’ 기능을 설정해야 합니다. 마스터 플래시가 신호를 주면 슬레이브 플래시가 동시에 혹은 순서대로 동작하는 방식입니다.

최근 캐논은 ‘플래시를 만들 때 마스터, 슬레이브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밝혔습니다. 이 이름이 과거 인류 최악의 악습이었던 ‘노예 제도’를 떠올리게 한다는 이유에서입니다. 니콘 미국법인도 질세라 ‘우리는 이미 2000년부터 이 이름을 안 쓰고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럴싸합니다. ‘주인’ 플래시와 ‘노예’ 플래시라뇨. 때마침 최근 영화계에서도 노예 제도를 옹호하는 모습을 그린 옛 영화를 두고 반면교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습니다.

인종과 성별, 성적 지향과 장애 차별 등 사회적인 악습을 없애자고 목소리를 내는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운동’이 세계 각국에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그 여파가 광학·사진 업계에도 불었습니다.

사진 업계에 분 정치적 올바름 운동의 바람, 초상권과 권익 요구하는 목소리 커져

캐논이 플래시에서 노예 제도를 연상케 하는 단어들을 퇴출하기 전 ‘초상권 문제’가 사진 업계 화제가 됐습니다. 앞선 기사로 사진 업계에서 일어난 초상권 문제를 다뤘습니다. 초상권, 한 사람의 얼굴이나 모습이 동의 없이 나쁘게 쓰이는 것을 거부할 권리.

가장 잘 지켜야 할 권리임에도 사진 업계는 초상권을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보도, 촬영의 자유, 취미용, 사회 용인 등 갖가지 권리에 짓밟힌 초상권을 구하려 손을 내민 것은 젊은 사진가들이었습니다. 온라인, 첨단 정보통신기술이 초상권을 얼마나 크게 훼손할 수 있는지 깨달은, 젊은 사진가들이었습니다. 세계 각국 법원과 기업도 이를 인정하고 속속 옛 악습을 고치고 있습니다.

초상권 문제는 자연스레 ‘사진 지식재산권’ 문제로 발전했습니다. 사진 작품에 정당한 권리를, 사진가에게는 이익을 부여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보기 좋은 사진이라고, 예쁜 사진이라고 마음대로 가져다 쓰면 안됩니다. 사진을 창작하는 수고, 사진이 주는 감동과 그 덕분에 생긴 가치를 정당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사진의 가치를 인정하고 대가를 지불하는 문화가 자리잡기까지는 아직 요원합니다. 그런데, 정치적 올바름 운동이 조금씩 변화를 주고 있습니다.

6월, 미국 법원은 정보통신신문사 ‘매셔블(Mashable)’에 사진가 스테파니 싱클레어(Stephanie Sinclair)’가 제기한 소송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2016년에 매셔블이 싱클레어를 ‘렌즈로 사회 정의를 찍는 10명의 여성 사진가’로 선정한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매셔블은 기사를 쓰려고 싱클레어의 사진 한장을 50달러(6만원)에 산다고 제안했습니다.

싱클레어는 이 제안을 거절합니다. 그러자, 매셔블은 그녀의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그 사진을 ‘임베드(인스타그램 서버에서 직접 사진을 가져오는 방식)’로 가져다 씁니다. 싱클레어는 저작권 침해로 매셔블을 제소합니다.

인스타그램 임베드 퍼가기 / 인스타그램
인스타그램 임베드 퍼가기 / 인스타그램
법원의 첫 판단은 ‘인스타그램 약관에 따라, 회원은 사진을 올린 순간 그 사진이 다용도로 쓰일 가능성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한다’였습니다. 매셔블이 잘못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싱클레어는 반발합니다.

그런데, 인스타그램의 발언이 법원의 판단을 뒤집을 가능성을 남겼습니다. ‘약관은 그렇지만, 사진을 쓰려면 원작자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이 소송은 아주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사진가가 인스타그램 등 SNS에 올린 사진을 마음대로 가져가 마음대로 쓰던 관행이 바뀔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진가가 자신의 사진을 SNS로 알리는 동시에,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을 가능성이 생겼습니다.

이밖에도 세계 곳곳에서 사진가, 영화 제작자들이 새로운 지식재산권·수익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사진이, 동영상이 공공재처럼 여겨지던 관행을 바꿔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진을 우아한 취미로 만들고 싶다면, 백안시보다 참여를

한국에서도 광학 기업이 정치적 올바름 운동을 편 사례가 있습니다. 캐논코리아컨슈머이미징 ‘굿 셔터 캠페인’입니다. 사진을 찍을 때 지켜야 할 예의,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면서 사진 취미를 즐기는 방법을 그림과 동영상 등 다양한 매체로 알린 캠페인이었습니다.

업계와 소비자가 굿 셔터 캠페인을 주목하고 참여했습니다. 한국 사진 문화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었다는 호평도 받았습니다. 캠페인이, 사회 운동이 업계와 문화 양상을 바꿀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실, 정치적 올바름 운동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우호적이라기보다는 비판적입니다. 단어 한두개로 너무 예민하게 군다, 너무 사소한 단어나 생각을 크게 잘못했다고 트집잡는다, 반대편 논리는 들으려 하지 않고 자기 주장만 일방적으로 강요한다 등 이유도 다양합니다.

하지만, 엄연히 문제가 있고 부작용이 큰 단어이기에 예민하게 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너무 익숙해 사소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대로라면 후세에 이 폐단을 고스란히 넘길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에 트집을 잡는 것입니다.

물론, 너무 급하게 바꾸려 하거나 자기 주장만 강요하는 자세는 고쳐야 하겠습니다. 다행히 광학, 사진 업계는 너무 급하게 자기 주장만 고집하지는 않는 모습입니다. 그저 조금씩, 목소리를 내고 하나씩 결과를 낼 뿐입니다.

인류의 역사 속 수많은 ‘결정적 순간’을 가장 선명하게, 적확하게 담은 것은 사진이었습니다. 사진은 기록이고 시간이며, 역사이자 미래였습니다. 그런 사진을 찍는 것은 우아한 취미로 인정 받았습니다.

세태가 바뀌며, 사회가 성숙하며 사진의 의미와 지위는 이전보다는 다소 빛바랜 모습입니다. 하지만, 사진 자체의 가치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바뀐 세태와 성숙한 사회에 어울리는 규범이 다시 세워진다면, 정치적 올바름 운동이 이 계기를 만들 수 있다면, 사진은 다시 옛 의미와 지위, 영광을 찾을 수 있겠습니다.

차주경 기자 racingcar@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