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장인 이 모씨는 평소 병원 가기를 꺼려했다. 바쁜 업무를 이유로 점심시간에 병원을 가야 하지만 근처 직장인들 대부분이 같은 처지라는 점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모바일 메신저로 간편하게 진료 예약을 하고 처방전과 수납까지 모바일로 해결했다. 환자가 몰려 몇 십분 이상 길게 줄을 서야 하는 수고를 덜었다.

# 신경외과 의사 A는 과거 환자 상태를 전자의무기록(EMR)에 남기기 위해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였다. 외래환자를 진료할 때는 물론 수술환자 검진과 수술 경과 보고 등 때를 가리지 않았다. 지금은 환자 얼굴을 마주보며 목소리로 환자 상태를 기록한다. 음성 EMR 덕이다. 이 음성 EMR은 A 의사 목소리를 인식하고는 EMR 시스템에 그가 말하는 그대로를 기록한다. 수술실에서도 그는 손가락을 바삐 움직이는 대신 목소리로 수술 내용을 모두 기록하고 있다.

 디지털 의료 장비를 도입한 스마트병원 수술실 모습. / 언스플래시
디지털 의료 장비를 도입한 스마트병원 수술실 모습. / 언스플래시
병원들이 최첨단 정보통신기술(ICT)을 원내 시스템에 도입하면서 변화한 모습이다. 스마트 병원의 일상이기도 하다. 디지털 기술의 힘을 빌려 의사와 환자가 빠르고 효율적으로 혜택을 누린다.

여기에 한국 정부는 최근 디지털 뉴딜의 핵심사업으로 ‘디지털 기반 스마트 병원’을 설립하겠다고 나섰다. 스마트 의료 인프라 구축에 힘썼던 병원들이 힘을 받는 뒷배가 됐다. 디지털 뉴딜 속 스마트 병원은 감염병 위험으로부터 의료진과 환자를 보호하고, 환자의 의료 편의 제고를 위해 디지털 기반 스마트 의료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입원환자 실시간 모니터링과 의료기관 간 협진이 가능한 디지털 기반 스마트 병원 체계를 만들겠다는 포부다.

AI부터 빅데이터까지
스마트 의료 인프라 꽉 잡은 韓 병원

의료계에 따르면 현재 스마트 의료 인프라 구축에 가장 앞선 곳은 ▲ 스마트폰을 활용해 진료 예약 등을 가능케 한 서울성모병원 ▲미국 IBM 인공지능(AI) ‘왓슨 포 온콜로지’를 도입한 가천대길병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 관련 의료 빅데이터 활용으로 세계 주목을 받은 아주대의료원이 꼽힌다.

서울성모병원은 2018년 국내 최초로 스마트폰 하나로 진료 예약부터 수납까지 가능한 스마트 병원을 구축했다. 환자와 의사가 거리낌없이 소통할 수 있는 창구를 마련한 셈이다. 이후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등 신기술을 연구와 임상에 적용했다. 병원은 타이핑 대신 음성으로 환자 상태를 기록하는 ‘보이스 EMR’과 환자 안내로봇 등을 도입해 톡톡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

가천대길병원은 인공지능 진료 시대를 주도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6년 국내 최초로 IBM의 의료용 인공지능 ‘왓슨 포 온콜로지’를 적용한 인공지능 암센터를 개소했다. 왓슨은 290종의 의학저널과 200종의 교과서, 1200만 쪽에 달하는 전문자료를 습득했다. 길병원에 따르면 의료진의 진료 결과와 왓슨 분석 결과는 약 70% 정도 일치한다. 일치하지 않는 결과는 임상 데이터와 환자 상태를 반복 검토하는 방식으로 환자를 치료한다. 이에 대한 환자 반응은 뜨겁다. 인공지능과 의료진을 통해 보다 정확한 진료를 받으면서도 진료 시간을 대폭 줄였다는 평가다.

아주대의료원은 국내 의료 빅데이터 산업의 선두주자다. 지난해 상반기 의료 빅데이터 전담조직을 통해 연구역량을 강화하고 사업화 모델 구축 등을 통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의료 빅데이터 센터를 개설했다. 최근에는 여기 속한 박래웅 아주대의료원 의료정보학과 교수가 코로나19 퇴치를 위한 빅데이터 연구와 관련해 빌&멀린다 게이츠 재단과 국제 공동 연구 협약을 맺으면서 다시 한번 이름을 알렸다.

