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트뱅크가 매물로 내놓은 ARM이 결국 엔비디아의 품으로 들어갔다. 인수 규모도 업계 최고 수준이다. 지난 4월 이스라엘 반도체기업 멜라녹스 인수에 이은, 또 한 번의 큰 베팅이다. 엔비디아는 숙원이었던 ‘독자 CPU 개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이번 인수로 완성해냈다. 독보적인 GPU 기술에, 앞서 인수한 멜라녹스의 고속 데이터 네트워크 기술과의 시너지 효과도 엄청날 것으로 기대된다.

이번 엔비디아의 ARM 인수전을 보면 우리에게 친숙한 중국 고전 소설 ‘삼국지연의’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컴퓨터용 CPU 시장을 기준으로, 지금의 형세가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많다. 인텔을 위(魏), AMD를 오(吳), 엔비디아를 촉(蜀)으로 보면 대략적인 모양새가 나온다.

인텔은 잘 알려진 것처럼 컴퓨터용 CPU를 대표하는 기업이다. 과거 전국 시대나 다름없던 x86 계열 CPU 업계에서 독자적인 성능과 기술력을 앞세워 부동의 업계 1위 기업으로 등극했다. ‘샌디브리지’ 기반 2세대 코어 프로세서를 내놓은 이후, 탄탄한 라인업을 이어오며 컴퓨터용 CPU 시장을 거의 장악했다. 풍부한 인재와 힘으로 중원을 장악한 위나라와 포지션이 겹친다.

AMD는 과거 ‘불도저 아키텍처’의 대 실패 이후, 수년 동안 CPU 업계의 변방으로 밀려나 있었다. 절치부심 끝에 개발한 ‘젠(Zen)’ 아키텍처와 이에 기반을 둔 ‘라이젠’ 프로세서를 시작으로 CPU 업계에 화려하게 복귀했다. 제조 공정 전환에서 발목이 잡힌 인텔과 달리, 펩리스의 장점을 살린 한발 앞선 제조 공정으로 단숨에 인텔의 턱밑까지 따라붙었다. 변방서 힘을 키워 위에 맞서는 국가로 성장한 오나라와 비슷하다.

엔비디아는 오래전부터 GPU 분야에서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CPU에도 매우 큰 관심을 가진 회사였다. 아무리 GPU가 좋아도, CPU가 없으면 독자적인 컴퓨터로 기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연구 개발용으로 서버나 데이터센터, 슈퍼컴퓨터 등에 엔비디아의 GPU가 대거 탑재되고 있다. 하지만, CPU는 여전히 인텔이나 AMD, IBM 등이 탑재된다. 결국 그때 그때 필요한 CPU 기업들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 실력과 명성은 있지만, 독자적인 배후 세력이 없어 이곳저곳을 전전한 유비 일행과 모습이 겹친다.

엔비디아는 ARM 인수로 인텔, AMD와 CPU 시장에서 맞붙게 됐다. / 최용석 기자
엔비디아는 ARM 인수로 인텔, AMD와 CPU 시장에서 맞붙게 됐다. / 최용석 기자
지금의 상황은 삼국지연의에서 적벽대전이 막 끝난 시점과 비슷하다. 한때 CPU 업계를 통일할 것처럼 보였던 인텔은 10나노 공정 도입의 지연과 그로 인한 14나노 제품의 공급 부족이라는 ‘내우(內憂)’에, 7나노 공정과 멀티코어로 무장한 ‘라이젠’ CPU를 앞세운 AMD의 반격이라는 ‘외환(外患)’이 겹치며 크게 한 방을 얻어맞은 모양새다. 적벽에서 연환계와 남동풍을 업은 오의 화공에 걸려 큰 피해를 본 조조가 패퇴하는 모양과 흡사하다.

그 와중에 엔비디아는 멜라녹스를 인수하며 힘을 키우더니, 드디어 ARM을 인수하며 CPU 시장에 자신들만의 입지를 확고히 하게 됐다. 이 역시 형주에 입성해 서촉 진출의 발판을 마련한 후, 조조 패퇴 후 성도로 입성해 촉한을 세우는 유비의 모습과 겹친다. 공교롭게도, 이스라엘 기업인 멜라녹스, 영국 기업인 ARM 모두 세계 지도 기준으로 모두 서쪽에 위치한다. 삼국지연의 속 제갈량이 내세운 ‘천하삼분지계’가 CPU 시장에서 재현된 셈이다.

이제 ARM이라는 든든한 기술 배경을 얻게 된 엔비디아는 숙원이었던 자체 CPU+GPU 통합 프로세서 또는 통합 시스템을 앞세워 데이터센터 및 인공지능(AI) 시장 공략에 더욱 박차를 가할 전망이다. 핵심 목표는 여전히 데이터센터 시장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한 인텔이다. 출사표를 내며 북벌을 준비하는 제갈량의 촉한이 연상된다.

인텔 역시 AI 연구개발용 GPU 시장에서 엔비디아 독주를 막기 위한 자체 GPU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자체 생산까지 포기하고 TSMC에 생산을 맡기는 강수까지 뒀다. CPU와 메모리 반도체뿐 아니라 범용 AI, 사물인터넷(IoT), 비전 컴퓨팅, 자율주행 등 다양한 분야의 기술력과 영향력도 확대하고 있다. 적벽대전 이후 내실 다지기 및 수성 위주로 돌아선 조조와 위나라의 모습과 겹친다.

한숨 돌린 AMD는 CPU에 올인하느라 다소 등한시한 GPU 사업에 다시 눈을 돌리는 모양새다. 내달 발표 예정인 ‘라데온 RX 6000’시리즈가 그 첫 주자다. 얼마 전 ‘지포스 30시리즈’를 발표한 엔비디아의 빈틈을 노린다. 삼국 정립 후, 촉이 차지한 형주를 노리는 오나라의 모습이 연상된다. CPU 역시 공정 개선이 적용된 ‘젠 3’ 아키텍처와 이에 기반을 둔 4세대 라이젠 프로세서도 함께 선보이면서 추격의 고삐를 놓치지 않을 계획이다.

물론, 인텔과 엔비디아, AMD 3사의 최근 행보가 삼국지연의 속 위, 촉, 오의 행보와 상당 부분 겹치는 것은 단순 우연이다. 3사의 현재 행보와 그에 따른 업계의 향방은 삼국지연의의 이후 내용과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

그래도, 앞으로 3사가 CPU 시장, 더 넓게는 GPU와 통합 프로세서 시장에서 서로 경쟁 및 견제를 거듭하며 차세대 기술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될 것임은 분명하다. ITC 분야의 관계자이자, 역사 마니아 및 삼국지연의의 오랜 팬 관점에서 새롭게 펼쳐지는 디지털 시대 ‘삼국지’는 그만큼 매우 관심 있고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최용석 기자 redpriest@chosunbiz.com