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소품으로, 때로는 양념으로. 최신 및 흥행 영화에 등장한 ICT와 배경 지식, 녹아 있는 메시지를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편집자주]

메모리즈-그녀의 추억(Memories-Episode 1 Magnetic Rose, 1995) : ★★★★☆(9/10)

줄거리 : 위성과 우주선 잔해 등을 주워다 파는 우주 고물상, 하인츠와 그의 일행. SOS 신호를 받고 도착한 곳에는 거대한 장미모양 인공 별이 떠있었다. 인공 별에 발을 딛은 순간, 이들 앞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진다.

가장 숨기고 싶었던, 가장 소중한, 가장 뼈아프면서 그리운 각각의 추억이 눈 앞에 가상현실로 펼쳐진 것. 그곳은 너무나도 그립고 안락한 기분을 주는 나머지, 한번 빠져들면 절대 헤어나올 수 없는 죽음의 공간이었다.

이미 잃어버린, 목숨보다 소중한 이와 마주친 하인츠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아름다운 추억만 가득찬 가상현실 공간에서 서서히 죽어가느냐, 후회와 절망뿐인 현실 세계로 돌아오느냐……

"뭐야 이 광경은? 마치 꿈같군…...아니 악몽인가?"

1980년~1990년대, 숱한 명작 일본 애니메이션이 등장합니다. 1984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같은 해 ‘초시공요새 마크로스 : 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 1988년 ‘아키라’ 등 화려한 작화와 연출을 앞세운 일본 애니메이션이 세계 곳곳에 알려집니다.

이어 1990년대, 작화에 이어 독특한 주제와 실험적 연출을 가미한 일본 애니메이션이 또다른 명작을 낳습니다. 1995년 상영된 일본 애니메이션 중 SF 명작으로 불린 작품이 ‘공각기동대’, 그리고 오늘 소개할 ‘메모리즈(Memories)’입니다.

메모리즈 포스터 / 에이원엔터테인먼트
메모리즈 포스터 / 에이원엔터테인먼트
이 작품은 단편 애니메이션 세개를 모은 옴니버스 애니메이션입니다. 감독은 앞서 설명한 SF 명작 ‘아키라’를 만든 오토모 가츠히로입니다. 그래선지, 이 작품도 개성 강한 주제를 화려한 작화와 연출, 심오한 주제의식까지 곁들여 묘사합니다.

메모리즈, 첫번째 작품 ‘그녀의 추억(Episode 1 Magnetic Rose)’의 주 소품은 ‘가상현실’입니다.

"이제는 어디에도 가지 마세요, 내 사랑."

가상현실은 ‘현실’을 ‘가상’으로 만드는 기술입니다. 기술이란 실과 바늘로 자아내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상상’과 ‘공상’, ‘과거’와 ‘미래’ 모두 가상현실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들어진 가상현실은 언젠가 허상처럼 부서집니다. 만들었고 만들며 만들 현실은 부서지지 않지만요.

그래서 가상현실은 위험합니다. 너무 깊게 빠지면 현실과 가상조차 구분하지 못하게 됩니다. 가상현실 기술이 발전할 수록 현실과 허상간 경계가 얇아집니다. 그 사이에서 사람은 오직 표류할 뿐입니다. 오늘날 사회 문제로 자주 언급하는 게임 중독조차 가상현실 중독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대개 강퍅한 현실을 피해 이상적인 가상현실로 도망칩니다. 하지만, 현실은 스스로가 바꿀 수 있지만, 가상현실은 바꿀 수 없습니다.

우리는 현실을 바꾸려다 가끔, 더러는 자주 실패합니다. 그럼에도 다시 일어나 바꾸려는 것이 삶이고 현실입니다. 모든 것이 이상적인 가상현실은 바꿀 필요가 없고 그럴수도 없습니다만, 그렇기에 발전할 수 없습니다.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인공 하인츠는 선택합니다. 스스로 지은 미소는 그의 선택이 옳았다는 증거입니다.

"추억은…...도망치는 장소가 아냐!"

메모리즈, 첫번째 작품만 소개했지만, 나머지 두 작품의 완성도도 아주 좋습니다. 두번째 작품 ‘최취병기(STINK BOMB)’는 기술을 맹신하는 사람, 그 만용을 경쾌하게 꼬집는 블랙 코미디 애니메이션입니다.

세번째 작품 ‘대포의 거리(Canon Fodder)’는 오토모 가츠히로 감독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각본 및 감독을 직접 맡은 작품입니다. 전체주의가 낳는 온갖 부조리와 비극을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천진난만하게, 날카롭게 풍자합니다. 가장 추천할 작품이기도 합니다.

잘 만든 영화는 두고두고 오래도록 진한 메시지와 여운을 내뿜고 교훈을 줍니다. 애니메이션 역시 그렇습니다. 25년 전 만들어진 작품이지만, 오늘날에도 재미와 교훈, 생각할 거리를 안겨주는 명작 SF 애니메이션 ‘메모리즈’였습니다.

차주경 기자 racingcar@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