◆ "스마트 병원 핵심은 ‘디지털화’가 아니다"

이처럼 국내 병원들이 스마트 의료 관련 인프라 다지기에 나선 가운데 관련 전문가들은 최근 정부가 펼친 디지털 뉴딜 정책에 아쉬움을 내비친다. 디지털 혁신은 옳은 방향이지만, 정책에 병원 참여를 장려하는 보상 체계 등 세부적인 사안이 없어 장기적으로 지속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입을 모은다.

 김용식 서울성모병원 병원장. / 서울성모병원
김용식 서울성모병원 병원장. / 서울성모병원
김용식 서울성모병원 병원장은 IT조선과 인터뷰에서 스마트 병원 핵심은 디지털화가 아니라고 거듭 강조했다. 정부가 정의하는 ‘5G, 사물인터넷(IoT) 등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한 디지털 기반 병원’과 스마트 병원에는 궁극적인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코로나19 상황을 예로 들었다.

김 병원장은 "디지털 기술 도입으로 의료 시스템 평가 등급에서 ‘최우수’ 등급을 받은 병원은 코로나19가 터진 이후로는 속수무책으로 끙끙 앓고 있다"며 "과거에는 환자 편의성과 접근성을 고려해 의료기기를 배치했다면, 코로나19가 확산하는 지금은 확진자와 입원환자를 분리해야 하다보니 병원 동선과 의료기기 활용에 혼란만 가중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코로나19라는 새로운 환경에 있어 최첨단 의료기기가 효율적으로 활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병원에서 기존 인프라 활용방안과 지원 체계 등의 논의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진단했다. 김용식 병원장은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아무리 좋은 기술을 들여 놓더라도 의료진 업무를 경감시키면서 그 시간을 환자에게 쏟아붓도록 유도하는 진정한 스마트 병원은 쉽게 구축될 수 없다"고 말했다.

◆ "정책 지속 가능성 높이려면 체계적인 국가 전략 필요"

국내 의료 빅데이터 권위자로 통하는 박래웅 아주대학교 의료정보학과 교수도 같은 의견을 내놨다. 그는 정책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려면 병원이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보상 체계 등 국가 전략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래웅 아주대학교 의료정보학과 교수 / IT조선
박래웅 아주대학교 의료정보학과 교수 / IT조선
박 교수는 "디지털 병원 만들기에 중점을 두기 보다는 디지털 기기를 활용해 안전한 의료 환경을 구축하고, 효과적인 치료를 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돼야 한다"며 "병원이 직접적인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법적 토대와 보상 체계를 만드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했다. 스마트 병원을 통해 정부와 국민은 혜택을 볼 수 있지만, 정작 그 서비스를 제공하는 병원에 돌아가는 혜택이 없다면 관련 서비스와 상품은 꾸준히 보급될 수 없다는 설명이다.

그는 "제품을 활용함으로써 병원 경영에 도움이 된다면 병원은 자연스럽게 디지털 의료기기를 도입하게 된다"며 "병원에서 수요가 높아지면 디지털 의료기기 기업은 다양한 제품과 솔루션을 공급하게 되는 선순환 구조를 이룰 것이다"라고 밝혔다.

박 교수는 디지털 기기만 몇 대 들인 병원이 스마트병원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질 경우 자칫 의료 시스템의 근본 가치는 올라가지 않은 채 비용만 낭비되는 결과나 나타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디지털 의료기기 도입으로 당장 병원이 얻는 것은 홍보효과뿐이다"라며 "의료 시스템의 근본 가치가 올라간 병원은 찾기 힘들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언 가천대길병원 인공지능 헬스케어 플랫폼연구소장 / IT조선
이언 가천대길병원 인공지능 헬스케어 플랫폼연구소장 / IT조선
가천대길병원에서 인공지능 헬스케어 플랫폼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이언 교수도 디지털 뉴딜 속 스마트 의료 정책에 대해 "핵심 개념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역별로 네트워크를 구성해 의료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돌릴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며 "차세대 스마트 병원에 있어 원천 기술과 최신식 디지털 의료기기만을 고집해선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이 교수는 "새로운 기술을 찾아내기 보다는, 기존 기술을 기반으로 진료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야 말로 스마트 병원이라고 불리울 수 있다"며 "앞으로 병원 간 경쟁은 데이터와 인공지능 등 기존 기술 역량을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에 달렸다. 차세대 스마트 병원에 있어 기술에 매몰돼선 안 된다"고 재차 강조했다.

김연지 기자 ginsburg@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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