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터리 기술침해 소송전’을 치르는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갈등의 골이 깊다. 양사간 분쟁은 소송 여부 보다 합의금 규모를 산정하기 위한 신경전으로 치달았다. 최소 ‘수조원대’를 요구하는 LG화학과 방어에 나선 SK이노베이션 간 최종 합의 금액에 배터리 업계의 관심이 쏠린다.

벼랑끝에 선 기업은 SK이노베이션이다. LG화학이 국내외 소송에서 잇따라 승소한 데 이어 최근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에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특허 소송 관련 증거인멸에 대한 제재를 요청하면서 전세가 완전히 기울었다.

ITC는 10월 5일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 간 분쟁의 최종 판결을 내린다. ITC가 SK이노베이션 제품의 수입 금지 결정을 할 경우 회사가 받게 될 타격은 단순 합의금 이상 규모가 될 수 있다. 미국 공장 가동을 통한 제품 생산이 불가능하며, 미국 내로 타국을 거쳐 수출하는 것도 안 된다. LG화학에 수조원대 합의금을 내는 것이 최종 판결로 입는 후폭풍에 비해 차라리 낫다는 평가가 나온다. 배터리 업계는 SK이노베이션이 피해 규모를 최소화 하는 선에서 조만간 합의에 나설 것이라고 전망한다.

신학철 LG화학 부회장(왼쪽)과 김준 SK이노베이션 총괄사장/ 각사
신학철 LG화학 부회장(왼쪽)과 김준 SK이노베이션 총괄사장/ 각사
7일 배터리 업계에 따르면 LG화학은 8월 28일 ITC에 SK이노베이션의 증거인멸을 주장하며 제재 요청서를 제출했다. LG화학은 요청서를 통해 SK이노베이션이 2015년 6월 '994 특허'를 등록하기 전부터 LG화학의 선행 배터리 기술(A7 배터리)을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994 특허 발명자가 LG화학의 선행기술 세부 정보가 담긴 문서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를 논의한 프리젠테이션 문서도 발견됐다고 설명했다.

SK이노베이션이 LG화학의 제재 요청을 협상 우위를 위한 압박용 카드라고 반박하자, LG화학은 이를 근거 없는 주장이라며 재반박했다.

LG화학은 4일 입장문을 통해 "남의 기술을 가져간 데 이어 이를 자사의 특허로 등록하고 역으로 침해소송까지 제기한 뒤 이를 감추기 위한 증거인멸 정황이 나왔다"며 "마치 협상 우위를 위한 압박용 카드이고 여론을 오도한다는 경쟁사의 근거 없는 주장에 사안의 심각성과 정확한 사실을 알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영업비밀 침해 소송에 이어 특허소송에서도 사실을 감추기 위해 고의적인 증거 인멸 행위가 이뤄진 정황이 드러나 법적 제재를 요청한다"고 덧붙였다.

SK이노베이션은 ITC에 반박 의견서를 제출해 소명하겠다는 입장이다. LG화학의 무리한 합의금 요구가 지속되면 소송전을 끝까지 치루겠다는 판단이다.

미국 조지아주 SK이노베이션 전기차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 SK이노베이션
미국 조지아주 SK이노베이션 전기차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 SK이노베이션
하지만 SK이노베이션에 남은 시간은 얼마 없다. 피해액과 배상금을 확정하는 10월 5일 ITC의 최종 판결이 나오면 돌이킬 수 없다. 영업비밀 침해 소송에 있어 ITC 역사상 조기 패소 예비결정이 최종 결정에서 뒤바뀐 경우는 없었다.

전기차 배터리 시장 규모는 40조원에 달한다. 2025년에는 180조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를 감안하면 최악의 경우 SK이노베이션이 판결 이후 배상해야 할 금액은 LG화학이 요구하는 합의금 규모보다 커질 가능성이 있다. 미 연방법 1836조에 따르면 영업비밀을 고의 또는 악의적으로 침해한 경우 법원은 침해자에 실제 손해액의 두배까지 배상금을 청구할 수 있다.

2019년 5월 미 델라웨어주 지방법원이 공개한 소송장에 따르면 LG화학은 SK이노베이션 영업비밀 침해로 인한 손실액이 10억달러(1조2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법원이 LG화학이 주장하는 손실 규모를 인정할 경우 최대 2조4000억원 수준까지 손해배상액을 청구할 수 있는 셈이다.

SK이노베이션이 패소할 경우 배상금 지불로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당장 미국으로 배터리 부품과 소재 등을 수출할 수 없다. 미 조지아주에 짓는 배터리 공장 가동도 멈춰야 한다. SK이노베이션은 이곳에서 생산하는 전기차용 배터리를 폭스바겐과 포드에 공급할 예정인데, 계획에 차질을 빚게 된다.

LG화학 관계자는 "이번 사건의 피해자가 명백히 LG화학임에도 SK이노베이션은 당사 비방 및 여론 호도 등 적반하장 격 행위로 소송의 본질을 심하게 훼손하고 있다"며 "지식재산권 보호 및 존중을 전제로 주주와 투자자가 납득할 수 있는 합의 결과를 내겠다"고 말했다.

이광영 기자 gwang0e@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